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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9월호
동남아 화교화인, 국가를 세우다 - 다인종 국민국가 싱가포르의 탄생 _ 김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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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대학의 젊은 경제학 교수인 레이첼 추는 캘리포니아에서 홀어머니 아래 자란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여성이다. 그녀에게는 같은 대학 교수인 닉 영이라는 남자친구가 있다. 어느 날 남자친구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자신의 가족들이 있는 싱가포르로 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결혼식도 하자고 제안한다. 닉을 너무나 사랑한 레이첼은 흔쾌히 오케이하고 함께 싱가포르로 건너가게 된다. 그녀의 남자친구가 아시아 십 위안에 드는 부자가문인데다 통제가 심한 남자친구의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워너 브라더스에서 제작하고, 할리우드의 유명한 아시아계 코미디언인 존 추가 감독을 맡은 ‘Crazy Rich Asians’에 대한 소개이다. 이 영화는 전체 출연진이 아시아계라는 점과 8월 15일 개봉 이후 첫 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사실로 인해 현재 동남아시아와 미국의 아시아인들, 특히 화교화인들에게 핫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영화는 레이첼과 닉이라는 (중국계이지만)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남녀가 싱가포르에서 엄청나게 부자인 남자친구측 가족들을 만나면서 겪는 소동을 코믹하게 다룬 로맨틱 코미디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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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이 영화에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홍콩배우인 양자경이 통제가 심한 닉의 어머니로 출연한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해당 영화가 미국에서는 마블의 ‘블랙팬서’와 함께 다양성 영화의 상징처럼, 혹은 쾌거로 여겨지는 반면에, 동남아시아, 특히 싱가포르인들에게는 다양성을 무시한 영화로 비판받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것이, 싱가포르가 주무대인 해당 영화에는 제목이 무색하게도 중국계 배우들만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까메오처럼 등장하는 말레이계 배우의 역할이 집안일을 돌봐주는 서번트라는 사실로 인해 싱가포르에 거주하고 있는 남아시아계, 말레이계 싱가포르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중국계 싱가포르인들 역시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이 이 인종과 문화가 다른 싱가포르인들을 화나게 만들었는가? 그 해답의 실마리는 싱가포르라는 국가의 건국과정에 있다. 


1949년 국공내전이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싱가포르의 화교화인 공동체와 대륙 사이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국공내전 이전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영국이 말레이시아 반도 및 싱가포르를 재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미 ‘제국민’이라는 지위가 주는 정치・경제적 이점이 사라진 시점에서 영국은 일본의 식민지배 이후 말레이시아 혹은 싱가포르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구’식민지 피지배인들의 극렬한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관행중국 연재 6월분 참조). 결국 1955년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부분적 자치권을 획득하여 그들만의 정부를 구성하였다. 싱가포르 역시 말레이시아의 일부였지만, 정치적 자립권을 획득하여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를 치루기도 했다. 그리고 자체적인 정부 및 국가를 설립하기 위한 경제적 구상의 일환으로 실시된 것이 바로 해외교역의 재개였는데, 1956년 8월 9일 싱가포르의 상공업부(Ministry of Commerce and Industry)는 동남아시아 각국과의 교역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국제시장에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문제는 바로 중국과의 교역재개였다. 1951년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인해 연합국의 일원이던 영국은 말레이시아로부터 북한으로 향하는 고무의 수출을 금지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싱가포르의 화교화인공동체가 중국과의 혈연・지연적 관계를 바탕으로 무역을 재개할 경우, 영국정부 및 말레이시아 정부와의 정치적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마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56년 자치정부 싱가포르의 무역재개와 함께 중국과의 교역 역시 고려되기 시작하였고, 싱가포르 화교화인공동체가 설립한 주요단체였던 싱가포르 중화총상회(SCCC, Singapore Chinese Chamber of Commerce)에서는 지도부들이 중국 대륙으로 무역협상을 위해 건너가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중국공산당 정부로부터의 끊임없는 구애가 있었는데, 농촌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는 도시의 재건과 상공업의 진흥을 위해 외부로부터의 투자 및 경제 분야에서의 노하우가 절실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무역협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중국공산당의 무리한 요구와 고압적인 태도에 대한 실망, 그리고 중화총상회 지도부들의 예상보다 너무나 광범하게 파괴되어 버린 대륙의 실상 등이 겹쳐져 협상은 실패로 끝난다. 게다가 함께 파견된 데이빗 마셜(David S. Marshall, 1955-1956년까지 싱가포르 자치정부의 전 총리를 역임)이 1955년 반둥회의에서 중국 공산당이 천명한 해외 중국인의 이중국적 금지조항을 삭제하기 위해 벌인 협상 역시 무위로 돌아가 버린 점도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싱가포르의 화교화인공동체는 영국의 ‘제국민’이라는 식민지적 지위도, 중국 대륙의 신민이라는 정치적 지위도 잃어버리게 됨으로서 싱가포르 내에서 그들만의 독립된 공동체를 형성하며 거주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에 놓이게 된 것이다. 
 

1959년 정식 독립한 말레이시아 연방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여 자치정부를 성립한 싱가포르는 또 다시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보통선거(General Election)를 실시하였다. 이 선거에서 리콴유(Lee Kwan Yew)가 이끄는 인민행동당(PAP People’s Action Party)이 승리를 거두어 의회정부를 수립하였다. 1954년 설립된 인민행동당은 영국으로부터의 식민상태를 끝내고 말레이 연방과 싱가포르 자치정부로 구성된 국민국가 말레이시아의 탄생을 목표로 설립된 정당이다. 대부분 무역업자, 교육자, 변호사, 언론인 등의 엘리트들로 구성되었고, 창당 멤버들 대부분이 영국에서 유학한 유학파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콴유 역시 싱가포르 중산계층의 화교 가정에서 태어나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한 변호사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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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인민행동당 로고아래 리콴유를 비롯한 지도부들


선거에서 승리한 인민행동당이 중국인이라는 정체성보다는 말레이시아 로컬 커뮤니티의 일원으로서 국민국가를 형성하려 했던 것과는 달리 싱가포르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중국인들 대다수는 싱가포르를 중국인들만의 공동체로 형성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난따(NanTah 南大)운동’이다. 싱가포르의 화교화인공동체 내부에서는 일찍부터 중국어와 중국의 문화 및 가치를 교육할 수 있는 고등 교육기관의 설립이 논의되고 있었는데,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면서 이러한 논의는 더욱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일환으로 1958년 설립된 것이 난양대학(Nanyang University 南洋大學)이다. 중국 중심적인 관점을 함의하고 있는 ‘난양’이라는 단어에서 보듯이 이 대학은 중국인 커뮤니티 내부의 고등교육을 위한 기관으로서 모든 수업을 중국어로, 커리큘럼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한 대학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화교화인 공동체의 움직임을 다른 구성원들이었던 말레이인이나 인도인들이 찬성할 리가 없었다. 결국 1959년부터 1964년 폭동의 위기까지 인종적 갈등은 극에 달하였는데, 리콴유를 비롯한 인민행동당은 끝까지 중국인, 말레이인, 인도인들이 함께 공동체를 구성하는 자치정부의 설립을 고수하였다. 그 일환으로 1965년 말레이 연방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이후 리콴유가 취한 정치적 액션이 바로 로컬 말레이인이자 언론인인 위소프 빈 이샥(Yusof Bin Ishak)을 영입하여 대통령(President)으로 추대하고, 스스로 총리(Prime Minister)가 된 것이었다. 위소프 빈 이샥은 말레이시아 근대사에 있어서 입지전적인 언론인으로서 Utusan Melayu(현재 Utusan Malaysia의 전신. 현재까지도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높은 신문)라는 신문을 제작, 배포하여 말레이시아 독립투쟁, 민중계몽, 말레이 연방성립 등에 ‘펜’으로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영국에 의한 식민통치, 말레이시아 독립을 위한 투쟁, 말레이 연방의 결성이라는 아수라장을 거치면서 말레이인이라면 누구나 존경할 만한 삶의 궤적을 보여준 대표적 지식인이었는데, 그 특유의 민주적 사고방식 때문에 당시 술탄에 의한 영향력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던 말레이 연방 내부 정치권력 다툼의 희생양으로 신문에 대한 지분을 모두 내놓고 축출되는 아픔을 겪었다. 야인으로 돌아간 그를 영입한 이가 리콴유였다. 이때가 바로 인종갈등이 시작되던 1959년이다. 
 

리콴유가 이끄는 인민행동당을 중심으로 하는 싱가포르가 도시국가로서 말레이 연방으로부터 독립한 것이 자의적 독립인지, 타의적 독립인지를 두고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다만 독립직후 무슬림으로서 로컬 말레이인종인 위소프 빈 이샥을 대통령으로 영입한 것은 그가 거쳐 온 정치행보와 더불어 ‘싱가포르가 추구하는 체제는 인종적・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조화롭게 사는 데에 있는 것’이라는 국가비전을 제공해 주기 위함이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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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이러한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현재 싱가포르에서 쓰이고 있는 모든 종류의 지폐에 그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로부터도 잘 알 수 있다. 의원내각제하에서 모든 실권은 총리인 리콴유가 가지고 있지만, 대통령으로서 그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는 현재 싱가포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국어를 말레이어, 공용어를 영어, 중국어, 타밀어(인도의 방언 중 하나)로 제정한 것, 1980년 남양대학을 싱가포르 대학(University of Singapore)과 합병하여 설립한 싱가포르 국립대학(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을 통해 영어식 교육을 강조한 것 역시 인구 구성상 다수를 점하는 중국인(70-80%)에 의한 독주를 경계한 움직임 중의 하나다. 그리고 이는 다인종・다문화 도시국가로서 사회 공동체 내부의 조화로운 결속을 꾀한 것임과 동시에 중국 대륙과의 연계가 끊어진 상황에서 동남아시아라는 지역공동체에서 생존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ASEAN의 주요 제창자 가운데 하나가 싱가포르라는 점은 이를 잘 뒷받침해준다. 또한 정치, 경제, 교육 분야에서의 공식 언어를 영어로 채택한 것 역시 공동체 내부의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무역과 금융 허브로서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싱가포르 건국의 역사적 궤적은 화교화인연구에 있어서 매우 흥미로운 사례임이 분명하다. 국공내전직전까지 싱가포르의 화교화인공동체는 대부분 고향과의 사회・문화적 결속이든, 대륙 정부와의 정치적 결속이든 중국 대륙이 ‘본국’(home country)이라는 인식아래 강한 결속을 유지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중화인’으로 규정지어 왔다. 그러나 국공내전이후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싱가포르의 화교화인들은 급속히 대륙으로부터 분리된 정체성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반둥회의에서 중국이 천명한 이중국적 금지조항의 영향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백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삶을 영위해온 싱가포르를 떠나 공산화된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기에는 그들의 정체성과 실질적 기반이 이미 싱가포르라는 도시에 강하게 천착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중국 대륙을 배후지로 둔 홍콩과는 달리 동남아시아라는 이질적인 공동체를 배후지로 둔 싱가포르의 화교화인들은 중국인이라는 정체성보다는 국민국가라는 공동체를 형성하여 이민족들과 공존하는 길을 선택한다.


이렇듯 다인종 국민국가라는 정체성은 싱가포르라는 국가의 근간이자, 생존을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일개 영화에 지나지 않는 ‘Crazy Rich Asians’에 싱가포르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6


김종호 _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필자 링크 제공)
사진-1 Crazy Rich Asians 영화 포스터
https://www.pinterest.co.kr/pin/131026670394604159/

사진-2 PAP & 리콴유
https://www.pinterest.co.kr/pin/410179478557093421/

사진-3 싱가포르 지폐
https://realguidebook.com/singapore-mo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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