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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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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
북한의 협동화와 평양시 화교유리제품생산합작사 _ 송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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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유리제품생산합작사(平壤市華僑玻璃製品生産合作社)가 운영을 시작한 것은 19558월이었다. 설립 당시 이 합작사는 자본금은 3,660원에 불과했고, 합작사 내에는 기술자나 기능공이 단 한명도 없었다. 따라서 합작사의 적지 않은 사원들이 자신들의 장래에 불안감을 느꼈다. 이러한 합작사를 평양 화교가 어떤 경위로 세우게 된 것일까.

 

유리합작사 사장 장충훈(張忠勳)은 합작사 설립 과정에 대해 나는 해방 전까지 남에게 일을 해주는 처지였다. 조선전쟁이 끝나자 작은 음식점을 차려 자본주의의 길을 걸으려 했었다. 그러나 조선의 사회주의 건설의 발전과 화교연합회의 올바른 가르침에 감명을 받아, 상공업자로서 인민과 나라에 공헌해야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적 개조를 받아들여야 하였기 때문에 합작사를 조직했다라고 말했다.(華訊1957420일자)

 

음식점을 하려다 유리제품 생산으로 바꾼 것은 쉬운 결단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충훈의 말에서 보듯이 이 시기 북한에서는 개인 상인을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자로 고립시키는 한편, 협동조합(북한화교는 합작사로 불렀다)에 가입하는 것이 사회주의 대열에 들어서는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집단화를 전개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일부 평양화교 상인이 유리합작사를 세운 것이었다.

 

합작사는 1956년 화교 유복기(劉福起)를 기사(技師)로 받아들였다. 유복기는 해방 전부터 약40년 간 유리 제조업에 종사해온 숙련공이었다. 그 해 유리합작사는 조선사회과학원으로부터 화학실험용 유리기구의 생산을 위탁받아 품질 좋은 기구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이것을 계기로 합작사는 북한 정부기관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1956년 연간 생산액은 63,900원에 불과했다.

 

북한에서는 19561211일 노동당중앙위원회12월전원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제15개년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최대의 증산과 최대의 절약 방침이 제시되었다. 이에 따라 유리합작사는 1957년도 기본생산계획 1,296만원과 증산계획 190만원으로 각각 계획을 세웠다. 이 생산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합작사는 용해로를 개선했다. 그 결과 19582월 소집된 합작사 연간생산총회에서 장충훈은 12월말까지 연간계획의 생산액을 158.9나 초과하는 2,361.1만원을 달성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총회에서 1958년도 생산계획을 기본계획 2,400만원, 증산계획 800만원으로 설정했다.

 

1958916일 김일성은 전국생산혁신자대회에서 사회주의건설에서 소극성과 보수주의를 반대하자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그리고 같은 달 26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된 당중앙위원회전원회의에서 5개년 계획을 1년 반 앞당겨 수행하기 위한 당중앙위원회의 편지가 채택되었다. 편지에는 김일성이 혁신자대회에서 지적한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화교연합회는 편지내용을 화교에게 숙지시키기 위해 각지에서 학습반을 조직하고, 보수주의와 신비주의를 반대하고 모든 가능성에 과감히 도전할 것을 제창했다.

 

유리합작사는 19581031일 총회를 열어 당의 호소를 수용하여 보수주의 및 소극성과 단호히 투쟁하며, 비 기술적인 선입관을 버리고, 담대하게 실천하는 정신을 발휘하여, 1959년도에 2억 원의 생산목표를 달성할 것이라고 결정했다. 1958년도 연간계획의 8배에 달하는 이 목표에 도전하기 위해 합작사는 두 번째로 용해로를 개량했다. 그러나 합작사가 1959년도 연간생산 계획을 302% 초과 달성 했다고 발표했지만, 실제 생산액은 목표액 2억 원의 절반 이하였다고 추측된다.

 

1960년 들어 유리합작사의 생산액은 침체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 해 합작사의 연간생산계획은 82만원이었다. 북한은 19592월 구화폐 100원당 신화폐 1원의 비율로 화폐 교환을 실시했다. 따라서 1960년도의 생산계획 82만원은 구화폐 8,200만원에 맞먹는 생산액이었다. 1960년도 생산계획의 분기별 생산액은 다음과 같다.

 

1사분기는 321일 현재 22.31만원 이었고, 2사분기는 16.47만원, 3사분기는 23.98만원이었다. 華訊19601230일자에 따르면 유리합작사는 196011월말까지 연간계획을 3.1% 초과 달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사 내용에 12월말의 생산액은 86.8만원이 예상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 기사에는 11월말의 생산액이 적혀있지 않지만, 3.1% 초과 달성이 정확하다면 생산액은 84.54만원이 될 것이다. 12월에는 2.26만원밖에 생산 못한 것이 된다. 여러 가지로 볼 때, 1960년의 생산계획은 12월 중순에 달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생산계획을 앞당겨 달성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완수 기일을 11월말로 수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리합작사의 1961년 연간 생산계획은 93.9만원으로 전년에 대비하여 11%나 많았다. 생산계획을 초과 달성하기 위하여 합작사는 그 해에도 용해로를 세 번째 개량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증산운동을 계속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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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신의주화교가 소련 주둔군을 방문한 사진(194812)

출처: 民主華僑19498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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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1948‘8·15’기념행사에 참가한 평양화교

출처: 民主華僑1949815일자



【북한화교와 한반도 10】

 

송우창(宋伍强) _ 중국 광동외어외무대학(廣東外語外貿大學)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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