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12월호
생존의 조건 - 동남아 화상이 근대를 살아남는 법(上) _ 김종호
프린트 복사 페이스북

아시아의 근대는 아수라장이었다.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을 통해 형성된 우월한 물질문명을 앞세운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진출, 침략, 식민, 분열, 전쟁 등으로 18세기 이후 아시아 문명은 평온한 날이 없었다. 특히 동북아와 동남아의 경우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지라 수많은 계층의 아시아인들이 그 아수라장에서 허덕이고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200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오히려 번영을 누려온 집단이 있으니, 바로 동남아 화교상인들이다. 본 연재는 2편에 걸쳐 그 생존의 조건을 다른 아시아 상인집단과의 비교를 통해 살펴보려 한다.

 

서구의 주요 국가들이 동남아와 동북아에 걸쳐 세운 제국은 비록 식민이라는 형태를 갖추고 있었지만, 그동안 해당지역에 강력하게 형성되어 있던 정치적/지리적/경제적/관념적 경계를 해체시켜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 역시 사실이다. 내부자가 아닌 외부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던 이들이 분열하는 경우도 있었고, 서로 왕래가 없던 이질적 공동체들이 제국이라는 이름아래 통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제국의 유산은 여전히 현대 아시아의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유발하는 주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기존의 질서가 해체되고 외부자라고 할 수 있는 서구 제국에 의해 새로운 질서가 재편되는 와중에 발생한 혼란을 기회삼아 성장한 집단이 있었으니 바로 상인들이다. 새로운 문물의 유입과 경계의 해체는 초국적 무역행위에 집중한 아시아의 상인들에게 상업적 기회의 장을 제공해 주었다. 특히 서구 근대 물질문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상업제도들과 교통/통신의 비약적 발전을 통해 더욱 광범하고도 긴밀하게 연결된 초국적 시장이 형성되었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아시아의 상인들이 있었다. 바로 화교상인, 인도상인, 일본상인 등의 세 집단이 그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다른 두 상인집단(인도와 일본)의 운명을 통해 동남아 화교상인의 생존법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근대 인도상인들의 네트워크는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 일부에 걸쳐 광범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 영국 제국의 확장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18세기 중후반 남아시아에서의 지배권을 확립한 영국 제국은 18세기 말부터 동남아시아로 그 세력을 넓혔고, 19세기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에 진출하였다. 그러한 제국의 확대와 더불어 수많은 인도인들이 식민지 및 조계지의 관료, 경찰력, 군인, 용병, 노동자 등의 역할을 부여받아 버마, 말레이 반도, 해협식민지, 홍콩, 그리고 중국내 각 조계지에 강제 혹은 자발적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인도인 상인들의 진출이 두드러졌는데, 특히 영국령 말라야(British Malaya)의 경우 1844년에서 1931년 사이에만 30만 명의 인도상인들이 진출하였다. 인도인의 노동이민이 대부분 강제 계약에 따른 것(Indentured Indian labour migration)이었다면, 상인들의 경우 경제적 이익을 추구한 경우도 많았다(Spontaneous Indian traders).

 

내셔널리즘이 아닌 카스트 제도와 지역 정체성에 바탕을 둔 다양한 인도상인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초지역적 상업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예를 들어 남아시아 신드(Sind, 현재의 파키스탄 지역)지역 출신의 상인그룹은 아시아 전역에 걸쳐 국제적 금융네트워크를 형성하였고, 인도 남부 타밀(Tamil)지역 출신 상인들의 경우 말레이 반도에 진출하여 현지인과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김종호1.jpg

그림 1. 싱가포르의 체티어 대부업자 동상

싱가포르는 특히 동남아에 형성된 영국 식민제국의 중심도시로 특히 타밀출신 상인들이 많이 진출한 곳이다. 그 영향으로 싱가포르에는 꽤 많은 타밀인들이 현재까지 남아있고, 그들이 사용하는 타밀어는 영어, 중국어와 함께 싱가포르의 공용어중 하나이다. 사진은 당시 중국인과 현지인뿐 아니라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대부업(moneylender)을 하던 타밀지역 출신 체티어(Chettiar)인을 묘사한 동상이다.

       

특히 이들 인도상인들의 경우 국제적 교역 및 금융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본향과의 관계에 있어 그들만의 결제시스템을 운용하였는데, 흔히 훈디(Hundi)시스템을 활용하였다. 원래 훈디는 일종의 태환영수증(Bill of exchange)을 가리키는 말로써 인도 내부 지역간 상거래에 쓰이던 결제시스템이다. 광대한 영토에 다양한 결제화폐를 운용하고 있던 지역간 이질성을 해소하기 위해, 혹은 대량의 은루피를 운용해야 하는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은행에서 발행하는 태환영수증인 훈디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그 시스템이 인도상인들의 아시아 진출과 맞물려 인도인들간의 초지역적 결제시스템에 적용된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인도인들의 초지역적 상업네트워크와 그 결제시스템의 적용이 철저히 영국제국의 아시아 지역으로의 확장과 연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영국제국과 인도상인의 관계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관계라고 할 수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영국제국의 피식민지인이라는 신분 덕분에 인도상인들은 국제적 상업네트워크를 비교적 쉽게 형성할 수 있었고, 영국제국민으로써 상업영역에서의 각종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적은 수로 광범한 아시아의 제국을 운영해야 했던 영국 식민당국의 필요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이 시기 제국민이라는 신분은 한편으로는 식민의 산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제국민들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가져다주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조계지에서의 치외법권이 있다. 실제로 청일전쟁 이후 대만을 할양받은 일본제국이 대만성의 지역민들에게 일본의 제국민이 될 것인지, 청의 신민으로써 떠날 것인지 결정하라고 공표했을 때 수많은 복건의 상인들이 앞 다투어 제국민이라는 지위를 획득하려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특히 상업적 이익을 좇아 자발적으로 본향을 떠난 인도 상인들의 경우 영국 제국의 정치적 강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을뿐 아니라 근대시기 세계 패권을 거머쥔 영국제국의 영향력 역시 활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도 했다. 온갖 학살과 배제를 겪으며 갖은 고생을 거쳐 해외에 뿌리내린 화상들과 비교해 보면, 그 특징은 더욱 두드러진다.

 

한편 일본 상인들의 아시아에서의 상업 활동은 국가단위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메이지 유신이후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제국의 아시아 진출은 일본상인들의 진출과 함께 이루어졌고, 해외에 진출한 일본상인들은 때로는 본국의 제국적 진출의 첨병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흥미롭게도 유럽 제국의 아시아 진출이 처음 동인도 회사와 같은 상인들에 의해 먼저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아시아의 유일한 근대제국으로서 일본의 영향력이 아시아 전체로 확대될수록 일본상인들의 영역 역시 확대되었고, 그에 따라 상업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다만 다른 아시아 상인들에 비해 후발주자였던 일본상인들의 경우 특히 화교상인들과 동남아 및 동북아 곳곳에서 조우하게 되는데, 그들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는 관계였다. 나오토 카고타니(籠谷直人)의 연구에 따르면 19세기말, 20세기 초 일본상인들이 아시아의 역내무역에 적극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화상들의 네트워크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시기까지만 해도 화상들의 상업네트워크가 압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는 1920-30년대가 되면 역전된다. 대만식민지에서 재배한 차와 동남아에서 생산한 고무제품을 앞세운 일본 상인들이 화상들의 앞마당이었던 동남아 시장에서의 경쟁에서 앞서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다급했던 화상들이 당시 중국대륙 및 동남아 화교들에게 널리 퍼지기 시작한 반일 국화(國貨)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민족성 및 애국심에 기반한 마케팅을 펼쳤을 정도였다. 게다가 일본상인들의 경우 당시 일본의 아시아 식민지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느라 아시아 전역에 걸쳐 형성되어 있던 요코하마정금은행과 대만은행의 금융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중국 및 동남아에서의 상업활동에는 요코하마정금은행의 네트워크를 통한 결제시스템의 활용이 필수적이었다.


 

김종호2.jpg

그림 2. 싱가포르에 위치한 동남아 최대의 일본인 묘지공원

싱가포르에는 동남아 최대 규모의 일본인 묘지공원이 있다. 1891년 영국 식민당국의 허가 아래 당시 싱가포르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상인들과 매춘부들을 위해 지어졌다. 8,500평 규모의 부지는 당시 고무농장을 소유하고 있던 세 명의 일본상인들이 제공해 준 것이다. 묘지공원에는 대부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싱가포르 거주 일본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일본인 매춘부들과 1차 세계대전 이후 1920-30년대에 급증한 일본상인들이 묻혀있다고 한다.

 

피식민인으로서 인도상인들은 대영제국의 제국민이라는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활용하여 아시아에서 그 상업적 영역을 확장하였고, 일본상인들의 경우 본국의 제국적 인프라를 적극 활용하면서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였다. 두 상인집단 모두 근대시기 제국이라는 초국적/초지역적 정치체제의 보호아래 비교적 쉽게 아시아 시장에서 나름의 영역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두 그룹은 때로는 화상들과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21세기 현재까지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 깊게 뿌리내려 아시아의 유대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화상들이 유일하다. 화상들은 어떻게 인도상인들과 일본 상인들이 모두 물러난 근대 이후의 아시아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었을까? (편에서 계속)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9】


김종호 _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프린트 복사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