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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12월호
누가 베란다를 소유하는가 – 5피트 공간의 발견과 Verandah Riot (3) _ 김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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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인구, 특히 중국인 이주자의 숫자가 급증하면서 숍하우스 건축군이 싱가포르 도심지의 도시환경을 장악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발생한 문제가 5피트 너비의 외랑식 통로, 즉 베란다 공간의 성격에 대한 문제였다. 사실 이 공간에 대한 싱가포르 식민정부의 입장은 명백하였다. 공공의 공간(public shpere)으로서 보행자에게 안전하고 건강한 보행로를 제공해 주고, 질서정연한 도시미관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일찍이 영국령 식민도시로서 싱가포르를 계획한 스탬포드 래플스는 1822년 인도인 거주구역(Chuliah Kampong)을 조성하면서 베란다 공간에서 노숙하며 취식하는 인도인들의 행태를 금지시킬 것을 요구한 바 있다. 영국 식민정부의 베란다 공간에 대한 인식은 그들이 제정한 해협식민지 법령에서도 잘 드러난다.

 

공공도로에 인접한 거주구의 개방된 베란다는 보행자를 위한 공공도로이고, 각 가구주의 재산권의 대상이 된다.”(The Laws of the Straits Settlements Vol.2(1901-1907) 1920, 246)

 

사실 영국 식민정부의 입장에서는 베란다 공간의 공공적 성격을 강조한 것이지만, 거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베란다 공간의 사적소유에 대한 권리를 보장해준 것이기도 한 애매한 정의였다. 실제 중국인 이주민들의 경우 숍하우스 건축군의 조성으로 발생한 베란다 공간을 그들의 사적인 공간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영국 식민정부가 애초에 의도한 보행자를 위한 공간이라는 베란다의 공공적 성격을 침해하는 현상이었다. 이전 9월호 연재에서 언급한 바 있는 폭죽의 사용과 관련한 법령 역시 이러한 애매함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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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1950년대 싱가포르 베란다 공간 호커의 모습

 

그림 1에서 보는 것처럼, 공적공간인 베란다 공간을 각 숍하우스의 소유주뿐만 아니라 다른 소매상들 및 호커(hawker)들이 확장하여 활용하였고, 노숙 및 취식하는 경우도 많아 영국 식민정부가 골치를 썩고 있었다. 그림에 보이는 현상들은 비교적 현대에 가까운 경우지만, 이미 1843년 싱가포르의 언론에서 숍하우스 주인들에 의한 베란다의 사적 사용과 떠돌이 봇짐 장사꾼들의 무단점유로 베란다의 원래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을 보면 매우 오래된 현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영국 식민정부에서는 싱가포르의 도시개발 초기부터 횡행하던 베란다의 사적점유를 막기 위해 1853년 도시 최초의 자원보호법(Conservancy Act)을 시행하여 베란다 공간의 자유로운 사용에 대해 공공권을 강조하고, 싱가포르 식민정부 총독으로 하여금 베란다의 불법점거를 단속함과 동시에 보행을 방해하는 각종 물품들을 치울 것을 명령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데, 그 근본 이유는 상술한 베란다 공간에 대한 영국 식민정부의 애매한 정의 때문이었다. 자원보호법을 통해 베란다의 사적점유를 금지한 이후인 1872년에도 여전히 영국 식민정부는 베란다 공간을 보행자를 위한 공공도로이면서 각 숍하우스 소유주의 사적 공간이라는 모순된 정의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영국 식민정부의 방침과는 상관없이 중국인 이주자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던 말라카 스트리트(Malacca Street), 뗄록 아이엘 스트리트(Telok Ayer Street), 캐널 로드(Canal Road) 등지에서는 중국인 상점주들이 직원들을 시켜 베란다 공간과 중앙도로에까지 상품들을 진열해놓고 있는 상황이 목격되고는 하였다.

 

영국 식민정부와 숍하우스 소유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중국인 이주자들 사이의 베란다 공간의 활용을 둘러싼 긴장관계는 1880년대에 이르면 최고조에 다다르게 되는데, 특히 1887년 싱가포르 도시개발과 행정을 담당하던 싱가포르 시정위원회의 성격이 시정을 논의하는 자문기관(Singapore Municipal Committee)에서 식민정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행정기구(Singapore Municipal Commission)로 변화한 것이 중대한 분수령이었다. 초대 위원장으로 임명된 로웰 박사(Dr. T. I. Rowell)는 개인의 재산권 침해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명무실하던 자원보호법의 실행을 강제하였다. 결국 1888221일 로웰 위원장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시행하라는 위원회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으로 베란다 공간에서 매매를 행하는 상점주들을 강제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중국인 상점주들 및 숍하우스 소유주들의 경우 이미 220일부터 문을 닫고 장사를 접음으로써 항의를 표시하였고, 몇몇 중국인들은 유럽인들 및 공관을 향해 돌을 던지는 등의 과격한 행동을 벌여 소수의 유럽인들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소위 베란다 폭동(Verandah Riot)’의 시작이다. 몇몇 중국인 공동체에서는 그들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력거꾼들을 동원하여 거리에서 폭동을 일으키도록 사주하기도 하였다. 폭동이 심화될 기미가 보이자 시정위원회의 자문위원이자 중국인 이주자 그룹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영국인인 토마스 스콧(Thomas Scott)이 중재하여 222일에 극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지게 된다.

 

베란다 공간을 이용하여 생존을 도모하던 많은 중국인 이주자들의 권리와 공공의 공간으로서 베란다 공간을 보행로로 확보하고자 하는 싱가포르 식민정부 사이에 이루어진 타협은 숍하우스 상점주가 물건을 진열하되, 최소 2인 이상의 보행자가 다닐 수 있는 통로는 확보해놓도록 규정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어, 공간의 활용을 보장받은 숍하우스 상점주의 경우 다시 장사를 재개했지만, 보장받지 못한 노동자들(coolies), 호커들, 인력거꾼들(rickshaw coolies)의 경우 타결 뒤에도 무리를 지어 다니며 유럽인들을 공격하는 등의 불만을 표시하였다. 비록 일시적으로 타협을 이루었지만, 이 베란다 공간을 둘러싼 식민정부와 중국인 거주민들 사이의 갈등은 영국 식민정부로부터 싱가포르가 독립하는 시기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된다.

 

1965년 독립한 싱가포르 정부 역시 1960년대에서 70년대까지 이어진 호커들을 비롯한 행상인의 베란다 공간 점거를 심각하게 여겼고, 싱가포르인들의 일상에 깊이 스며든 이러한 식민시기 전통을 통제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였다. 일반 행상인들의 경우 80년대, 90년대에 걸쳐 싱가포르 전역에 지어지는 쇼핑몰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되었고, 호커들의 경우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지어지기 시작한 HDB를 통해 점차 베란다에서 사라지게 된다. HDBHousing and Development Board의 약자로 싱가포르 정부 산하 주택개발공사를 가리킨다. HDB에 의해 지어진 일반 서민용 주택공사 아파트를 같은 명칭으로 부르는데, 이때 싱가포르 정부가 행한 정책이 바로 베란다와 거리의 호커들을 한곳에 모아 HDB단지 내에 푸드코트 형식의 식당가를 조성함으로써 호커들의 행상활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도시의 비위생, 경관문제 등을 해결하였다. 그 유산은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 싱가포르인들의 의식(衣食)은 각 구역마다 형성된 쇼핑몰과 쇼핑몰 내의 푸드코트, HDB단지 내의 호커센터(hawker center)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과거 대량의 중국인 이민자들을 수용한 숍하우스 건축양식이 현대의 싱가포르에 와서는 HDB로 대체되었다고 한다면, 식민지 시기 상업지구와 거주구역, 음식문화를 형성한 숍하우스 건축양식이 각각 쇼핑몰, HDB, 호커센터로 그 기능이 나뉘어졌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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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싱가포르의 HDB, 쇼핑몰, 호커센터. 위의 사진은 필자가 싱가포르에서 거주했던 부킷판장(Bukit Panjang)지역의 쇼핑몰과 HDB의 경관이다. 현재 싱가포르인들 거주형식의 80%HDB이고, 싱가포르인들의 생활권은 각 HDB 단지와 지하철역 주변에 형성된 쇼핑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아래 사진은 클레멘티(Clementi)지역 HDB단지 내에 형성된 호커센터의 모습이다. 비싼 물가를 자랑하는 싱가포르에서도 주민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호커센터의 음식만은 매우 싼 것을 볼 수 있다.

 

이번 호의 연재에는 김종호, 싱가포르 · 샤먼 도시개발과 도심지 주상복합 건축문화의 형성 - 숍하우스 ‘5피트외랑공간의 발견과 역사적 의미-, 동아연구382, 2019의 일부내용이 포함되어 있음.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20


김종호 _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그림 1. 1950년대 싱가포르 베란다 공간 호커의 모습

http://www.nlb.gov.sg/biblioasia/2016/07/09/forgotten-foods-mealtime-memories/

그림 2. 싱가포르의 HDB, 쇼핑몰, 호커센터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ukitpanjang.JPG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Food_court_in_Clementi,_Singapore_-_20070116-01.jpg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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