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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7월호
수저우에서 신장의 엿장수에게 걸리다 _ 유장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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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생활하였을 때를 종종 생각해본다. 여러 가지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지만, 그 중에서도 ‘아싸! 바가지’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자주 떠오른다. 주로 중국 상인들에게 바가지를 썼거나 쓸 뻔 했던 정경들이다. ‘아싸!....’는 작은 애가 우리들에게 붙여준 별칭이기도 하다. 한국의 중년 부부가 여행 차림으로 길을 나섰을 때, 중국 상인이 이를 보고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이, ‘아, 바가지 대상이구나’라고 한다는 것이다. 차림새나, 연령이나, 하는 행동이 모두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수저우(蘇州)에 갔을 때 위구르 출신 엿장수에게 ‘당할 뻔한’ 이야기도 전형적인 ‘아싸 바가지’의 한 예에 속한다. 수저우에는 고양이 자수 액자를 수리하기 위해 여러 차례 갔었다. 또 상하이에서 가까워서 가기도 쉬운 데다, 볼거리도 많은 편이다. 3.8부녀절에는 아파트 부녀회에서 주관하여 운하 중심으로 수저우를 관광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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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경항대운하가 지나가는 수저우. 시내 곳곳에 무지개 돌다리와 수로가 거미줄처럼 엉켜있는 곳이 수저우다.

 

좌우간 바로 붙어있는 수저우 버스 터미널과 수저우역 부근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장사꾼, 탈 것들로 북적인다. 각종 지도를 든 행상과 여행손님을 끌려는 가이드들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지도나 안내 팸플릿을 코밑에 바짝 들이민다. 터미널을 빠져나오면, 네 바퀴 택시뿐만 아니라 세발 택시, 세발 인력거, 오토바이 등이 서로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들 뿐이 아니다. 구두닦이 아줌마들은 광장에 일렬로 죽 앉아서 손짓을 하고 있으며, 터미널 내에서는 아이와 노인 거지들이 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정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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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수저우 시외버스 터미널 부근의 시내버스 정거장. 관광지답게 정거장시설도 수저우 정원 양식으로 꾸몄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위구르 출신 엿장수들은 주로 터미널 뒤쪽, 그러니까 시내버스 승강장 길가에 몇 미터 간격으로 죽 늘어서 있다. 특징적인 것은 모두 리어카에 엿판을 싣고 있으며, 복장도 역시 그들의 풍속에 따라 흰색 두건과 푸른 빛깔의 옷을 입고 있다. 그렇게 차리고 있지 않아도 용모부터 눈에 띤다. 다만, 표정은 굳어있다.


우리는 그들보다는 엿판에 관심이 더 많았다. 시내버스를 타고 내릴 때마다 온갖 견과류를 넣어 만든 신장엿이 유달리 맛있어 보였던 것이다. 마산에서도 울릉도 호박엿이니 깨엿 혹은 땅콩엿을 즐겨 사먹었으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저, 중국엿을 한번 먹어야지...’ 우리는 그렇게 다짐하며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항상 시간에 쫓기는 데다, 그들의 긴장된 눈빛과 위생상태 등을 생각하면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마침내 12월의 어느 날, 엿을 사먹기 위해 돈을 빼어들었다. 고양이 자수품을 고쳐 가지고 쩐후(鎭湖)에 다녀오던 날이었다. 아마 앞으로 이곳에 오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나보다 아내가 더 조바심을 쳤다.


젊지만 표정이 조금 어두운 엿장수에게 다가갔다. 거래를 위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데 금방 어려움이 생겼다. 그 친구의 중국어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손가락으로 의사표시를 하는 것이다. 나 역시 그 애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중국어는 익숙하지 못하다. 한 뼘 정도 두껍고 책상의 반만큼이나 넓게 펼쳐진 엿판 중에서, 1센티 정도의 두께로 손바닥만큼의 넓이만 떼어 달라는 것으로 낙착을 보았다. 가격은 10콰이, 당시 한국 돈으로는 1,200원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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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노상에서 파는 신장견과엿. 사진에서 보듯이 커다란 칼을 이용해 엿판에 놓인 엿을 구매자가 원하는 크기로 잘라 판다.


그런데, 이 친구가 엿칼과 망치를 이용해 엿을 떼어내는데, 엿이 쪼개질수록 두꺼워지는 것이었다. 떼어내고 보니 위쪽의 두께는 1센티도 안되는데, 아래쪽의 두께는 거의 5센티가 넘는 듯이 보였다. 마치 도끼날 같았다. 그걸 저울에 올려놓고는 계산을 하는데, 무려 200위안을 내라는 것이었다. 세상에나!!! 2만원이 넘는 엿이 있다니.....


거래가 아닌 싸움이 시작되었다. 중국 사람과 절대 싸우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살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바가지도 유분수지... 이 놈이 도대체 우리를 뭘로 보는 거야. 2백위안이 무슨 동네 개 이름인줄 아나. 아니 개도 이 정도로 비싸진 않을 거다.’ 나는 처음에 계약한 10위안을 주면서 이것만 받고 엿을 달라고 말한다. 그는 10위안을 얼른 챙기면서도 손가락 2개를 펼쳐들고 돈을 다 내라는 것이었다.


언성이 높아지고 실랑이가 길어지자, 주위에 있던 위구르 엿장수 예닐곱 명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위기를 느꼈다. 이들을 모두 맞상대하기에는 너무나 불리한 것이다. 더구나 이놈들이 호신용 칼을 차고 다닐지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양자를 떼어 놓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큰 소리를 친다. ‘너희들은 우리 문제에 끼어들지 말라. 니덜 엿이나 팔아라.’ 이 말에 신장인들이 잠시 주춤하면서 한 발 뒤로 물러섰지만, 그러면서도 젊은 동료에게 훈수를 둔다.


아내가 곧바로 나의 응원부대로 나선다. ‘경찰을 부르겠다.’(이럴 땐 나보다 순발력이 훨씬 좋다.) 젊은 엿장수나 위구르 동료들도 이 말에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한족과의 싸움에는 경찰이 도움을 주지 않지만, 소수민족과 외국인이 한판 엉킬 때에는 외국인 편을 든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것이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는 젊은 녀석에게 을러댔다. ‘좋다, 지금 바로 경찰에 가자.’

 

젊은 엿장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조금 움찔했지만, 떼어 놓은 엿과 나와 주위 동료를 번갈아 둘러보면서, 일생에 한번 올까 말까한 ‘바가지’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듯 내 팔소매를 꽉 움켜쥔다. 조금 물러서 있던 동료들은 100위안 정도 받고 끝내라는 식으로 훈수를 둔다. 나는 그래도 참을 수 없다. ‘미친놈들, 만원이 넘는 엿이 어디 있어. 금을 박은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와 실랑이를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주위는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30위안을 제시했다. 그렇지 않으면 경찰서에 가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최후 통첩식으로 말했다. 아내도 목청을 돋우며, 곧 경찰을 부르러 갈 태세로 그를 몰아붙였다. 이 말이 드디어 효과를 보기 시작하였다. 그 젊은이는 마침내 자기는 그곳에 가면 맞는다는 뜻으로, 자기 손으로 연속적으로 뺨 때리는 동작을 취했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나이든 한 동료가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그에게 잡혀 있던 내 팔소매를 떼어내고, 그의 손에 들려있던 10위안까지 뺏어 내게 건네주며, 빨리 가라고 손짓한다. 자신들 전체가 경찰한테 걸려 혼쭐이 날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거래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걸음아 날 살려라’하는 심정으로 버스터미널 쪽으로 발걸음을 재게 옮겼다.


신장 지방에는 호두와 같은 견과류뿐만 아니라 석류, 포도, 하미과 따위의 과일이 많이 나는 곳이라서 그 재료를 써서 만든 엿이 유명하다는 사실을 뒤에서야 알았다. 말하자면 위구르인들은 여러 명이 그곳의 특산품을 들고 수저우까지 와서 노점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가지부터 씌우는 판매방식으로는 엿을 제대로 팔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길거리 엿장수들처럼 조금씩 떼어놓고 포장해서 파는 방식이 더 유익할 수도 있었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니, 이런 종류의 신장엿은 신장절갱(切羹)으로 중국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상품이었다. 또한 자신들이야 안전 때문에 그랬을 테지만, 그처럼 동업자들끼리 촘촘히 몰려 있는 것도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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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곱게 포장하거나 알맞게 잘라서 파는 신장절갱. 견과류가 풍부해서 인기가 많다고 한다.

 


외견상 표나는 신장인들이 허름한 차림으로 한족들의 본향이나 마찬가지인 수저우 땅에서 엿 파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하지만, 해도 너무한 엿장수들이었다. 우리도 외국의 풍미를 맛보기 위해서 어느 정도 바가지를 쓸 각오가 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여하튼 못 먹어 본 그 신장엿이 가끔 그립다.

 

현장에서 마주친 관행 15

   

유장근 _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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