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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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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호
개혁개방 초기 북한화교의 집단귀국 _ 송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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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12월 중국공산당은 제113중전회(三中全會)에서 당의 중점을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에 집중할 것을 채택했다. 그 후 중국에서는 개혁개방이 시작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북한에서는 중국이 자본주의 길을 걷는다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일부 북한사람과 화교 간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같은 시기 중국 국무원(國務院)북한화교들의 직업과 진학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북한화교들의 귀국 정책을 완화한다라는 문서를 하달했다. 그리하여 1979년부터 1985년까지 4,536명의 북한화교가 신의주와 남양 등의 국경지방을 거쳐 귀국하게 된다. 본고는 그들의 귀국 과정에 대하여 함경북도 회령과 청진화교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979년 일부 화교들이 귀국을 신청하자 중국교무(僑務)기관에서는 1960년대에 실시한 바 있던 화교 귀국사업 계획서를 참조로 북한화교들을 받아들이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국무원은 주조선대사관을 통하여 매년 귀국청원자의 인원수를 조사한다. 둘째, 국무원은 조사결과를 참고로 귀국화교들에 대한 배치 계획을 세우며, 이에 근거하여 각 성의 교무사업처(僑弁)에 필요한 자금과 물자를 공급한다. 셋째, 각 성의 교무사업처는 각자 실정에 맞는 연도별 대응 계획을 세우며, 귀국화교들을 각 지방에 배치한다.

 

이와 같이 치밀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빨리 귀국하고 싶은 북한화교로서는 계속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과 인접한 국경도시 회령에 거주하고 있던 화교들이 월경(越境)을 하기 시작했다. 회령에서 월경한 화교들은 먼저 변강 중국 측의 지방공사(公社)나 공안국을 찾아가 연길현 교무사업처(延吉県僑弁)에서 등기를 마친 후 배치가 정해질 때까지 용정진(龍井鎮)초대소에서 생활했다.

 

중국 국내 기관에서는 월경해온 화교들에게 북한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지만, 강압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1980년 봄부터 여름까지 용정진초대소에는75명의 월경화교가 있었는데, 그중 회령화교가 48명이었고 청진화교는 9명에 불가했다. 회령 귀국화교 A씨는 당시 귀국과정에 대하여 “1980년 봄 나는 청진화교 동창 3명과 같이 청진에서 기차를 타고 회령의 집에 도착했다. 부모님과 의논한 후 우리 4명은 두만강을 건너 삼합(三合)으로 넘어 왔다고 회고했다.

 

당시 함경남북도의 화교학생들은 지방 화교소학교를 졸업한 후 모두 청진중국인고등중학교에 진학했다. 당연히 회령, 삼봉, 남양 등 중국과 인접된 변강 지역의 화교 학생들도 청진화교 중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일부 학생들이 귀국하자 화교학교 내부에서는 귀국열이 고조되면서 몇 명씩 모여 월경하는 사례가 끊임없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화교중학교에서는 한 학년이 두개 반이었던 것이 한개 반으로 혼합되는 형편이었다.

 

중국의 지방정부는 용정진초대소에 머물고 있던 75명의 월경화교들에게 그들의 요구를 기본적으로 들어주는 방법으로 배치를 끝냈다. 그러자 이에 만족한 귀국화교들이 북한에 남아있는 화교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중국 국내의 대우는 좋은 편이라고 연락을 보냈다. 결과적으로 월경을 통하여 귀국을 선택한 화교의 인구가 급증했다. 월경 화교가 많아지면서 청진에는 화교들을 회령이나 남양 등 변강지역에 안내하여, 월경을 도와주고 돈을 받는 안내인들까지 등장했다.

 

당시 북한화교들이 귀국증명서를 취득하려면, 우선 국내에 있는 직계 친척으로부터 소개장을 받아야 했고, 소개장은 지방 화교연합회을 거쳐 중국주조선대사관에 전달되어 귀국이 이루어 졌다. 1981년 주조선대사관은 월경으로 귀국하는 화교들을 막기 위하여, 귀국증명서의 발급조건을 완화하는 등 조치를 마련했다. 이에 따라 중국 국내의 소개장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으며 귀국을 원하는 화교는 신청만하면 귀국증명서가 발급되었다. 그리하여 1981년부터 귀국증명서를 가진 화교들의 귀국이 증가했다.

 

1982년 말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자 북한 국내에서 떠돌던 소문들은 사라지고 화교들도 전과 같은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 반면 중국 국내에서는 귀국한 북한화교들을 생활조건이 별로 좋지 않은 농촌지역에 배치하는 등 지역의 편중이 있었다. 그 결과 북한화교들의 귀국열풍은 식어버렸다. 중국정부는 19843월까지 용정진초대소를 비롯한 북한 귀국화교를 전문으로 받아들였던 많은 초대소를 철거하였고, 철거 당시 초대소에 머물고 있던 귀국화교들은 화교농장으로 배치되었다.

    

   

   북한화교의 귀국증명서(필자 촬영)



【북한화교와 한반도 11】

 

송우창(宋伍强) _ 중국 광동외어외무대학(廣東外語外貿大學)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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