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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3월호
프리부미, 토톡, 페라나칸 – 푸젠의 발리촌 (2) _ 김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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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에 이어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식민의 본질은 착취와 기회의 박탈이다. 식민제국은 이 착취를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차별과 배제를 즐겨 사용하였다. 소수의 백인 통치자는 행정적 용이함을 위해 종족 집단간 혹은 종교 집단간 디바이드 앤 룰(Divide & Rule)’ 전략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여왔다. 기독교의 동남아시아 전파 역시 순수한 종교적 목적도 있었겠지만, 종교와 그에 수반한 근대문명을 매개로 믿을 수 있는, 즉 내 편인 현지 통치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 이러한 식민지 통치의 유산은 그대로 이어져 20세기 중후반 국가 형성과정에서 유독 동남아시아에 종족/종교간 소요가 두드러진 이유가 된다. 식민통치자들은 현지의 특정 집단을 행정 및 군사, 경제적 기반으로 활용하였는데, 그들은 식민정권의 권위를 바탕으로 준지배계층으로 군림하며 현지인들을 대리 착취하였고, 또한 그에 걸맞는 권한과 권위, 명예가 주어졌다.

 

한편 때로는 현지의 집단이 아닌 외부의 이민자들을 동원하여 같은 역할을 부여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영국령 동남아시아에서 주로 활동하던 남아시아인들이다. 싱가포르, 홍콩, 상하이 조계지 등에서 경찰병력으로 동원되던 인도 시크교도, 말레이시아에서 주로 대부업으로 부를 축적하던 남부 타밀인들, 영국령 버마 지역의 미얀마인들을 탄압하고 농노로 만들기 위해 주로 지주 및 행정 고위직으로 동원되던 인도인들이 잘 알려진 케이스다. 21세기 현재 불교국가인 미얀마에서 갈등을 빚고 있는 남아시아계 이슬람인인 로힝야 역시 그러한 식민의 유산으로 발생한 종족/종교간 소요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한껏 착취하고 떠나가 버린 제국에 의해 남겨진 식민의 상처 뒤에는 남은 이들끼리의 반목과 갈등이 봉합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분출되고 있다.

 

동남아시아 화교화인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화교화인의 존재를 다른 유럽 식민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방패막으로 활용함과 동시에 20세기 초 전통제국인 시암(Siam)에서 타이족 중심의 근대국가로 거듭나면서 화교화인들을 완전히 현지화하려 노력한 태국(Thailand)을 제외하고, 나머지 국가에서는 식민지 본국을 대리하여 현지인들을 경제적으로/행정적으로 통치한 화교화인에 대한 묵은 원한이 깊었다. 이것이 그대로 지금까지 은연중에, 때로는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반화교화인 정서로 이어지고 있다.

 

1945815일 일본이 항복선언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 인도네시아가 17일 독립을 선언한다. 그리고 수카르노를 대통령으로 하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성립하려 하는데. 당연하게도 네덜란드는 식민지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재지배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네덜란드 본국은 더이상 전쟁을 수행할 만할 여력이 없었고, 결국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 관심이 있는 다양한 세력들이 연합하여 재지배를 시도하게 된다. 여기에는 말레이로 돌아온 영국군, 잔존한 일본군, 네덜란드의 죄수 및 일부 현지인들로 구성된 식민지 군대,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의 혼혈 후예들로 구성된 유라시안 군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의 시작이다. 이 전쟁은 1949년까지 4년을 끌었고, 결국 국제사회의 여론이 악화되면서 압박을 받은 네덜란드의 항복으로 19498월에서 11월까지의 회담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독립이 승인되었다.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동티모르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1950-60년대 독립하게 되는데, 비록 독립을 쟁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직면하게 된 도전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경제적 저개발 극복, 인종적으로 다양하게 분산된 공동체의 통합, 내부정치적 혼란 정리, 2차 대전의 종식과 함께 시작된 냉전기 미국, 중국, 소련의 동남아 개입에 대한 대응 등등 어느 하나 쉬운 문제가 없었다. 유독 동남아시아 지역에 독립전쟁, 내전, 혁명, 반란, 독재 등등의 소요들이 빈번했던 이유일 것이다. 워낙 다양하고 복잡한 동력들이 충돌하고 분리되어 흔치 않은 정치적 현상들을 자주 보여주기 때문에 동남아시아학에는 정치학 분야의 성과가 유독 많다. 그만큼 동남아시아는 전후 탈식민 시기 아시아 피식민 국가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현상들의 축소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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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특히 인도네시아의 경우 수 천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환경적 영향으로 인해 2010년 통계에 따르면 최고 22종족이 백만 이상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거대한 규모가 자바인들로 9천 만이 넘고, 중국계의 경우 280만 정도로 전체 인구의 1.2%에 불과하지만, 그 경제적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이것이 바로 신생 독립국 인도네시아의 최대 고민이었다.


같은 도전에 직면한 인도네시아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너무나 다양한 섬들이 흩어져 있고, 개별 섬마다 다른 언어와 관습, 종교, 인종, 문화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만의 공통된 정체성을 동일하게 적용함으로써 통합을 이루어내기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1950년대 초기 수카르노의 통치 아래 인도네시아 지도부는 무조건 하나의 공동체로 묶기보다는 다양한 공동체를 하나를 묶을 수 있을 만한 좀 더 거대한 우산과도 같은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중후반에서 1960년대 중후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된 것이 바로 각 종족마다 경제적 인프라가 매우 불균형하게 퍼져있었다는 점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실 이 10년 동안 경제적 불균형을 바로잡는 정책의 실패가 수카르노 정권이 결국 저항에 부딪히고 실패하게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 과정에서 수카르노 정부가 행한 정책이 바로 프리부미로 불리던 현지인 중심의 경제성장 정책을 제시하면서 과도하게 화교화인들에게 집중된 경제적 부를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그 일환으로 1955년 인도네시아에서 반둥회의가 열렸을 때,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던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압박하여 결국 화교화인의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는 협정에 사인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이는 동남아시아 현지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화인들에게 현지에 남을 것인지, 타이완으로 갈 것인지, 홍콩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공산화된 중국대륙으로 건너갈 것인지를 강요한 화교화인사의 중요한 분수령 가운데 하나다.

 

또 한가지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화교화인들에 대해서도 개별적으로 또 다른 조치가 행해지는데, 바로 수카르노가 1959년 발표한 대통령령 10(Presidential Decree No.10)이다. 해당 조치의 내용은 외국인이 더이상 농촌지역에서 소매업을 경영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외국인으로 특정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국계 인도네시아 거주민을 대상으로 한 정책이다. 지난 연재에서 언급한 것처럼 네덜란드 식민지를 거치며 자바섬과 수마트라 등 인도네시아의 주요 경제 영역은 매우 작은 소상공업부터 거대한 부를 축적한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화교화인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심지어 농촌 지역의 상업마저 화교화인들에 의해 장악되다시피 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이는 궁극적으로 강력한 내셔널리즘을 바탕으로 통합된 인도네시아를 형성하기 위해 반화교화인 정서가 팽배해 있던 국내경제를 화교화인 중심에서 현지인 중심으로 전환하기 위한 것이었다.

 

196111일부터 시행될 해당 조치에 대해 중국공산당 정부는 19591210일에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화교화인들에게 라디오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방송을 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 6년 동안 중국 정부는 배를 통해 대략 10만 명의 화교화인들, 정확히는 농촌지역에 거주 중인 화교화인들을 중국대륙의 고향에 정착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다. 대부분 푸젠(福建)과 광둥(廣東) 지역으로 옮겨진 이들 가운데 300여 명의 남녀로 구성된 발리 출신의 화교화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바로 현재 푸젠성 발리촌 주민들의 시작이다. 현재 푸젠성 발리촌에 거주 중인 발리 출신의 화교화인들은 그들이 발리에서 했던 소매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심지어 문화대혁명의 격변을 거치면서도 이 영업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난 연재의 사진처럼 입구 역시 발리의 문양으로 도배되어 있고, 중국 정부에 의해 지어진 거주용 내부의 빌라 건물들 역시 매우 싼 값에 주민들에게 제공되었다. 단지의 배후에 조성된 광장에서는 인도네시아 전통공연이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아마 힌두교를 믿는 발리섬의 특성상 이슬람 중심 자바지역의 전통공연이 아닌, 힌두 발리의 전통공연이나 춤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해본다.

 

흥미로운 사실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화교화인의 경제적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해 반포한 법령이 농촌지역의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을 뿐, 도시 단위의 화교화인 자본가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 인도네시아의 경우 농업지역에서의 화교화인들의 활동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출한 것이지, 도시지역에서의 활동을 (현지 인도네시아 민간인에 의한 비공식적차별이나 학살 및 폭력을 제외하면) 공식적으로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 농촌지역에서의 화교화인 노동력이나 소매상의 경우 현지인을 통해 충분히 대체 가능한 것임에 반해, 도시지역의 인프라를 대부분 제공해 주고 있던 화교화인 대기업 및 중소기업의 경우 국민국가 인도네시아의 경제적 근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경제정책에서의 실패로 인해 대중들의 비판을 받고 있던 수카르노 정권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 현지인들은 엘리트 계층과 대중을 막론하고 서구식 근대화와 경제적 발전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 실제 (아마 대부분 농업종사자이거나 영세한 소매상들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10만 명 이상의 화교화인들이 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중후반이 되면 도시지역의 화상(華商)들은 쿠테타로 수카르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수하르토를 중심으로 현지 권력과 유착관계를 맺고 인도네시아 경제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이들 유력 화교 기업가들은 이미 수카르노 정권 시기부터 현지 군부 엘리트들과 후원(client)계약을 맺고 생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로 인해 생존한 화교화인 기업가들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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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독립한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이끈 두 대통령, 수카르노와 수하르토.


사실 농촌지역의 단순 노동력이나 소상공인의 경우 충분히 대체가능한 인프라였다. 이는 중국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1950년대 후반, 60년대 초중반 중국정부의 대()화교화인 정책은 미묘하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이전 화교화인들이 직접 건너오는 것을 유도했던 중국 정부는 (정부가 실질적으로 투자와 귀향을 바랬던) 대자본을 소유한 기업가들이 현지에 어떻게든 적응하려는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현지에 적응하면서 본국에 다양한 형태로 기여(식민상태로부터의 독립과 공산화)할 것을 유도하는 식으로 변화한다. 실제 중국정부의 도움이 필요한 소상공인이나 노동자들의 경우 상술한 예를 제외하고는 더이상 공식적으로 귀향조치를 취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매정하게 들리겠지만, 그런 인력이야 중국 대륙에도 넘쳤던 것이다.

 

화교화인과 현지인을 두고 벌이는 인도네시아와 중국정부의 이러한 동상이몽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아시아에 불게 되는 탈식민, 내셔널리즘, 이데올로기 열풍이 가져온 새로운 현상이었다.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22


김종호 _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그림 1. 인도네시아 지도

https://en.wikipedia.org/wiki/Ethnic_groups_in_Indonesia#/media/File:Indonesia_Ethnic_Groups_Map_English.svg

 

그림 2. 독립한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이끈 두 대통령, 수카르노와 수하르토

https://ko.wikipedia.org/wiki/%EC%88%98%EC%B9%B4%EB%A5%B4%EB%85%B8

https://ko.wikipedia.org/wiki/%EC%88%98%ED%95%98%EB%A5%B4%ED%86%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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