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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7월호
까다로운 이의 국경 넘기 _ 공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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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중순, 파미르 고원을 넘어 키르기즈스탄에서 카쉬가르로 가던 날, 하늘은 벅찰 정도로 짙푸르러 까닭 없는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파미르는 6월 중순에야 봄이 온다. 한 번도 다 녹아본 적이 없는 얼음 덩어리들을 넘어 예전처럼 이르케쉬탐 국경에 도착했다. 양쪽 국경은 흔한 것들을 대략 공유했다. 길을 가린 철조망, 닫힌 철문, 긴 기다림, 군복과 총 따위. 다른 것도 많았다. 녹이 쓸다 못해 주변의 황토와 비슷해진 키르기즈 쪽 철조망과 언제나 반짝반짝 윤이 나는 데다 몇 겹인 중국 측의 철조망. 여행객을 압도하는 숫자의 중국 측 군사 및 행정 요원들과 찾아보아야 보이는 반대편. 검색대를 비롯한 시설의 차이는 물론 근무에 임하는 진지함 또한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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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개는 넘으면 물이 동쪽으로 흐른다- 아름다운 카쉬가르 오아시스로

 

이번에 보니 중국 측의 휴대폰 검사 기준이 바뀐 듯하다. 어딘가로 가져가서 전체를 스캔 하는 듯하지만 나는 상관없다. 그리고 안면 인식기가 더 정교해진 듯하다(물론 키르키즈 측에는 그런 것이 없다). 수염이 자란 내 얼굴과 여권 사진의 인물을 다른 이로 인식한다. 왜 아니겠는가, 사람은 나이가 드는데. 기계가 동일인으로 인식할 때까지 원근과 각도를 달리하며 얼굴을 들이민다. 어느 순간 기계는 사진 속의 인물과 현재의 내가 같은 이임을 인정하지만, 기계 사이의 대화는 없는 듯하다. 입경 도장을 받으려면 똑 같은 과정을 두 번 더 반복해야 한다.

 

이르케쉬탐 국경에서 내지 쪽으로 146km 안에 위치한 울룩차트에서 입경 도장을 찍어준다. 철문 앞의 기다림 따위는 익숙하다. 하지만 국경 두께 146km, 웬만한 나라 너비의 거대 국경이다. 그 지대 안에서 나는 차에서 내려서는 안 된다. 공무원도 아닌 운전사가 공도통행증(孔道通行證)을 가지고 내 여권을 점유하는 것도 이미 익숙하다. 나를 믿지 못하면서 그 운전사는 어떻게 믿는지 궁금하긴 하다. 하지만 중국의 공무원들은 근대국가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규정에 그렇게 쓰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르케쉬탐 국경의 입경 담당자들에게 한 마디 던질 수밖에 없었다.

 

입경 도장도 찍지 못하는 당신들은 왜 여기 있는가?”

당국의 규정에 협조하십시오.”

당국은 누구인가? 당신들이 바로 당국의 일부가 아닌가?”

 

당국을 입에 올리는 이는 위험하다. 험악한 공기가 오가지만, 우리는 어차피 헤어진다. 공도통행증을 가진 그 운전사는 400위안(7만원)에 나를 진짜 국경까지 옮겨준다. 그날 차 없이 육로로 넘어가는 이는 나 혼자였기에 그는 내게서 여러 사람 분의 몫을 가져갔다. 그러나 할 수 없다. 국경에서 사람이 지체해서는 안 되니까.

 

국경에서는 언제나 싸우고, 예외 없이 지고, 결국 패배감에 이어 온몸이 다 아픈 몸살을 경험한다. 나를 염려하는 사람부터 질시하는 사람들까지 내게 준 해답은 비슷했다. 질시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테러리즘을 용납하란 말인가?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위해 하는 조치들에 대해 당신이(대개 구체적인 단어는 외국인이다) 왜 이의를 제기하는가. 그리고 나를 염려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중국의 과잉대응을 이해해야 한다. 그들은 분열과 내전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누구겠는가? 어떤 이는 내가 너무 무정부주의적인 사고를 가졌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야 하고, 내전 상황을 예방해야 한다.

 

나는 대답 대신 조지 오웰이 <카탈루냐 찬가>(정영목 옮김)에서 스치듯이 묘사한 구절 하나만 말해주고 싶다.

 

“(민병대의) 나팔수들은 모두 아마추어였다. 나는 나중에 파시스트 진영 바깥에서 스페인의 집합 나팔 소리의 곡조를 처음으로 제대로 들었다.”

 

나는 과도하게 상징적으로 그 구절을 읽었다(이어지는 글 전체를 보면 내 해석이 딱히 틀린 것 같지도 않지만). ‘정확한 나팔소리를 내는 무리가 파시스트의 군대가 아닐 수는 있다. 그러나 정확한 나팔소리를 내지 못하는 파시스트 군대는 없다.’ 나는 백 명이 내는 똑 같은 음이 하나가 아니다. 나는 국가 밖에서도 존재하므로, 국가의 명령에 모두 복종할 이유는 없다. 모욕하라, 그러나 나는 반항할 것이다

 

근대국가의 주창자들은 주권을 양도받은 국가의 행동을 옹호한다. 홉스는 말했다. 주권자의 생사여탈권과 백성의 자유는 양립할 수 있다고.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백성은 불가침 주권의 구성에 동의한 이자, 주권자를 구성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벌하는데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랴. 그러나 나는 다시 홉스가 정의한 자유의 의미를 곱씹어본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것은 저항(부자유)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조금만 바꿔 그에게 돌려주고 싶다. “나는 움직여야 하겠다. 심지어 그 저항이 국가라도.” <리바이어던>은 자유를 국가 아래에 두기 위한 기나긴 설교집이다. 이제 육지로 기어 나온 그 바다 괴물은 사람들의 친구 행세를 한다.

 

그러나 리바이어던과 개인은 친구가 아니다. 친구는 평등한 이들 사이의 관계다. 리바이어던과 개인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비대칭이 존재한다. 비대칭이 왜곡되면 폭력이 자라난다. 테러리즘을 흔히 비대칭 전력이라고 말한다. ‘수십 억짜리 전폭기로 마음대로 공격해봐. 그래도 나는 백 달러짜리 폭탄을 당신네 지하철역에 던져 주겠어.’ 스티글리츠와 같은 후생경제학자들은 정보의 비대칭 상황이 빈부의 격차(역시 비대칭)를 만들고, 이것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중국에서 이 정보의 비대칭은 어디에서 출발했을까? 최고의 정보, 즉 국가의 계발계획을 사고 판 이들은 정작 국가 언저리에 있던 이들이었다. 지금 그들이 선의를 가지고 우리 모두의 얼굴을 분석한다고 한다. 국가 언저리에 다시 십억의 얼굴 정보가 모인다. 십억의 움직임과 생각 정보까지 모인다. 정보의 비대칭은 이에 돌이킬 수없이 커졌다. 그런데도 나는 실체도 모르는 그 누군가(혹시 빅 브라더?)를 믿어야 한다고? 국가가 아니면 누굴 믿겠냐고?

 

불신을 조장하는 것은 사람과 조직의 본성이 아니라 비대칭 상황이다. 금권지배와 전체주의가 결합된 사회에서 비대칭의 최고봉은 아마도 책임과 권력의 비대칭일 것이다. 권한이 있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은 없는 사회를 우리는 전제주의 사회라고 부른다. 형식적으로나 권한에 비례하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라 부른다. 지금 중국의 행정당국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는 누구나 알지만 그들이 어떤 책임을 지고 있는지 아는 이는 없다. 그러므로 최소한 국경에서 당사자가 된 나는 당신들의 책임을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을 수밖에. 146km의 국경은 분명 비상식적이며, 그 안에서 군복을 입고 방망이를 들고 다니는 원주민들’(그 민족이 무엇이든 간에)에게 이 상황은 어색한 것이다. 그들이 그 상황을 완벽하게 받아들였다고 해도, 그들과 그런 상황을 겪지 않아도 되는 외부인 사이의 불평들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 현실에 대해 최소한 이의를 제기할 수는 있어야 한다.

 

카쉬가르-  출입구는 분리되어 있다- 들어감과 나감의 대칭이 파괴된- 일방의 문들.jpg

카쉬가르 - 출입구는 분리되어 있다. 들어감과 나감의 대칭이 파괴된 일방의 문들

 

나는 탈것으로 쓰는 내 말을 가끔 들판에 풀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말 전문가인 친구 마무르에게 물었다. “저놈을 풀어주면 돌아올까?” “수컷은 안 돌아올 것. 물론 거세하면 안 달아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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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세마가 아니야

 

사실 거세마만큼 쓰기 좋은 말이 없다. 거세마가 오히려 더 크고 잔병이 없다. 암말을 봐도 동요하지 않으니 대오를 이탈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전투용 말은 거의 거세마다. 파시스트 기병대 무리의 말이 거세마였는지는 한 번 살펴봐야겠다. 그러나 조지 오웰이 한 이 말은 다시 묘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어떤 이유에선지 훌륭한 투우사들은 전부 파시스트들이었다.”

 

말 타고 창 든 투우사와 뿔 두 쪽만 믿는 황소, 그 죽이려는 자와 달아나려는 자 사이에 비대칭의 심연을 느끼는 것은 신경과민증일까? 가장 극악한 파시스트들이 모두 가장 뛰어난 투우사는 아니겠지만, 카탈루냐에서 가장 뛰어난 투우사는 대개 파시스트였음은 사실이다. 창과 말을 다 가진 이가 파시스트가 된 것은 우연일까?

 

변경에서 바라본 중국 10   

  

공원국 _ 작가 / 중국 푸단대 인류학과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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