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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5월호
만들어진 샹그리라의 겉과 속 _ 유장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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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몇 해 전에 친한 동료 교수의 부인이 윈난 서북부에 위치한 샹그리라에서 운명을 달리했다. 부부가 함께 여행하던 중에 일어난 참사였다. 중국병원에서의 최종진단은 고산증이었다. 도착하는 날부터 머리가 어지러웠고, 속이 울렁거렸다고 한다. 빨리 퇴각해서 고도가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했지만, 일행이 1박 2일간의 여행코스를 다 마칠 때까지 호텔방과 병원을 왕래하면서 진정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일행과 함께 리장으로 귀환하는 중에 노상에서 변고가 발생하면서 오랫동안 별러왔던 이들의 샹그리라 여행은 비극으로 끝났다.

 

사실 중국의 윈난성 서북부에 있는 샹그리라는 외견상 매혹적인 관광지이긴 하다. 하지만 고도가 높아서 고산증의 위험이 있는 데다, 외진 곳에 있는 탓에 여행 거리가 매우 길어서 쉽게 지칠 수 있다. 또한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어서 주의할 것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물론 외국인들에게도 샹그리라 여행은 매우 매력적이다. 나는 ‘샹그리라에 가면 거긴 샹그리라가 아냐’라는 괴이한 핑계로 그 입구에서 되돌아 왔지만 사실 리장이나 후타오샤 일대는 샹그리라와 여러 모로 닮았기 때문에 무리를 하면서까지 그곳에 가기는 어려웠다.

 

샹그리라는 이미 알려진 것처럼 1920년대에 영국의 작가 제임스 힐튼이 쓴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지명이다. 이 소설의 내용은 생략하지만, 그 속에 관류하는 기본 가치는 전쟁의 두려움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평화와 평등, 그리고 욕망이 불필요한 이상의 세계이다. 말하자면 샹그리라는 그 가치를 온존하면서 타락한 세계의 대안을 보여주려고 만든 피안의 세계와 같다. 물론 그 내부에는 기독교의 차별성과 서구인의 우월성 등이 뒤섞여 있지만, 여하튼 이 소설로 인해 샹그리라의 아류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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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샹그리라의 일부분.

샹그리라의 기본 개념에는 푸른 하늘, 초원, 순박하게 사는 인민 등이 있다.

 

중국 당국은 중국이야말로 오랫동안 꿈꾸어온 무릉도원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간으로 샹그리라를 중국내에 창조하려고 하였다. 당연히 이를 통해 관광객을 모으고 돈을 벌 수 있으리라는 지극히 상업적인 동기가 크게 작용하였다. 또한 여기에는 1920년대에 윈난성 일대에서 상업용 및 약용 식물을 채집하여 미국 농무부에 보낸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의 식물학자 조셉 록의 탐사기록이 주요 근거로 제시되었다. 또한 윈난 서북부 지역의 경제적 쇠퇴와 변경의 소수민족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 의도도 샹그리라 건설을 부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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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  윈난에서 식물채집을 주도한 조셉록.

   

특히 샹그리라 건설을 주도한 윈난성 당국은 힐튼이 제시한 이상과 조셉록의 현지 탐사를 근거로 삼아 샹그리라의 개념을 ‘푸른 하늘, 흰 구름, 설산, 초원, 호수, 삼림, 야크, 양떼, 그리고 순박하고 사랑스러운 인민’으로 구성된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윈난성 서북부에 위치한 중티엔(中甸)을 최종적으로 선택하여 샹그리라로 개조하는 작업을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오늘날 중국내 최대 관광지로 꼽히는 샹그리라가 세기가 바뀌는 2000년 무렵에 탄생하였다. 중티엔이었을 시절에는 관광객이 연간 2만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샹그리라고 개명하고 난 10여년 후에는 약 500만 명이 이곳을 찾을 정도로 대박을 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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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3  록이 윈난에서 채취한 로도덴드론.

           구미인들이 매우 좋아하는 진달래속 꽃나무이다.

 

그렇다면 윈난 부근에는 저와 같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샹그리라와 달리 현지인들이 관행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샹그리라는 없었을까? 있다. 나는 그것을 리장을 떠나 후타오샤로 가던 도중에 보았다. 우리는 양자강 최상류인 진샤강(金沙江) 계곡 초입에 해당하는 ‘장강제일만(長江第一灣)’이라고 하는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앞이 확 트인 데다, 고산과 구름, 마을, 논과 밭, 강 등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전망할 수 있는 곳으로서는 그만인 곳이었다. 어찌 보면 샹그리라는 지금부터 시작인 듯이 보였다.

 

그런데 그곳에 작은 비석 두 개가 위 아래로 서 있었는데, 제목과 설명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나는 1908년에 세웠다는 ‘향각리웅고(香各里雄古)’석비였고, 다른 하나는 이 비석을 소개하기 위해 최근에 세운 ‘향각리웅고석비간개(香各里雄古石碑簡介)’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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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4  장강제일만 휴게소에서 만난 향각리비와 소개비문

 

<향각리웅고석비>는 비석 상단에 가로로 ‘석비’라 쓰고, 그 아래쪽에는 세로로 ‘향각리웅고양촌중간(香各里雄古兩村中間...)’으로 시작되어, ‘광서(光緖)34년3월...립(立)’으로 끝나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1998년에 촌락 사람의 제보를 받은 「리장일보」의 기자가 웅고촌에서 이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발견 당시, 이 비는 어느 농가에서 빨래판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그 탓에 상당히 마모되어 전체를 해독하기는 어려웠다. 크기는 대략 성인키의 절반 정도인데, 대략적인 내용은 이곳 농민들의 물이용에 관한 약정이라고 한다.

 

이 석비를 소개한 비석을 통해 샹그리라의 의미를 대강 알 수 있었다. 소개문에 따르면 ‘향각리(香各里)’는 지명이며, ‘라(拉)’은 어기조사로서 ‘그렇다. 맞다’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연달아서 읽으면 ‘이곳이 바로 샹거리야’라는 뜻이라고 한다. ‘향각(香格, xiangge)’ 두 글자는 나시 사람들의 말인 ‘웅고(xionggu)’에서 나온 것으로서, ‘웅(雄)’은 향백(香栢) 나무를, ‘고(古)’는 ‘처소’라는 의미이므로 ‘웅고’는 향백 나무가 생장하는 곳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곧 ‘香各(格)’인 셈이다.

 

또한 소개 비석문에 따르면 1932년에 인쇄된 리장 일대의 지도에도 분명하게 웅고를 향각리로 표시하고 있어서, 당시 사람들이 ‘이곳이 어디요?’라고 물으면 나시말로 ‘샹거리-라’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1998년에 발견된 옛 비석이 그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향백나무다. 계명대학의 강판권 교수에 따르면 향백나무는 히말라야 시다이다. 대구 시내에 특히 많지만, 다른 곳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일명 설송이라고 하는데, 나뭇가지는 오랫동안 눈을 머금었던 탓에 땅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히말라야 서북부 지역이 원산지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샹그리라는 티베트어로 ‘마음속의 해와 달’이라고 주장해온 기왕의 설과 달리, 단지 히말라야 시다가 많은 동네일 뿐이다. 그러니 나시 사람들이 보기에 중티엔을 샹그리라고 개명하고, 그곳을 이상향이라고 소개하면서 관광지로 바꾸는 작업은 말하자면 자신들이 지켜온 언어적, 향촌적 관행과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윈난성 정부의 샹그리라 결정은 유사한 환경과 역사적 배경을 발전시켜온 다른 지역의 강력한 반발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최근에 이르러 샹그리라에서는 불행한 소식들도 들려온다. 도심지에 화재가 발생하여 중요한 건물들이 훼손되었고, 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사상자 뿐만 가옥의 붕괴와 같은 재해도 잇따랐다. 샹그리라를 샹그리라답게 해 주던 초원도 많이 사라졌고, 평화롭게 살던 현지 주민들은 구경거리가 되거나 노점을 차려 관광객을 호객하는 방식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주인에서 주변인으로 밀려나는 셈이다. 이러한 탓에 한적한 곳에서 유유자적하고픈 이들은 점차 이곳을 외면하고, 알려지지 않은 샹그리라를 찾아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윈난 서북부, 쓰촨 서남부, 티벳 동남부의 자연환경이나 주민들의 생활양상은 개발 이전의 중티엔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샹그리라의 명암이다.

 

현장에서 마주친 관행 13

   

유장근 _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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