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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11월호
농민공과 농촌교육, 그리고 중국 국가 _ 안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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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농촌의 삶을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들 - 생존, 혁명, 그리고 마켓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중국의 농촌 공동체와 농민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살펴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이 기획을 시작한지 벌써 10회째를 맞이하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혁명, 개혁개방 정책의 도입과 같은 지난 20세기 중국사회가 경험했던 역사적 변화가 어떻게 농촌여성의 아내, 어머니, 딸로서의 삶을 규정하였으며, 또 그들이 그러한 변화 속에서 어떻게 나름의 삶을 일궈왔는지 알아보았다. 이어질 세 번의 연재는 교육, 의료, 그리고 노후 대책이라는 소재를 통해 생존, 혁명, 마켓의 세 기둥이 중국농촌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 세 가지 소재를 선택한 이유는 나름 명백하다. 2012년 중국 국가통계청의 공식 자료로도 26천에 달한다는 농민공들이 그렇게 힘들게 도시로 공장지대로 나가 일하는 이유가 보다 나은 삶이라는 막연한 목표가 아니라, 주로 위의 세 가지 목적을 위해 현금을 모으는데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실제 이 세 가지 소재는 필자의 연구주제는 아니었지만 인터뷰 과정에서 빈번히 농민들의 이야기에 등장하였다. 필자의 연구주제와는 상관없이 어떤 의미에서는 중국 농민들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비록 충분한 주의도 관심도 기울이지 못했지만, 지난 20세기 농민의 삶의 변화를 추적하기 위해 이 세 가지 소재를 간략하게나마 다뤄보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중국 농민들이 자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가족이 흩어지고 1년 가계소득을 전부 쏟아 붓는데도, 왜 상당수의 아이들은 초등학교도 가지 못하는지 그 실정을 살펴보겠다. 현대화 과정에서 사회가 고등 교육을 받은 대학 졸업자를 우대하고, 이 때문에 농촌 가정이 종종 감당하기 힘든 비용을 지불해가면서까지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 것이 비단 현대중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비근한 예로, 현재 40대 초반인 필자의 선배들은 대학을 상아탑에 빗댄 우골탑이라고 부르곤 하였다. 시골 가정의 중요한 자산인 소를 팔아 등록금을 대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대 중국 농촌의 경우처럼 정부의 정책에 따라 단기간에 대학을 비롯한 교육의 비용과 학생수가 급변한 예는 드물 것이다. 실제 1978년부터 2005년까지 단 30년 만에 대학생의 숫자는 17.5배가 증가했다. 각 가정이 대학교육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0에서 보통 1만 위엔 이상으로 일반 농촌가정의 1년 수입과 맞먹는다. 반면, 1990년대 중반 중국의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취학률은 1970년대 중반에 비해 오히려 떨어졌다.


필자가 처음 교환학생의 신분으로 중국을 방문했던 1995, 중국의 대학생들은 공비생(公費生)과 자비생(自費生)으로 구분되었다. , 본래 정원내로 들어온 공비생들은 말 그대로 모든 학비와 기숙사비까지 정부가 지불하는 반면, 대학의 수익 사업차 정원 외로 들어온 자비생인 경우, 학비도 내고 학교 밖에서 따로 방을 구해 살아야 했다. 이처럼 대학교육이 1995년도까지도 일반적으로 무료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중국이 지난 한 세대 동안의 대학교육의 변화 폭을 느낄 수 있다. 실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중 하나가,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시작했던 북경대 학생들의 첫 문제제기가 대학당국이 더 이상 문구류를 무료로 지급해 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나아가 필자가 필드리서치 과정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1978년 전까지만 해도 농촌마을이 의사가 필요해 촌민 중 하나를 현()의 의료교육 프로그램에 6개월에서 1년 동안 보낼 경우, 단순히 학비와 비용이 무료일 뿐만 아니라, 그 촌민이 교육받을 동안 해당 촌이 입게 될 노동력의 손실까지 촌에 지불해주었다고 한다. 즉 교육은 개개인의 발전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필요를 채우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국가가 그 비용 일체를 지불했던 것이다. 물론 이를 막연히 긍정적으로만 볼 수 도 없는 것이 그렇게 교육받은 촌 출신의 의사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촌의 보건소(村卫生站)로 돌아와 다른 농민보다 약간의 더 노동점수를 받거나 딱히 환자가 없으면 다른 농민들과 함께 들에서 일해야만 했다. 실제 개혁개방시기까지 촌민들이 자녀들의 교육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고, 촌의 청소년들도 초등교육 이상을 받을 필요를 그다지 못 느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실제, 필자가 앞선 글에서 언급한 하북의 A촌과 산서의 C촌은 모두 1000명이상이 사는 행정촌임에도 불구하고 70년대 말의 집단화 시기까지 국가가 전적으로 관리하는 정규 초등학교가 없었다고 한다. 촌민들이 집단농장(农村集体)의 일부분으로 학교를 세우고 교사들 역시 집단농장의 노동점수를 통해 양식을 받았다. 국가의 역할은 교과서를 보내주고 교사 봉급의 20%정도를 현금으로 부담하는 정도에 국한되었다. 자연 교과 과정도 정규로 정해진 것이라기보다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글 읽기와 산수 정도였고 농번기 때면 교사와 학생들 모두 들에 나가 같이 일하는 식이었다. 결국 이 시기 농촌의 초등교육은 생존을 위한 수단 정도에 머물렀고, 그 이상의 의약이나 수의(獸醫), 기계정비 등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전문 교육을 받을 경우, 이는 (현정부 단위의) 국가가 그 비용을 지불하는 사회주의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졌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습득한 기술과 지식에 대한 보상도 최소한에 머물렀기에 전문/고등 교육에 대한 욕구와 수요는 비교적 제한적이었던 것이다.

 

                                                          산서 C촌 유아원

                       산서 C촌의 유아원 (1).JPG

 

교육에 대한 이 모든 전제는 70년대 말 개혁개방 정책의 실시를 시작으로 불기 시작한 시장과 현대화의 바람에 의해 송두리째 변하게 된다. 국가가 대학 졸업자의 직장을 정해주던 시기가 90년대를 기점으로 끝나게 되고, 고급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국가 밖의 시장 영역에서 훨씬 더 많은 보상을 받게 되자 고등 교육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자 신분 상승의 통로가 되었다. 동시에 외국에서 수입한 값싼 농산물에 농민으로서의 삶이 경쟁력과 희망을 잃게 되자 농민들은 그들의 자식만이라도 농민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중등교육이나 가능하면 고등교육까지 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90년대 말부터 정부도 학생들이 대학교육을 공동체나 국가를 위한 지식/기술 습득이 아닌 사적 시장에 취업의 수단으로 보게 되자 교육비용을 학생들과 그 가족들에게 떠넘기게 되면서 학비는 천정부지로 뛰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최악의 정책은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몇몇 대학에 정부의 자원을 집중한 반면, 농촌의 학교들에 대한 기본적인 지원마저 줄여버린 것이다. 실제 1998년 사례를 보면 북경대와 청화대가 각각 16억 위안을 보조 받는 동안, 중국 농촌의 초등학교 전체가 받은 중앙 정부의 지원금은 23억 위안에 머물렀다. 농촌의 비정규 초등학교를 지탱하던 집단 농장이 사라져 버린 후, 정부의 지원마저 줄어들자 농촌의 초등학교들이 사라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실제 하북성 A촌의 초등학교는 폐교되어서 촌 정부가 접수하는 바람에, 필자가 A촌을 방문했을 때 그 폐교의 교무실에 침대를 놓고 머물렀다.

 

                                                             폐허가 된 하북 A촌의 학교

                        폐교가 된 하북 A촌의 학교.jpg

결국 초등학교에서부터 중앙정부나 성정부의 지원을 받는 학교, 도시의 사립학교나 외국인 학교들, 현이나 향진(鄕鎭) 정부의 지원을 받는 학교, 마지막으로 겨우 정부의 봉급을 받는 교사들이 있지만 학교 운영은 학생들에게 걷는 각종 공과금으로 유지되는 시골 학교들로 서열화 되고, 교사의 질이나 상급학교의 진학률 등에도 극심한 차이가 나게 되었다. 결국 농촌의 아이들은 아예 학교를 포기하거나 또 지원을 잘 받는 향이나 현의 학교로 지원하는 양극화 현상이 만연해지게 되었다. 결국 많은 농촌 지역에서 2000년대 초등학교 취학률이 1970년 중반보다 낮아진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농촌 가정으로서는 부모가 농민공이 되어 현금을 벌어 교육비를 대든지, 아니면 아예 교육을 포기하든지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필자가 방문한 산서 C촌의 학교가 좋은 사례로, 다행히 C촌의 학교는 근근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학구열이 강한 필자의 친구는 30분 거리의 향 소재 학교까지 자녀를 통학시켰다. 의무 무상 교육이라는 정부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매달 적지 않는 잡비를 지불해야 했지만, 대학이라도 가려면 최소 향에 있는 학교에라도 가야 한다고 했다. 하북 A촌의 한 할머니는 며느리가 손자를 현의 중학교까지 데리고나가 뒷바라지하고 아들은 그 손자의 학비를 벌기 위해 도시로 나간 바람에 78세의 나이에 혼자 외롭게 살게 되었다고 인터뷰 중 눈물을 흘렸다. A촌의 전직 수의사 역시 2005년 기준으로 1만 위안인 아들의 대학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수의직을 버리고 도시로 날품팔이 났다가 다쳐 집에서 요양 중이었다. 그는 1년 옥수수농사를 지으면 9000, 4500kg을 수확하는데, 종자대금, 비료비, 자기 먹을 것을 모두 제하고 절반정도를 팔아 겨우 1500위안 번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자신과 아내, 그의 딸이 모두 농민공이 된 이유를 설명했다. 실제, 20056월 당시 국제시장에서 옥수수 1톤의 가격이 100, 630위안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중국의 옥수수가격은 국제시세에 거의 연동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중국 평균 2000평 정도의 땅을 일구는 중국의 한 농부가 수 만평을 기계로 관리라는 미국 농부들과의 국제 경쟁에서 패하고, 정부의 관심에서도 소외된 채 고등교육을 돌파구로 삼아 온 자신과 아내의 농민공 소득을 포함한 가족 전체의 연 수입인 1만위안을 아들의 대학교육비로 쏟아 붓고 있었던 것이다.

 

                                                                      산서 C촌 학교 교실

                       산서 C촌 학교 교실.JPG

 

【華北 농촌 관행 조사 10】

 

안병일 _ Saginaw Valley State University

 

                                                  

 

참고문헌
Guo, Gang. Persistent Inequalities in Funding for Rural Schooling in Contemporary China. Asian Survey 47, no. 2 (2007): 213-23.

Tsang, Mun C.Education and National Development in China since 1949: Oscillating Policies and Enduring Dilemmas.” In China Review 2000, edited by Lau, Chung-ming and Jianfa Shen, 579-618. Hong Kong: The Chinese University Press,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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