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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7월호
적군묘지와 한·중 관계의 이면 _ 유장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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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이라는 양국의 관계는 수천년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다. 어느 때는 평화가 오랫동안 지속된 적도 있으나, 긴장이 고조되는 수위를 넘어 전쟁으로까지 치달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한국전쟁은 양국의 역사에서 정면으로 군대가 부딪쳤다는 비극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지극히 어두운 부분으로 남아 있다.  


사실 전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선과 육지만으로도 14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순망치한이라는 고서성어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빨에 해당하는 주체를 항시 자신으로 인식하는 반면, 그것을 보호해야한다는 입술은 주변 국가나 민족에 비유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어느 누가 이빨 대신 입술이 되고 싶어 하겠는가 말이다.


허나 중국은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인되어 있다시피, 큰 나라이다. 특히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이 대국의 강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강요는 자신들의 오른쪽 어깨라고 비유하던 한반도에는 더 가혹할 정도로 적용되었다. 이런 불평등 구조가 양국관계의 오랜 관행처럼 지켜져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참전도 그 불평등 구조의 관행이 폭발한 것이었다고 보아도 좋다. 전쟁이 만주지역으로 확전될 조짐을 보이자, 한쪽 어깨를 보호하기 위해 젊은 인민군들을 대거 참전시켰고 이로 인해 전쟁은 처참하다할 정도로 이곳저곳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그 중의 하나가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에 있는 ‘적군묘지’일 것이다.


지금은 감옥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 초기에 적군묘지에 묻혀 있는 중국군의 유해를 송환하겠다는 제안을 중국측에 통고하였다. 이를 통해 양국 관계를 더욱 더 격상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외교용 선물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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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  파주군 적성면에 위치한 적군묘지

2개의 묘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묘역에는 북한군이, 2묘역에는 북한군과 중국군이 묻혀 있다. 전세계에서 유일한 적군의 무덤이다.


그렇다면 이 적군묘지란 무엇인가. 양국관계의 어두운 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좀 정확하고 자세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북한군과 중국군의 유해가 묻혀있는 적군묘지는 파주군 적성면 답곡리 산 55번지에 있다. 파주에서 연천으로 가는 37번 국도 변이다. 국도 바로 위쪽에 휴전선이 있기 때문에 인적은 드물었다. 필자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는 2014년 8월로 한 여름이어서 강산은 푸르렀지만, 적막에 둘러싸여 있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관리부대에서 묘역 관리를 어느 정도 해 놓은 덕분에 본연의 모습이 잘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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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파주군 적성면에 위치한 적군묘지



1996년에 조성된 것이니, 김영삼 대통령 때의 일이다. 제네바 협정에 의거하여 조성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 협정이 국내에서 무용지물이었는지, 아니면 국가의 정책에 의해 실행에 옮겨질 수 있을 정도로 규정력이 강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세계 유일의 적군묘지라고 하니, 이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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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1968년 1.21사태 당시 사살된 북한군소위 권호신의 묘지석


묘지는 크게 제1묘역과 제2묘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묘역에는 북한군유해가, 제2묘역에는 북한군 일부와 중국군 유해가 함께 묻혀 있다. 모두 1100여구가 되지만 해마다 발굴을 통해 새로 입관되는 유해도 있기 때문에 수효가 일정치는 않다. 조성 당시에는 유해마다 봉분을 만들고 비목을 세웠지만, 최근에는 돌로 된 묘지석만 가지런하게 배치한다고 한다. ‘북한군 139, 2002.8.16, 무명인, 충청남도 연기군 근남면’, 혹은 ‘북한군 111-121 2000.11.21. 북한군 11구’로 적혀 있다. 대부분 이름이 없는 채로 유해번호, 유해 발굴 장소와 일자, 유해수효 등을 묘지석에 기록해 두었다. 반면 북한군은 ‘북한군 30, 1996.6.14. 소위 권호신, 1.21사태 무장공비’에서 알 수 있듯이, 1968년 1.21사태 때의 초급장교도 여기에 묻혀 있었다. 새파란 젊은이들이다. 또한 내가 사는 곳인 마산 지역에서 찾은 유해나 인근의 함안에서 발굴한 유해도 여럿이었다. 이곳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 상보와 그 때 징집당한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는 나로서는 감회가 새로웠다.


이와 달리 중국군의 표기방법은 한글명 아래에 한자를 병기해 두었다. 중국인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중국군中國軍 1057-1071, 2011.12.5. 중국군中國軍 15구十五具’가 그 예이다. 또 일부는 28구, 45구, 81구처럼 많은 이가 같이 묻힌 곳도 있었다. 이 중 81구가 묻힌 묘지석 앞에는 말라붙은 생화와 조화가 한 데 묶인 꽃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이곳을 방문한 중국인의 조화가 아닐까 하는 짐작도 해보았다. 다만, 중국군 유해에는 발굴지를 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또 유해의 상당수가 이미 본국으로 송환된 탓에 군데군데 비어있는 곳도 있었다. 그곳에는 붉은 깃발을 꽂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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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중국군 묘지석

중국군은 대부분 많은 유해를 함께 묻었다. 아쉽게도 유해발굴지를 새겨놓지 않았다.


1차 송환 시에 보내진 437구의 유해들은 선양에 있는 항미원조열사릉에 묻혔다. 하지만 2015년 12월 10일에 방영된 TV의 보도에 따르면 중국으로 송환된 500여기의 유해 중에 잘못 전해진 유해도 있다고 한다. 시신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국방부에서는 이를 부인했지만, 발굴 당시의 유해 상태와 보낼 당시의 그것이 달랐다고 하니, 의심을 살만했다. 또한 유해 발굴이 전문가에 의해 적절한 방법으로 진행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여하튼 이들이 선양에 묻힌 뒤로는 ‘적군’에서 ‘항미원조열사’로 그 신분이 바뀌게 되었다.


현재 중국의 민정부에서 관리하는 항미원조열사릉은 세 군데이다. 만주의 선양과 단둥, 그리고 호북성의 적벽시(赤碧)이다. 앞의 두 군데는 전쟁터와 가까운 곳에 있으니 이해가 되지만, 적벽시는 좀 의아하다. 적벽은 『삼국지』에 나오는 그 적벽으로서 현재 호북성 소속이다. 전쟁 발발 이후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해 중남군구에서 적벽에 중국인민해방군 제67예비병원을 건립하였고, 이 병원의 의료요원이 1951년 10월부터 1955년 2월 4일까지 약 1,200여명의 지원군부상병을 치료하였다고 한다. 그 중 142명이 사망하였으며, 그 중 124명이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이런 연유가 있기 때문에 차후에 적군묘지의 유해들이 적벽시로 갈 경우도 있을 것이다.


​현재 외국에서 전사하여 돌아오지 못한 중국군​ 유해는 약 11만여 명이고, 그 중 9할 이상이 한반도에 묻혀있다고 한다. 그러니 지난번에 송환된 유해는 극히 일부인 셈이다. ‘중공오랑캐’를 수장시켰다고 해서 지어진 파로호나, 중국군의 피가 흘러내렸다는 백마고지에도 그 병사들의 유해가 부지기수일 터이니 전쟁의 유산 정리는 아직도 진행 중인 셈이다.


사실 중국이 인민군 병사의 유해를 돌려받았다고 해서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는 소식도 없는 것 같았다. 또한 박 전 대통령의 대중 화해 제스처가 이후에 양국 관계의 발전에 기여한 것 같지도 않다. 고고도 미사일 사태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유해를 돌려보내기보다, 세계사상 유례없는 '적군묘지'의 주인공으로  피비린내 나던 전투 현장에 보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한국전쟁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전쟁이 결국 국가의 이름으로 진행되지만, 그  뒤편에서는 피를 뿌린 젊은 영혼만이 낯선 산하에서 구천을 헤맬 것이기 때문이다. 그 현장을 보존하면서 전쟁의 비극을 만방에 알려, 다시는 자신과 같은 불행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그들의 소망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현장에서 마주친 관행 4】


유장근 _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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