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8월호
동남아 하이브리드 문화의 숨은 보석 - '하이난 퀴진' _ 김종호
프린트 복사 페이스북

싱가포르 인구의 80%는 중국계이고, 그 대부분이 복건(福建 Hokkien), 광동(廣東 Cantonese), 광동 조주(潮州 TeoChew), 해남(海南 Hainanese), 객가(客家 Hakka) 등의 출신지역에 따라 크게 구분된다. 그리고 이러한 분류는 동남아시아 각 지역에 퍼져있는 화교인구를 분류할 때에도 유효하게 적용되는 기준이다. 크게 보면, 인도차이나 반도를 중심으로 내륙지방에는 주로 광동 혹은 조주 지역 출신 화교들이 주류이고,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리핀, 브루나이 등 도서지역의 경우에는 복건, 특히 복건 남부지역 출신의 화교들이 꽉 잡고 있었다. 1800년대 초 혹은 영국의 스탬포드 래플스가 싱가포르를 발견하기 전부터 그러한 경향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 복건 남부지역 출신 화교들을 통틀어 그 지역 방언에 따라 호키엔(Hokkien)이라고 지칭한다. 싱가포르의 경우 호키엔 그룹이 명백히 주류였고, 지금도 주류다. 하카(객가 Hakka)는 퍼져있는 성향이 강하고, 하이난들(해남 Hainanese)은 그 세()가 다른 출신들에 비해 그리 강하지는 않다. 후술하겠지만, 대신 그들의 강점은 그 음식문화에 있다.

 

이렇게 나뉜 지역 간의 차이를 마치 우리의 경상도, 전라도간 차이 정도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일단 사용하는 언어가 서로 달랐다. 호키엔들이 쓰는 민남어, 캔터니즈(광동 Cantonese)출신들이 쓰는 광동어, 객가어, 조주어 등등의 방언들은 말만 방언이지 그냥 다른 언어이다. 무려 20세기 중후반 무렵 지금의 중국 표준어, 보통화가 싱가포르에 도입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글로 소통하였고, 심지어 같은 중국인임에도 중간에 통역을 두고 대화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음식문화 역시 상당부분 다른지라 지금도 호커센터(Hawker Centre)나 푸드코트에 가보면 각 지역별 코너가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복건식 새우탕면, 조주식 볶음면(퀘이 떼오우Kway Teow)이라고 하는 식이다.


 


           [사진-1] 동남아 화교화인들의 대표적 향토음식이라 할 수 있는 복건식 새우탕면과 조주식 볶음면.

 

로컬 교회에 가보면 예배를 세 번씩 드리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 아침에는 영어로, 낮에는 중국 표준어(華語), 오후에는 호키엔(이 단어는 그 그룹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그룹이 쓰는 언어를 지칭하기도 함), 혹은 광동어로 예배를 드린다. 여전히 각 지역 방언이 많이 쓰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규 교육을 받은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은 공식적으로 영어를 사용하고, 친구들과 중국 보통화 혹은 방언을 사용하며, 부모 및 조부모와는 방언을 사용하는 등 총 세 가지 이상의 언어는 기본으로 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물론 세 개의 언어를 한 번에 익히는 만큼 성장과정에서 한 가지 언어만 줄곧 익히는 보통의 국가들에 비해 해당 구성원의 어휘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꾸준히 있어 왔다는 점, 그리고 중국어는 할 줄 알아도 정작 한자는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라는 점 등은 지금도 싱가포르 사회에서 꾸준히 지적되어 오고 있다. 게다가 요즘은 그 특유의 지역색이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점점 옅어지고 있는 추세라, 여러 뜻있는 학자 및 민간인들은 그 지역 정체성의 유지를 위해 힘쓰고 있다고 한다.

 

사실 복건, 광동, 객가 출신의 이민자 그룹은 그 이민의 역사가 길고, 인구 역시 많아서 싱가포르의 알짜배기 직종들, 즉 금융, 무역, 대농장 경영, 광산 경영, 인력거 사업 등등에 진출하여 그 분야를 일찌감치 장악해온 것에 비해,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하이난들의 경우 비교적 돈이 되는 직종을 구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시기까지만 해도 하이난들의 존재감은 다른 지역 이민자 그룹에 비해 옅었던 것 역시 사실이다. 다만, 이들 하이난들이 독보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영역이 있었으니 바로 싱가포르의 음식문화이다. 하이난들을 빼고는 싱가포르의 음식문화를 얘기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다른 이민자 그룹이 장악해 놓은 영역에 발을 들일 수 없었던 하이난들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싱가포르의 3D 업종에 종사하기 시작한다. 고무 농장의 고무 수액 채취자(rubber-tapper), 선원(seamen), 요리사(cooks), 점원, 하인(domestic servant) 등등이 그들의 주요 진출 업종이었다. 하늘도 무심하신 건지 무심치 않으셨던 건지 모르겠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이들 하이난들은 이 중 요리사와 하인으로서 그 뛰어난 재능을 드러내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특히 20세기 초중반에 걸쳐 부유한 유럽인들 및 화교들의 저택, 관공서, 군부대 등지에서 “houseboys” “cookboys”로 고용되어 영국의 식민지이자 동남아시아의 무역금융 허브였던 싱가포르 지도층의 생활방식, 음식문화 등을 배우고 익히며 성장하였다. 하이난들 중 이 직종에 숙련된 이들은 훌륭한 집사 및 요리사로 활발히 활동했다고 한다. 이렇게 숙련된 하이난들은 1920-30년대가 되면 고관대작의 저택을 벗어나 다양한 직종에서 그들의 재능을 펼치게 되는데, 바로 요리 실력과 서비스 정신을 동시에 발휘할 수 있는 싱가포르의 요식업계였다. 그들이 유럽인들에게 고용되어 익혔던 세련된 서비스 및 레스토랑 관리 기술은 점점 서구화되어 가고 있던 요식업계에 싱가포르인들의 입맛과 트렌드가 서서히 반영되고 있던 경향과 딱 들어맞는 것이었고, 스스로 식당, 빵집, 푸드코트를 창업하거나 혹은 호텔, 서구식 레스토랑, 카페 등에 요리사 및 웨이터로 취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1920년대에서 50년대 사이에 특히 이들 하이난들의 요식업 진출이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대표적인 경우가 유명한 커피 토스트 체인인 킬리니 꼬삐띠암(Killiney kopitiam)과 야쿤 카야(Ya Kun) 토스트다. 킬리니는 해남출신 이민자가 1919년에 킬리니 로드에 세운 가게가 그 출발점이었고, 야쿤 토스트 체인을 창업한 해남출신 이민자 로이 아 쿤(Loi Ah Koon)의 경우 192615세에 싱가포르로 건너와 같은 출신의 화교가 운영하는 커피숍에서 보조로 일을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야쿤 토스트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즉 이 시기는 하이난들이 싱가포르의 요식업계에서 그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해준 중요한 시기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들이 요식업계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바로 스스로 개발한 메뉴에 있었다고 한다. 특히 유럽인들의 저택 및 군부대에서 집사, 하인, 요리보조, 요리사로 근무하면서 익힌 서구의 음식문화를 그들 섬 지역 특유의 해양성이 가미된 음식문화와 적절히 접목시켜 메뉴를 개발하였고, 이것이 점차 서구화되어 가던 싱가포르인들의 입맛을 취향 저격해 버렸던 것이다.

 

킬리니 꼬삐띠암, 야쿤 토스트, (Wang)카페 등에서 판매하는 대표적인 조식 및 브런치 메뉴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잘 우려낸 커피 혹은 홍차와 함께 나오는 카야 토스트 및 프렌치토스트, 그리고 반숙 계란에 곁들인 간장의 조합은 원조 격인 영국식 블랙퍼스트를 하이난들의 감각으로 변용한 대표적인 메뉴라고 할 수 있다. 싱가포르를 여행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봤을 필수 조식 혹은 브런치 메뉴다. 그 외에 싱가포르의 시그니쳐 메뉴인 치킨라이스, 치킨커리, 비프누들 등등이 모두 하이난들의 작품이다. 또 하이난들의 커피 우려내는 솜씨 또한 기가 막혔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열대 특유의 무더운 날씨를 자랑하는 싱가포르를 헤매는 여행객들의 든든한 친구인 한스(Han's)레스토랑 카페와 로컬 싱가포르인들이 즐겨 찾는 중저가 스테이크 하우스인 잭스 플레이스(Jack’s place) 역시 이 시기 해남인 ‘cookboys’들의 후손들이 창업한 요식업 체인이다(한스 카페의 경우 Han씨 패밀리들이 창업한 것). 무엇보다도 싱가포르의 대표 칵테일인 싱가포르 슬링(Singapore Sling)1910년에서 1915년 사이에 래플스 호텔 롱바(Raffle’s Hotel Long Bar)의 하이난 바텐더 니암 통 분(Ngiam Tong Boon)에 의해 개발되었고, 1970년대에 그의 조카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개량되었다는 사실은 이 당시 하이난들이 얼마나 다양한 요식업분야에 진출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림-2] 싱가포르 하이난 퀴진의 대표적 메뉴들. 치킨라이스, 치킨커리, 싱가포르 슬링, 카야 토스트 세트(카야 토스트, 밀크티, 반숙계란) .

 

서구의 식민문화와 중국, 말레이, 인도인들의 아시아 문화가 혼종한 채로 200여 년을 영위해 온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하이브리드 도시국가다. 외국인으로서 싱가포르를 여행하고 있거나, 해봤거나, 혹은 거주하고 있거나 거주해봤던 이들은 싱가포르의 다양한 모습들로부터 그 사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소수공동체이지만, 하이난 이민자들 특유의 하이브리드한 경험과 감각을 통해 형성된 싱가포르의 '하이난 퀴진'이야말로 그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싶다.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5

 

김종호 _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 이미지 출처

복건식 새우탕면과 조주식 볶음면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rawn_and_noodle_soup.jpg  

치킨라이스

http://www.visitsingapore.com/dining-drinks-singapore/local-dishes/hainanese-chicken-rice/  

카야 토스트 세트

https://www.pinterest.co.kr/pin/228768856041247257/?lp=true 

싱가포르 슬링, 치킨커리

https://mothership.sg/2017/01/5-things-that-make-being-a-hainanese-in-singapore-uniquely-awesome/


프린트 복사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