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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6월호
만주의 발해 유적과 동아시아 관행들의 습합 _ 유장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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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발해는 아득한 역사 시대 속의 왕조다. 특히나 중국과의 공식교류가 있기 전까지 발해 땅은 가볼 수 없는, 그리하여 사라졌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일종의 로망이기도 하였다. 그런 탓인지 서태지의 노래 발해를 꿈꾸며가 나오자 그렇게 열광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2016년의 만주 여행에서 우리들은 발해와 관련된 유적들은 거의 빠짐없이 훑어보았다. 발해의 상경이 있던 용천부, 발해의 서고성, 상경 흥륭사의 석등, 육정산 고분 및 정혜공주묘 등등 발해 유적은 만주의 중앙부에 넓게 퍼져 있었다. 발해가 자리를 잡았던 대지는 넓고 풍요로웠다. 고구려 시대와 연대기 상으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발해가 만주를 통치하던 시절은 기후 조건이나 식물의 생태환경이 이전보다 좋아졌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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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발해박물관 앞에 펼쳐진 중부 만주 지역의 논.

이제 이곳에서도 벼재배가 가능할 정도로 만주의 생태조건도 많이 바뀌었다.

 

그 중 인상이 깊었던 곳은 용천부의 발해 유적이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돈화에서 아침에 출발하여 용천부 유적이 있는 흑룡강성 영안현까지는 대략 3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일망무제의 광야이기는 했지만 평야에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식물이 자라고 있다. 약간의 구릉이 펼쳐진 곳에는 옥수수를, 평지에는 벼를 심은 것이다가이드의 말을 들으니, 이 일대의 쌀이 중국내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맛이 있단다. 제일 좋은 것은 흑룡강성의 무상無常에서 생산하는 것이라지만, 영안 일대의 벼농사도 그에 못지 않게 좋다고 한다

 

발해 때의 경작 환경이 어땠는지 알 수는 없다. 만주 남부의 화룡 부근에서 중북부인 이곳 영안으로 천도한 것을 보면, 자연환경이나 농업 및 산업 생태적 환경 역시 그리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하튼, 발해국의 지리적 환경은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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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발해의 상경이 있던 용천부의 도성 성곽.

새로 복원한 것이라서 옛 맛은 없었으나 발해 성벽의 양상은 알 수 있었다.


용천부에서는 성곽과 내부의 건물지, 그리고 새로 지은 박물관과 옛 박물관을 모두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두 군데 박물관은 모두 어수선했다. 신관은 현재 유물을 진열하는 중이어서 관람이 자유롭지는 않았다다행히도 우리가 교과서에서 볼 수 있었던 발해의 중요 유물들은 거의 모두 관찰할 수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힘찬 용두며, 고구려의 숫막새에 그려진 연화문과 유사하면서도 좀 더 힘차 보이는 연화문, 부여나 경주에서 봤음직한 대형 치미, 각종의 부처님과 석조물.. 사진이 없어 개개 유물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발해 문명의 중요 부분을 이해하는 데에는 적지 않게 도움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발해유물이니, 이처럼 좋은 기회가 있을까 싶다.

 

용천부에 있던 상경은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에 위치해 있다. 8세기 중엽에 제3대 문왕 대흠무가 창건하였으며이로써 서고성 시대가 마무리되고 용천부 시대가 열린 셈이다. 다시 도성을 훈춘으로 옮겼다가 794년에 상경으로 되돌아왔다고 하니, 이곳이 여러 도읍 중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도성은 당대의 장안성을 모방하였다고 말한다. 외성, 내성, 궁성의 삼중 구조로 된 성 자체가 커다란 방형이고성내의 가방(街坊)이나 이방(里坊)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당대에도 그랬지만, 방과 방 사이에 폭 1.1미터의 이방담을 쌓아 출입을 통제하였다. 이 이방 안에 주택과 사찰, 시장이 정연하게 놓여 있는 구조이다. 내성은 외성안의 중심부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남북 약 1.4킬로미터이고, 이 안의 심처에 궁성이 자리잡은 구조이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궁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벽과 그 안에 남아있는 주춧돌이다. 주춧돌은 크기도 그렇거니와 용도에 맞게 다듬었기 때문에 건물을 짓는데 매우 세심하게 진행한 거 같다

 

당시에 본 발해 유물 중에 찬탄을 자아냈던 것이 바로 흥륭사의 석등이었다상경성에는 몇 개의 절터가 있는데, 이 흥륭사는 보통 제2사지로 알려져 있고, 이 경내에 남아 있는 것이 흔히 말하는 발해 석등이다. 발해 시대의 유일한 건축물이기도 하다.


우선 그 크기가 우리를 압도하였다. 원래 높이가 6.4미터이고, 현존의 높이는 6미터라고 하지만, 6미터의 높이로도 그 위용을 뽐낼 만 하였다. 한국 내에서 비교적 잘 알려진 법주사 쌍사자석등의 높이는 3.3미터이니 그 높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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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흥륭사의 석등. 기단부, 중앙의 간주석, 불창이 있는 화사부,

최상의 상륜부가 잘 남아 있는 보기 좋은 석등이었다. 동아시아 석등들의 장점만 따온 모습이었다.


게다가 규모가 커도 전제의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그것은 각 부분들이 거의 원모습대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륜부가 일부 사라졌고, 기단부도 땅 속에 매몰되어 있어서 그 본래의 크기가 약간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원형의 모습이 제 크기대로 잘 남아 있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기단부나 중앙의 간주석, 상대석 등을 넣을 수 있도록 창이 나 있는 화사석, 그 위의 상륜부 등 일반적으로 석등이 갖추어야 할 모든 부분이 제 모습을 갖춘 채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이 석등을 빛나게 해 주었다

 

특히 불을 넣어 외부를 밝힐 수 있도록 조성된 화사부가 눈에 띄었다각 조각이 섬세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사석을 받치는 연꽃도 우람한 느낌이었고, 화사석의 옥개석 크기나 처마의 서까래 등도 잘 다듬어진 것이었다. 또한 형태가 팔각원당형이어서 다른 지역의 석등, 예컨대 통일신라시대나 당대의 그것과도 비교될 수 있을 터였다. 하여이를 두고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의 탑신부와 연관이 있다고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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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흥륭사 경내에 있는 천년의 느릅나무. 석등과 더불어 흥륭사를 지켜온 신목이라 할 것이다.

 이 나무에서도 이 지역에서 지켜져 온 종교적 관행을 읽는다.

 

사실 저 정도의 크기에 각 부분이 조화를 이룬 채 전체의 모양을 구현해 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발해의 불교와 그 표현 방식이 높은 수준에 올랐기 때문에 가능하였으리라고 본다. 그 점에서 불교보다 도교에 더 심취해있는 당 왕조의 종교적 관행보다는 통일신라나 고구려의 불교에 더 가까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왜 이렇게 크게 만들었을까? 도성도 큰 규모였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또한 주위에 산과 같은 자연경관이 없기 때문에 일부러 크게 조성해서 하나의 상징물로 널리 보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한국처럼, 석등이나 석탑의 배후에 산이 있다면 그것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지만, 광대한 평원에서는 오히려 크기로 그 존재를 과시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전체적으로 보면 고구려양식, 당나라 양식, 통일신라 양식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발해인의 창의성이 발휘된 걸작으로 보아도 무방할 터이다. 국가도 사라지고, 궁터 역시 흔적만 남아 있어서 아쉬웠지만, 이 탑만은 발해를 웅변으로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내가 발해야..’ 하는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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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발해의 서고성에 남아 있는 동전형 우물. 돈과 물은 세상의 모든 인간에게 오랫동안 필수품의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시공을 떠나도 변치 않는 관행일 것이다.


역사와 문화유산은 온전하고 순수하게, 또 고립된 채로 존재하기는 어렵다. 발해의 도성은 당나라의 도성 관행이, 흥륭사의 석등은 고구려, 당나라, 통일신라 등의 불교관행이 뒤섞여 있는 듯이 보였다. 일본의 유풍이 들어왔을 수도 있고 현지의 오랜 문화와 종교적 관행들이 새로운 왕조에 이입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관행이란 영속적인 듯 하면서도 성격이 다른 관행을 만나면 새로운 관행을 만들면서 새 사회를 주조하는 셈이다. 만주라는 공간은 그 점에서 동아시아의 많은 관행들이 유입되고 충돌하고 새로이 주조되는 실험장인 셈이었다


【현장에서 마주친 관행 21】


유장근 _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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