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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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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호
인천 화교의 항일운동, 그리고 일동회 _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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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립박물관에서 지난 31일부터 화교들의 항일운동-1943년 인천, 일동회전시회가 개최되고 있다. 화교가 일제강점기 때 조선에서 항일운동을 했다고 하면 의아해하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시계추를 중일전쟁 시기로 되돌려 보는 게 좋다. 중일전쟁은 193777일 루궈차오 사변으로 시작되어 일본이 중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하는 19458월까지 총 8년간에 걸친 전쟁이었다.


당시 전력상 훨씬 우위에 있던 일본이 중국에 패한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일본이 194112월 진주만을 무모하게 공격하면서 당시 세계 최강의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벌임으로써 중일전쟁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는 점, 중국국민당 군대와 중국공산당 군대의 철저 항전 등에 원인을 찾는 학자가 많다. 하지만, 소수이기는 하지만 해외 거주 화교의 인적 물적 지원이 중국 승전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일본의 중국 근현대사 연구자로 유명한 기쿠치 가즈타카 교수는 그중의 한 명으로 중일전쟁을 화교의 시점에서 재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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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인천경찰서 소속 형사들이 일동회가 방화한 현장을 검증하는 모습

 

예를 들면, 미군에 자원입대한 미국의 화교는 13,000명에 달했으며, 1938년 장제스 충칭 국민정부 외화 수입의 절반은 화교의 해외 송금이었다. 동남아 화교는 동남아를 점령한 일본군에 맞서 각지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중일전쟁 시기 조선 화교의 처지는 동남아 화교와 비교해 볼 때보다 복잡했다. 일본군은 루궈차오사변 직후 파죽지세로 중국의 북부와 남부 지역을 점령하여 점령지에 친일 중국인을 앞세워 괴뢰정권을 세웠다. 한반도 화교의 고향인 산둥성과 허베이성에는 베이핑(현재의 베이징) 임시정부가 세워져 화베이 지역을 통치했지만, 일본군이 그 배후에서 정권을 좌지우지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 화교는 자연스럽게 베이핑 임시정부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19403월 왕징웨이 친일 난징 국민정부가 베이핑 임시정부와 난징 유신정부를 통합하여 수립되면서 조선 화교를 관할했다. 베이핑 임시정부와 난징 국민정부는 기본적으로 친일 정권인 관계로 조선 화교에게 일본 및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협력할 것을 지시했다. 조선 화교의 처지에서 항일운동은 본국 정부의 정책을 거스르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거주지 정부인 조선총독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기에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조선 화교의 항일활동은 정리해서 말하면 19377월부터 194112월까지의 전쟁 전반기는 저조했지만, 그 후의 후반기는 매우 활발한 양상을 보였다. 조선총독부 치안 당국에 항일 혐의로 검거된 화교는 193715, 19399, 19400, 19416, 194226, 194343, 19441961명으로 점차 증가의 추세를 보였다. 조선 화교의 항일운동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천 화교가 중심이 된 일동회(日東會)사건이다. 항일 단체 일동회는 19402월 중국공산당 팔로군의 공작으로 인천 거주 산둥성 출신 화교 21명으로 조직되었다. ‘팔로군은 중일전쟁 시기 중국공산당의 주력 부대의 하나로 주로 산둥성, 허베이성을 중심으로 한 화베이 지역에서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였다. 일동회는 1940222일부터 1943424일까지 약 3년 동안 방화 12, 일본군의 첩보 제보 2건을 감행했다. 194312월까지 체포된 15명 가운데 9명은 외환죄(外患罪), 방화, 군기보호법 위반, 국방보안법 위반의 죄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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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일동회사건의 핵심 인물인 사항락()과 손건치(×)


일동회의 핵심 인물은 사항락(史恒樂)이었다. 그는 산둥성 펑라이현 출신으로 당시의 나이는 34세였다. 산둥성에서 중학을 졸업한 후에 1920년대 중반 부친 사축삼(史祝三)이 거주하던 인천으로 이주했다. 사축삼이 1936년 사망하자 부친의 가업인 여관 겸 잡화상점의 복성잔(復成棧)을 물려받아 경영했다. 그는 193912월 복성잔 점원 손덕진(孫德進)의 권유로, 산둥성 무핑현으로 귀향 중 현지의 팔로군 유격대원에 의해 우충서(于忠瑞) 부대에 가입했다. 그는 팔 로군으로부터 인천에서 동지를 획득해 일본의 군사비밀 및 경제 정보 탐지, 방화파괴 공작의 실행, 이를 통해 일본 후방지역을 교란하여 일본의 전력을 약화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이러한 지령을 받은 사항락은 복성잔의 점원인 손덕진, 왕배국(王培國)과 모의하여 인천의 경제 상황, 식량부족 정보를 산둥성과 인천을 오가던 기선 헤이안마루(平安丸)의 선원 장홍유(張鴻兪)를 통해 우충서 부대에 전달했다. 그리고 사항락은 그들과 함께 1940222일 오후 150분 직접 제조한 초보적 형태의 다이너마이트 4개를 항동 소재의 인천세관 구내 제1 창고에 경비원, 인부 등이 부주의한 틈을 타 다이너마이트를 화물 속에 넣어 폭파, 창고와 화물 전부가 전소하여 120만 원의 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대략 1원이었다.


또한 사항락은 화취창(和聚昌)의 점원인 손건치(孫建治, 25)와 공모하여 중앙동 소재 오카다시계상점 부근의 상점에 방화했다. 그는 1943420일 밤 12시경, 방세능(方世能, 44)이 제조한 다이너마이트 1개를 손건치에게 전달하고, 손건치는 공익사(共益社)와 일본인 우메다 쓰네히로의 주택 남측 골목 쪽으로 다이너마이트를 던져 방화했다. 방화로 인해 33,000원의 재산손해가 발생했다. 이어 사항락은 손건치와 공모하여 1943423일 심야 12시가 지나 신포동의 인천키네마부근 일본인 와카야마의 주택과 주변 일본인 주택 창고에 다이너마이트를 던져 3만 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방세현(方世賢, 37)은 인천에서 채소 농사를 짓고 있었다. 19408월 방세능, 왕지신(王志信, 50)의 권유로 일동회에 가입했다. 1941223일 밤 방세현은 왕지신, 왕병경(王秉經, 43)과 공모하여 학익동의 오다후쿠와타주식회사(御多福棉株式會社)의 위생재료공장에 침입하여 다이너마이트로 방화, 4만 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왕지신과 방세능은 19411128일 밤 10시경 신흥동의 일본인 가와무라 무네토 경영의 정미소에 자체 제조한 다이너마이트를 던져 공장과 창고, 숙소를 불태웠으며, 이웃한 스기노정미소의 일부도 불태워 35만 원의 손해가 발생했다.


방세영은 19416월 방세현의 집에서 방세능으로부터 중국인의 행복과 일본 타도를 위해 일동회 참가를 권유받고 가입했다. 그는 주안 거주의 방송학(方崇學, 34)과 산둥성의 팔로군을 돕기 위해 군사비밀과 경제 관련 정보수집을 공모했다. 왕병경은 194261일 산둥성 귀국 시 옌타이에서 손건치를 만나 일동회에 가입하고 군사비밀 수집을 의도했다. 왕지신은 인천에서 채소 농사를 짓다가 19406-7월 방세현의 집에서 방세능의 권유로 일동회에 가입했다. 19427월 그의 집에서 오진매(吳振梅, 44)와 모의해 인천 부근의 군사상의 정보 및 경제 관련 정보수집을 모의했다.


재판에서 사항락, 방세능, 손건치, 왕지신, 방세영, 왕병경, 방숭학, 오진매는 외환 및 군기보호법 위반, 국방치안법 위반의 판결을 받았다. 이 가운데 방세능, 손건치, 방세현은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으로 넘겨졌으며, 사항락, 왕지신, 방숭학, 오진매는 공소 기각이 됐다. 방세영, 왕병경은 혐의 불충분으로 기소 면제 처분을 받았다. 그런데 사항락, 왕지신, 방숭학, 오진매가 공소 기각된 것은 이들이 수감되어 있던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사항락은 1944220, 왕지신은 같은 해 18, 방숭학은 같은 해 112, 오진매는 비슷한 시기에 각각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이들 4명이 같은 형무소에서 비슷한 시기에 사망한 것은 가혹한 고문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서대문형무소는 조선의 많은 독립운동가가 고문을 이기지 못해 옥사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곳에서 이렇게 외국인인 4명의 화교가 항일운동을 하다 고문으로 인해 옥사한 것은 새로운 사실이다. 필자는 20167월 항일운동을 하다 투옥된 이들 화교의 고향인 산둥성의 펑라이, 옌타이, 롱청 등지를 방문했다. 웨이하이시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마침 팔로군의 항일 영웅을 소개하는 전시회가 개최되고 있었지만, 위의 항일 화교에 대한 소개가 없었다. 박물관장에게 일동회사건을 이야기하자 큰 관심을 보였다. 사항락의 고향인 펑라이시를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올해는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미중 패권 경쟁이 격렬하게 진행하는 가운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그 대립 양상이 더욱 가속화하고 있어 한중관계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이러한 때 인천 화교 항일활동의 사실과 의의를 한중이 공유할 수 있다면 더욱 뜻깊은 한중 수교 30주년이 될 것이다.


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 22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


                                                                        


* 이 원고는 박물관풍경53(인천시립박물관, 2022.04)에 실린 글을 수정·보완한 것임을 밝혀둔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사진 2. 국사편찬위원회 아카이빙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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