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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6월호
베트남화교와 한반도화교의 출신성 별 분포 _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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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학에 자주 사용되는 방()이라는 용어가 있다. 원래는 돕다라는 뜻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동아리’, ‘동료의 뜻으로 바뀌어, 지금은 동향단체 혹은 동향단체 회원의 뜻으로 정착됐다. 세계 화교의 주요한 출신지는 광동성, 복건성, 산동성 등지로 이들 동향단체를 광동방, 복건방, 산동방이라 한다. 중국은 지대물박’(地大物博)의 나라이기 때문에, 북방(北方)과 남방(南方)의 자연환경은 물론이고 사회경제, 문화가 지역에 따라 다르다. 해외에 이주한 화교는 동향단체를 중심으로 모이고 서로 친목을 도모하며, 이주 전의 교향(僑鄕)의 관행을 이주지에서 그대로 표출하는 경향이 강하다. 화교학 연구에서 동향단체의 분석을 중요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총독부경무국이 1931년 조선화교의 각 출신지별 분포를 조사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산동방은 12,640·56,259명으로 전체 호수와 인구에서 각각 81.4%·81.8%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산동방에는 하북성과 중국 동북3성을 포함하여 북방(北幇)이라 부르기도 했다. 북방 소속 화교는 전체 호수와 인구의 각각 99.3%98.5%를 차지했다. , 조선화교는 산동방, 그 영역을 보다 확대한 북방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화교사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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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인천의 산동동향회관


그 반면, 광동성 출신인 광동방은 32, 196명에 불과했다. 그 이외에 절강성, 강소성, 안휘성, 복건성, 호북성, 호남성 출신 화교는 남방(南幇)을 결성하여 활동했는데, 소속 호수와 인구는 175, 1,004명에 불과했다. 조선화교 가운데 북방이 절대적으로 많은 이유는 한반도가 중국의 북방(北方) 지역과 인접해 있는 지리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이들 동향단체는 산동회관 혹은 북방회관, 남방회관, 광방회관이라는 거점을 두고 활동했다.


반면, 베트남화교는 다른 동남아화교와 마찬가지로 남방(南方) 출신 화교가 중심이었다. 프랑스의 인도차이나연방정부는 화교의 출신지 별 인구를 정확히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다만, 각 언어별로 화교를 분류해 놓은 통계가 있다. 1924년 각 언어를 기준으로 각 방별 인구를 추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광동방은 8만여명으로 전체의 35%로 가장 많았으며, 복건방은 55,000여명(24%)으로 그 뒤를 이었다. 광동성과 복건성의 경계인 조주(潮州) 출신의 조주방(潮州幇)5만여명으로 전체의 22%를 차지했다. 해남방(海南幇)15,000여명(7%), 객가방(客家幇)15,000여명(7%), 기타 11,000여명(5%)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동향단체의 분포에는 약간의 변화가 발생했다. 1950년 언어별로 살펴 본 동향단체 분포는 광동방이 337,000명으로 전체의 45%, 조주방은 225,000명으로 전체의 30%, 복건방은 6만명으로 전체의 8%, 객가()75,000명으로 전체의 10%, 해남방은 3만명으로 전체의 4%, 기타 3%였다. 25년 사이에 광동방과 조주방이 증가한 반면, 복건방이 상대적으로 감소하거나 정체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베트남화교의 동향단체는 광동방, 조주방, 복건방, 해남방, 객가()5방 체제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나 5방 체제가 형성되기 전의 동향단체는 7()로 구성되어 있었다. 5방 체제가 성을 단위로 한 규모가 큰 동향단체로 볼 수 있지만, 7부는 성의 아래 행정단위인 부()를 중심으로 한 동향단체였다. 여기서 7부는 광주(廣州), 조주(潮州), 복주(福州), 장주(漳州), 천주(泉州), 경주(瓊州), 휘주(徽州)를 말한다. 베트남 남부의 비엔호아에 있는 칠부고묘’(七府古廟)와 같이 ‘7는 당지의 화교 전체를 부르는 명칭이기도 했다. 참고로 조선화교는 부가 중심이 된 동향단체는 결성되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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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베트남 호이안의 조주회관


베트남 화교는 출신지에 따라 종사하는 직종도 약간 차이가 났다. 광동방의 직업은 정미업과 상업 종사자가 많았고, 노동자, 직인도 많았다. 복건방은 상업계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주로 정미업, 무역업 종사자가 많았다. 프랑스 상인의 매판(買辦)도 그들 가운데 많이 나왔다. 해남방은 후추 재배와 어업 그리고 가사도우미 종사자가 많았다. 조주방의 대다수는 농부, 선박 승무원 및 쿨리 등 육체노동자였다. 객가방은 농부 및 노동자가 많았으며, 상인으로서는 차 상인이 많았다.


이처럼 베트남 화교 가운데 광동방, 조주방, 복건방이 상대적으로 많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광동성은 고대부터 상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지리적으로 베트남과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고, 같은 아열대 지역에 속해 기후가 비슷한 것도 이들 지역으로부터 이주를 촉진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계절풍에 의한 선박 운행이 용이하여, 이주와 무역에 좋은 조건을 제공해 주었다.


둘째는 인구밀도와 경제적 요인이다. 광동성과 복건성은 인구밀도가 베트남에 비해 조밀했다. 광동성은 1148명인데 반해, 베트남의 통킹(東京)지역은 75, 코친차이나지역은 71, 안남지역은 38명이었다. 여기에다 근대 중국은 군벌의 학정, 관료의 가렴주구, 비적의 발호 등으로 안정된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던 것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 3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참고문헌

朝鮮總督府警務局(1931.10), 外事關係統計, 朝鮮總督府.

逸見重雄(1941), 佛領印度支那硏究, 日本評論社.

太平洋協會編(1940), 佛領印度支那:政治·經濟, 河出書房.

Lynn Pan general editor(1999), The Encyclopedia of the Chinese Overseas, Harvard University Press

이정희(2018), 한반도화교사, 동아시아.

Nguyen Thi Thanh Ha(2017), ベトナムにおける明鄕家譜社會組織する人類學的硏究, 廣島大學博士學位論文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 출처는 다음과 같음 

그림 1 : 인천화교협회소장

그림 2 : Nguyen Thi Thanh Ha(2017), 사진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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