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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7월호
동남아시아 역사 속 혼혈(1) - 메스티꼬스, 유라시안, 끄리스땅 _ 김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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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현상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고려해야 할 사항은 너무나 다양하다. 이민의 목적, 거주기간, 본국 및 거주국과의 관계, 디아스포라 개념, 규모, 정치/경제/문화/사회적 맥락 등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하여 이민 현상을 연구해야 하는데, 대부분 혼혈의 존재가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어떠한 개념으로도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혼혈의 다양성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민자 그룹과 본국 및 거주국과의 관계를 연구할 때 본국과의 관계를 긴밀히 가져가면서 거주국에 동화되지 않고 이질적인 존재로 살아가는지, 혹은 거주국의 일원으로 동화되는지 등의 문제를 이질성(heterogeneity)과 동질성(homogeneity)의 개념으로 해석하려 하지만, 혼혈이 발생하게 되는 순간 어느 한쪽의 개념 틀로는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양상이 발견된다.

 

국적 혹은 종족이 다른 부모를 가진 혼혈은 두 지역 모두에 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어느 지역에도 속하지 않는 특징으로 인해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역사학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정체성 관련 이슈를 제외하고도 그들의 비중은 적지 않다. 특히 각종 문명의 교차로로서 동남아시아 역사 속 혼혈 그룹은 그 다양성만큼이나 중요한 역사적 작용을 해왔기 때문에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한 영역이다. 본 연재에서는 유럽국가들의 동남아시아 진출로 인해 발생한 다양한 혼혈 그룹 가운데 크게 포르투갈인과 동남아시아인 사이의 혼혈, 중국인과 동남아시아인 사이의 혼혈로 나누어 살펴보고, 그 역할을 비교함으로써 혼혈이 동남아시아 역사에 끼친 영향을 살펴볼 예정이다.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최초의 유럽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동방무역은 종교전쟁이라는 정치적/종교적 동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향신료 무역의 장악이라고 하는 경제적 이유가 훨씬 중요했다. 리스본의 포르투갈 상인들은 15세기까지 수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아시아의 이슬람 상인들과 베네치아 상인들에 의해 독점되어 온 향신료 무역(과 그에 따라 부과되는 과중한 세금)에 치를 떨고 있었고, 무슨 수를 써서든 이 독점구조를 깨고 싶어 했다. 16세기 포르투갈의 한 장군이 향신료 무역의 핵심항구였던 믈라카(Melaka)를 무력점령하고 난 뒤 한 말을 보면 이러한 독점구조를 얼마나 의식하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다.

 

믈라카는 무어인(Moors 이슬람인)들이 매년 중동으로 가져오는 모든 향신료와 약재의 공급지다. (포르투갈의 믈라카 점령으로) 카이로와 메카는 완전히 망할 것이고, 베니스인들은 그 상인들이 포르투갈에 오지 않는 이상 어떠한 향신료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카이로와 메카는 동남아시아와 인도를 거쳐 오는 향신료들이 서아시아에서 모이는 거점이었고, 이를 베니스 상인들이 받아서 유럽에 보급하는 형태의 독점공급이 당시 동서무역의 헤게모니를 형성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믈라카의 점령과 함께 이슬람인들이 완전히 망할 것으로 봤지만 실제로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다. 후술하겠지만 이는 포르투갈이 근본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사실 이 독점공급을 완전히 깨버린 것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다).

 

이러한 열망은 스페인도 마찬가지였는데, 결국 1492년 스페인 왕의 스폰서를 받은 콜럼버스의 배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고, 이어서 1498년 포르투갈 왕의 지원을 받은 바스코 다 가마의 함대가 리스본에서 출발해 희망봉을 돌아 인도 서부 해안 캘리컷(Calicut)에 도착하는 항로를 발견하게 된다. 또한 1521년 포르투갈인이지만 스페인 왕의 스폰서를 받은 마젤란의 함대가 신대륙을 지나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 세부(Cebu)에 도착하였다. 이와 같은 대항해시대의 개막과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이슬람 상인들의 네트워크를 벗어나는 유럽인이 통제하는 동서교역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바스코 다 가마의 동방항로 개척 이후 포르투갈은 그동안 간접적으로 구입해 오던 향신료를 직접 구입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공급로를 직접 통제하고자 했다. 1510년 고아(Goa) 점령, 1511년 믈라카(Melaka) 점령, 1515년 페르시아만의 입구인 호르무즈(Hormuz) 점령, 그리고 몰루쿠 제도의 암본(Ambon)1513년에 점령함으로써 리스본에서 희망봉을 거쳐 페르시아만, 인도, 동남아, 동북아(이후 16세기 중반 마카오와 일본 규슈 진출)에 이르는 항로에서 각 지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하였다. 소위 에스따도 다 인디아(Estado da India)라고 불리는 포르투갈의 동방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그중 고아항이 동방항로의 헤드쿼터 역할을 담당하였고, 믈라카와 암본 지역의 경우 몰루쿠 제도에서 생산되는 정향, 육두구 등 향신료의 수급을 담당하였다.

 

포르투갈은 유럽국가들 가운데에서는 최초로 동방항로를 건설했지만, 그 야망처럼 완벽하게 통제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우선 향신료 무역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던 믈라카가 포르투갈에 의해 점령되자마자 일원화되어있던 향신료 무역의 중심이 수마트라의 아체지역, 자바지역 등으로 분산되어 다원화하는 현상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포르투갈이 가진 자체적인 한계가 있었는데, 바로 긴 장거리 무역을 유지할 만한 자체적 인력이 부족했다. 물론 16세기 포르투갈의 동방진출은 초반 주로 무력을 동반한 왕실함대 위주에서 16세기 중반 왕실의 허가를 받은 소수의 귀족들을 중심으로 함대가 조직(Fidalgos)되어 동방무역에 종사하는 방식으로 그 범위가 넓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 직영함대, 소수의 귀족함대로는 향신료 루트를 독점하기 위해 요구되는 재정, 선박건조, 노동력(선원)을 충당할 수는 없었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포르투갈 왕실이 민간인들에 의한 동방무역을 허가해 주면서, 16세기 중후반 포르투갈의 동방무역은 민간 무역업자들에 의해 주로 이루어지게 된다. 다만 이러한 민간무역의 경우 왕실함대나 귀족함대들처럼 일정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현지의 권력자나 현지인들과의 협력을 통해 생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16세기 중후반 동남아시아에는 포르투갈 민간인들이 다양한 형태로 지역사회와 연계하며 활동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까사도스(Casados)와 메스띠꼬스(Mesticos)라 불린 이들이 있었는데, 전자는 현지의 여성과 결혼한 포르투갈인 남성을 가리키는 말이고, 후자는 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을 의미한다. 포르투갈 왕실은 고질적인 인력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정책적으로 포르투갈 군인 및 민간인들을 현지의 여성들과 결혼하도록 장려하였고, 그로 인해 발생한 혼혈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하였다. 사실 이것이 바로 포르투갈의 향신료 무역이 가진 근본적 약점이었는데, 초기에 무력으로 주요 거점 항구들을 점령한 기세가 무색하게도 동남아의 포르투갈 세력은 본국 자체가 작은 국가인지라 이슬람 세력처럼 전체적으로 향신료 무역을 통제할 수 없었고, 거대한 영향을 끼치지도 못했으며, 그 결과 현지인들에게 협력하여 그 힘을 빌리는 방식으로 이미 잘 정비된 향신료 무역에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활용된 것이 바로 현지의 여성과 결혼한 포르투갈인 남성과 그 혼혈 그룹이었다.

 

특히 혼혈인 메스티꼬스의 경우 검은 포르투갈인(Black Portuguese)이라 불리며 계속해서 동남아 지역사회에 정착해 살았는데, 이는 포르투갈 왕실이 의도한 바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혈연으로 연결된 이들 메스띠꼬스는 포르투갈과 동남아 지역사회를 이어주는 경제적/문화적 연결고리 역할을 했을 것이고, 그들을 통해서 현지에서의 자원이나 사업상의 이권획득을 쉽게 달성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혈 그룹의 존속과 계속된 결혼으로 그 후예들의 외모가 점차 현지인들에 가까워지면서 그들은 백인 포르투갈인들과 현지인들 사이에서 검은 포르투갈인이라 불리는 이질적인 외모를 커버하기 위해 오히려 더욱 자랑스럽게 스스로 포르투갈인임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모자, 복식, 종교, 서구에의 지식 등을 매개로 스스로를 동남아 현지사회와 구분 지으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그들은 포르투갈인들 특유의 유럽식 모자를 쓰고 유럽식 복장을 입고 다녀 “Topass” 혹은 “Hat people”이라 불리기도 했고, 포르투갈어를 쓰면서 가톨릭을 믿는 등 비록 해외에서 태어났지만, 스스로를 포르투갈인이라 믿으며, 그렇게 행동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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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포르투갈 혼혈(Topass)과 그 부인. 17세기 포르투갈의 몰락과 네덜란드의 동남아 진출로 수많은 포르투갈 혼혈들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에 취직하여 네덜란드의 동남아 진출에 협력하게 되는데, 그림의 포르투갈 혼혈 남성 역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직원으로 소위 네덜란드 스타일(Dutch Style)의 복장과 포르투갈 혼혈의 상징인 모자를 쓰고 있다.

 


그러다가 1580년과 1640년 사이에 스페인에 의해 포르투갈이 병합되는 사건이 유럽에서 벌어진다. 물론 왕만 같고 각 왕국은 법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상황이었지만, 아시아에 남은 포르투갈인들에게는 본국의 아무런 지원 없이 각자도생 혹은 현지에서의 네트워크를 통해 생존해야하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포르투갈의 동방무역에 변화가 발생하게 되는데, 향신료 무역을 통해 본국으로 자원을 보내는 방식에서 점차 아시아 내부에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각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함으로써 생존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마카오와 나가사키를 거점으로 삼으면서 중국-일본-동남아를 잇는 삼각무역을 중개하는 방식으로 생존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점차 길어지면서 각 포르투갈인들은 아시아에서 현지화하면서 생존해 나가야만 했다. 이는 메스띠꼬스와 같은 혼혈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포르투갈 본국의 영향이 점차 줄어드는 와중에 이들은 동남아 현지사회에 깊숙이 적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유산은 동남아시아 사회에 여전히 유라시안(Eurasian)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라시안은 주로 포르투갈인들을 비롯한 유럽인들(네덜란드, 영국)과 그 혼혈의 후예들이 현지화하여 형성한 소수 그룹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현재 싱가포르에는 흔히 세 인종(중국, 말레이, 인도)이 거주한다고 여겨지고 있지만 최근 유라시안을 제4의 종족으로 인정하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지난 2018년에는 리셴룽 총리가 유라시안 협회의 행사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현재 그 인구는 16,900명 정도로 0.4%에 불과하지만, 다양성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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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싱가포르의 4대 인종

 

이들 유라시안 그룹은 유럽국가들의 동남아 진출 이후 건너 온 직원들, 선원들, 군인들과 현지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들의 후예가 그 기원이다. 가장 초기의 유라시안은 포르투갈과 아시아인 사이의 혼혈인 메스띠꼬스들이고, 현재 그들의 후예를 따로 끄리스땅(Kristang)이라 부르기도 한다. 주로 포르투갈인과 말레이인들 사이에 태어난 혼혈들의 후예를 가리킨다. 말레이시아/싱가포르 전역에 37,000 명 정도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믈라카에 거주하는 끄리스땅들은 그들 자체적인 춤과 음식문화를 조금이나마 유지하고 있다. 이 혼혈들은 주로 포르투갈인들이 많고, 그 다음으로 네덜란드인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들은 주로 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살다가 19세기 싱가포르가 영국의 식민지로서 다양한 종족들이 모여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에게 살기 편한 인프라를 갖춘 도시로 성장하면서 대거 모여들게 된다. 동남아 각 지역뿐 아니라 인도의 고아를 비롯한 포르투갈이 진출한 아시아 여러 지역의 혼혈들이 많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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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말레이-포르투갈인 혼혈의 후예인 끄리스땅 


이들의 한 가지 특징은 혼혈로써 동남아 지역사회에 깊이 적응하고 있었지만, 주로 유럽 제국주의 식민정부 아래에서 생존해 온 그룹으로 친서구적 특성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포르투갈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남아 진출과 지배과정에서도 여전히 가지고 있던 특징이었는데, 심지어 이들 유라시안들은 19452차 대전 이후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가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독립을 선언하여 네덜란드와 독립전쟁을 벌였을 때에도 네덜란드가 형성한 연합군에 소속되어 인도네시아인들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메스띠꼬스, 끄리스땅, 유라시안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들 포르투갈의 혼혈 그룹은 동남아 현지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했지만,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기간 동안 꾸준히 친유럽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현재는 소수지만 그들만의 혼혈 정체성을 가지고 동남아시아 사회의 다양성에 기여하고 있다. 포르투갈 혼혈들의 이러한 특징은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한 중국인 혼혈들과는 비슷하지만 또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16】


김종호 _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그림 1. https://en.wikipedia.org/wiki/Topasses

그림 2. https://www.immigrationsolutions.sg/articles/an-overview-of-singapores-four-main-races/

그림 3. https://i.pinimg.com/originals/e5/50/67/e5506727b2cac26d3658ed0233f8b3e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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