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1월호
청명절 이야기 _ 김지환
프린트 복사 페이스북

060828381f30e924014dc9854e086e061c95f79d.jpg

 

청명절은 중국에서 춘절(음력 1월 1일), 단오(음력 5월 5일), 중추절(음력 8월 15일) 등과 함께 주요한 명절의 하나이다. 청명은 “봄을 맞아 만물이 깨끗하고 풍경도 맑게 빛나는 시기”라는 뜻이다. 본래 청명절은 24절기의 다섯째 절기로서, 양력으로는 4월 5, 6일 경이 된다. 절기 가운데 명절을 겸한 것은 청명 하나뿐이다. 이 날은 한식의 하루 전날이거나 같은 날일 수도 있는 까닭에,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라는 속담이 생겨났다.


청명은 고대의 상사(上巳), 한식 등이 융합되어 변화된 전통명절로서, 당나라에 와서야 명절로 지정되었다. 상사란 삼월의 첫 사실(巳日)을 가리키며, 한국에서는 삼짓날이라고도 부른다. 기록에 따르면 상사절의 축제는 진(秦)나라 이전부터 있었다. 정(鄭)나라에서는 삼월 상순의 사일에 제사를 지내고 남녀가 만나는 명절로 정하였다. 정나라 사람들은 삼월을 불길한 달이라 하여 목욕을 하여 귀신을 쫒아버리는 풍습이 있었다.


청명절의 또 다른 풍습으로 사람들은 이날 취사를 금하고 찬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한다. 이는 '청명절'과 '한식절'의 화합으로 유래한 것이다. 한식은 “묶은 불을 끄고 새 불을 기다리는 동안 밥을 지을 수 없어 찬밥을 먹는다”는 까닭에 한식(寒食)이라 하였는데, 2,600여 년 전 진(晉) 문공(文公)이 충신 개자추(介子推)를 애도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는 전설도 있다. 한나라 때에는 한식절을 금연절(禁煙節)이라 하였으며, 당나라 시기에 한식의 금화(禁火) 풍습이 민간으로부터 궁중으로 전파되었다. 당, 송 시기에 들어서면서 한식과 청명은 민간에서 중요한 명절로 부상되었다. 송, 원을 거치면서 한식과 청명이 인접한 관계로 취사 금지의 풍습이 점차 청명절 행사로 합쳐졌다. 명나라와 청나라에 와서는 한식과 상사절이 거의 사라지고 청명절만 전통 명절로 인정되었다.

 

청명이 되면 기온이 따뜻하고 강우가 증가하여 봄경작에 적합한 시기가 된다. 중국에서는 청명 15일 동안을 5일씩 3후(候)로 나누어 초후(初候)에는 오동나무의 꽃이 피기 시작하고, 중후(中候)에는 들쥐 대신 종달새가 나타나며, 말후(末候)에는 무지개가 처음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청명 무렵에는 논밭의 흙을 고르는 가래질을 하면서 농사의 준비 작업으로 밭갈이가 시작된다. 이 때는 가래질 말고도 논밭둑 다지기, 보리밭 매기, 푸성귀 씨앗 뿌리기 같은 일들을 하느라 일손 구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중국에서는 “청명 전후에 곡식과 야채를 심지 않으면 한 해 농사를 망친다”는 속담이 있다.


청명이나 한식은 땅에 있는 신들이 하늘로 올라간 날이어서 특별히 택일(擇日)을 하지 않고도 산소를 돌보거나 이장(移葬)을 해도 좋다고 믿으며, 손이 없기 때문에 집 수리를 비롯해 아무 일이나 해도 좋다고 믿었다. 이러한 일들은 봄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겨우내 미루어 두었던 것들이다.

 

또한 청명은 조상과 고인을 추모하는 날이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조상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상고시대 사람이 죽으면 땅을 파고 묻고 봉분을 하지 않고 제사를 지냈으나 전국시대 오면서 봉분을 만드는 풍습이 많아졌으며, 진한시대에는 무덤을 벌초하는 풍습이 성행하였다. 당대에는 선비와 평민까지 모두 한식절 성묘를 조상을 모시는 의식으로 받아들였다. 당 조정은 관리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성묘하도록 휴가를 내주었으니, 오늘날 명절에 성묘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풍습과 유사하다.


성묘는 원래 한식절의 주요 행사였으나 점차 청명절에 귀속되었다. 당초 한식과 청명절 사이에는 구분이 있어, 한식에는 금화(禁火)하고 조상의 묘에 성묘하지만, 청명절에는 그네놀이도 하고 머리에 버들가지를 꽂고 다닌다. 한식은 저 세상 사람들의 명절이고 청명절은 이 세상 사람들의 명절인데 하나로 융합되어 구분이 없게 된 것이다. 이후 한식이 청명절과 융합되면서 성묘도 청명절에 진행하도록 하였다.


청명 성묘에는 위로는 황제로부터 아래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상을 떠난 조상을 애도하였다. 중국에서는 일년에 네 번, 즉 봄에는 청명(淸明), 여름에는 중원(中元: 음7월 15일), 가을에는 추석(秋夕), 겨울에는 동지(冬至)날에 제사를 드린다. 동짓날에는 눈길을 밟으며 조상의 산소를 찾아 뵙고 산소 위의 눈을 쓸어 내렸으며, 청명에는 잡초를 제거하고 새 흙을 채워 땅을 고르게 하였는데, 이를 소묘(掃墓)라 한다. 이 때 중국인들은 종이돈(紙錢)을 태우며 복을 기원하는데, 이를 소지(燒紙)라 하였다.


청나라에 들어 조상의 분묘에 흙을 올리고 분묘 둘레의 나무에 지전(紙錢)을 걸고, 분묘 앞에는 종이를 태우는 등 행사를 거행하였다. 분봉에 새흙을 올리고 거기에 파란싹이 움튼 나무가지 몇 개를 꺾어 꽂아놓고 절을 올리며 제를 지냈다. 종친 부락에서는 사당에 모여 조상제를 지냈으며, 마지막에 술과 차린 음식을 그 자리에서 음복하고, 남은 제물들은 종친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민국시기에도 청명 기간에 성묘를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청명을 ‘성묘의 날’이라고 불렀다.

 

청명절은 조상을 기리는 날일 뿐 아니라 답청(踏青)으로 자연을 접하며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날이기도 하다. 답청이란 화창한 봄날을 맞이하여 들놀이를 가는 것을 가리킨다. 원래 답청은 상사절의 풍습인데, 청명절과 합쳐져 거행되었다. 고대에는 탐춘(探春), 심춘(尋春)이라고도 하였으며, 봄놀이, 소풍, 춘유라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까닭에 청명절을 답청절이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중국의 저명한 화가 장택단의 <청명상하도>를 살펴보면, 송나라 청명절에 사람들이 답청을 떠나거나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번화한 정경을 볼 수 있다. 중국 고전 <백사전(白蛇傳)>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명절의 답청은 남녀가 서로 만나 사랑을 속삭이는 방식이기도 하였다.

 

청명은 춘분과 곡우 사이에 있기 때문에 겨우내 얼었던 날이 풀리고 화창하여 일년 중 식수(植樹)에 가장 적합한 날이기도 하다. 청명은 따뜻한 햇볕과 봄비로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라고 할 정도로 봄기운이 가득하고 생명력이 강한 시기이다. 따라서 고대부터 청명절에 나무를 심었다. 여러 지역에서 청명절에 버드나무를 심는 풍습이 있었으며, 버드나무 가지를 처마나 화분에 꽂기도 하였다. 민간에서는 버들가지를 악마를 쫒아내는 성물(聖物)로 간주하여 청명날에 버들가지를 꽂지 않으면 죽은 뒤에 개나 돼지로 변한다는 말도 유행하였다.


전래에 따르면 청명에 버들가지를 꽂는 풍속은 황소(黃巢)의 난(亂)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황소가 반란을 일으킬 때 어떤 여성이 조카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는 의거를 보고 부하들에게 그녀의 집 문 밖에 버들가지를 꽂아 놓아 보호하도록 지시하였다. 이후 황소의 군대가 작전을 할 때마다 백성들은 집 문 밖에 버들가지를 꽂아 난을 피하였다. 이후 백성들은 청명절이 오면 집 문 밖이나 자신의 머리에 버들가지를 꽂아 황소를 기념하였으며, 이러한 유래가 나중에 청명절의 삽류(揷柳) 풍습이 되었다고 한다.


어떤 지방에서는 버들가지를 처마 아래에 꽂아서 날씨 예보를 보기도 한다. 버들가지가 푸르면 보슬비가 있고, 버들가지가 마르면 날씨가 맑다는 것이다. 버들가지는 강한 생명력이 있어 마음먹고 심은 꽃은 피지 않고 무심코 꽂은 버들이 녹음을 이루었다는 시가 있다.(有心栽花花不開, 無心揷柳柳成蔭)


청명, 한식 경에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시집갈 때 농짝을 만들어줄 재목감으로 나무를 심었는데 이를 ‘내나무’라 불렀다. 또 연정(戀情)을 품은 아가씨가 있으면 그 아가씨의 내나무에 거름을 주는 것으로 사랑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 밖에 射柳(사류: 버드나무 활쏘기)라 하는 놀이도 성행하였다. 명나라 기록에 의하면 비둘기를 표주박에 넣어 나무에 걸고 버드나무가지로 만든 활을 쏘아 표주박을 맞추면 비둘기가 나와 날아가는데, 비둘기 날아가는 높이에 의해 승부를 가렸다고 한다. 이 밖에도 그네타기, 축국(공차기), 연날리기 등을 하며 청명절을 보냈다.

 

현대에 들어서 청명의 풍속은 크게 변화되었다. 본디 청명절에 성묘할 때에는 조상을 위해 종이로 만든 노자돈을 태우는데, 요즘은 노자돈 대신 조상님이 가지거나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종이로 만들어 태운다. 종이로 만든 최신 휴대전화와 노트북, 명품가방 등이 인기이고, 종이 별장까지 등장한다. 또한, 화장과 수목장 등 친환경 장례문화가 발전해 성묘가 필요없는 가정이 증가했으며, 고향으로 내려갈 시간이 없는 바쁜 현대인들을 위해 대리 성묘, 인터넷으로 추모하는 사이트까지 생겼다고 한다.

 

관습과 중국문화 14


김지환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s://baike.baidu.com/item/%E6%B8%85%E6%98%8E%E8%8A%82/137575?fr=aladdin

 

프린트 복사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