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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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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호
해방초기 북한 화교학교의 변화(1945-1950) _ 송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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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조선에서 화교학교의 설립은 중국인의 이주시기가 빨랐고 상업이 발달되었으며 화교 인구가 많은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각 지방의 화교학교는 인천은 1902년, 서울은 1910년, 부산은 1912년, 신의주와 청진은 1915년, 진남포(해방 후 남포)는 1919년, 원산은 1923년에 각각 설립되었다.


그 이후 화교학교의 설립과 규모는 화교 인구와 경제력 및 중일관계의 추이에 따라 변화했다. 1940년대 전반 북한지역 화교학교는 평북 10개(신의주, 운산북진, 용암포, 화공(華工), 화농(華農), 강계, 칠평, 대유동, 후창, 정주), 평남 4개(진남포, 평양, 동평양, 선교), 황해 3개(해주, 사리원, 겸이포), 함북5개(청진, 웅기, 회령, 라진, 성진), 함남2개(원산, 함흥) 등 총 24개 학교에 달했다.
 

일제시기 화교학교는 각지의 중화상회가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북한에 진입하자, 북한 각지의 유력 화교는 남한이나 중국으로 재이주 했다. 이때 각 학교의 교직원도 각 지역으로 분산되었다. 다만 1947년 현재 4만 여명의 화교가 북한에 거주하고 있었고, 1946년 말까지 중화상회도 기능하고 있었다. 화교인구가 많은 신의주, 평양, 청진 등 주요 도시에는 화교학교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1946년 초 중국 동북과 산동 지역의 중공(中共)간부들이 북한 서부 연해 지역인 해주, 남포로 넘어왔다. 그들은 북한에서 중국 내전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지만, 지방 화교와 협력 관계를 가지면서 화교학교의 교원을 겸하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과 인접한 평안북도와 자강도 지역은 내전을 피해 압록강을 건너온 중국인들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 학력이 높은 자는 화교학교의 교사로 근무했다.
 

1946년 8월 중공 동북국(東北局) 주(駐) 북한 임시 기관인 평양리민공사(平壤利民公司)가 창설되었다. 북한 임시정부는 중공 간부에게 화교 관리의 협조를 요청했다. 이에 따라 1946년 11월경 북한 노동당 산하 화교 업무를 전문으로 하는 조선노동당중앙교무위원회가 창설되었고, 뒤이어 화교를 대표하는 조직인 화교연합회의 활동이 개시되었다. 그 후 1947년 2월 1일 북조선화교연합총회가 정식으로 설립되면서 각 도(道)와 주요도시에 화교연합회가 조직되었다. 이 연합회의 위원장 등의 주요 간부는 모두 중공 간부인 자가 임명되었다.


화교에 대한 관리제도가 체계화 되면서, 해방초기 북한 화교 사회에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었다. 먼저 근대 조선 화교사회의 중심이었던 화교상회가 폐쇄되었다. 이에 따라 각지 화교상회에 의해 운영되던 화교학교의 장래가 문제시 되었지만, 화교연합총회의 방침으로 1947년까지 신설된 지방 연합회가 각지의 화교학교의 경영을 인수 받았다.


초기 연합회의 임무는 북한 정부를 대신하여 각지 화교 속에서 토지개혁을 전개하는 것, 중공의 국내 해방전쟁을 지지하는 것, 중조 인민간의 관계 개선 및 북한 신 정권의 정책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화교연합회는 북한화교에 대한 업무를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 북한화교 내부로부터 핵심 구성원을 육성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중공의 북한 화교교육의 첫걸음이 되었다.
 

1947년 3월-9월 연합총회는 2차에 걸쳐 훈련반(訓練班)을 조직했다. 먼저 3월경 각 도의 시·군으로부터 선발된 화교청년(점원, 노동자, 농민 출신)을 대상으로 공농간부훈련반(工農幹部訓練班)이 개설되었다. 훈련반의 교관은 주임에 최성지(崔成志), 지도원에 정암(丁岩), 대장에 주자방(朱子芳)이 각각 임명되었다. 이들은 모두 중공 간부였다. 따라서 강의 내용도 중공의 우월성과 정통성이 강조되었다. 때로는 조선노동당 간부도 강의에 참여하여 조선혁명사와 조선노동당의 당면한 과업을 설명했다. 북한화교 제1차 대표자대회가 1947년 4월 15일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 앞서 제1차 훈련반에 참가했던 화교들이 각 도 시·군의 화교연합회의 핵심 일꾼에 임명되었다. 뒤이어 1947년 7월-9월 교사훈련반(敎師訓練班)이 조직되었다. 2차 훈련반에 각 지방의 소학교 교원 40-50명이 소집되었다. 2차 훈련반의 목적 역시 참가자의 혁명적 사상을 높이는데 있었기 때문에, 교관도 1차 훈련반 때의 최성지, 정암, 주자방이 계속하여 강사를 맡았다.


제 2차 훈련반이 끝난 후 연합회는 다음 단계로 화교학교의 재건을 전국 범위에서 전개했다. 연합회는 평양연합총회 내에 교육과를 설치하고 화교 학생 수가 20명 이상인 지역에 화교 소학교를 세웠다. 그 당시 북한에는 중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연합회는 먼저 평양 화교중학교 설립에 착수했다. 두 달의 개교 준비 기간을 거쳐 1947년 11월 15일 평양화교중학교가 정식으로 개교했다. 교육 시설로 60평 정도의 교실 6개와 집단 기숙사 3개,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식당이 있었다. 학생의 이동을 위해 차량도 두 대나 배치되었다. 학교교장은 연합총회의 위원장인 왕정야(王靜野), 교감(副校長)과 교무주임은 위의 훈련반을 지도한 최성지와 주자방이 맡았다. 학교의 실제 업무는 최성지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화교중학교는 제1기 입학생 82명을 1반 36명과 2반 46명으로 나누어 교육했다. 그러나 개교가 늦게 이뤄진 점과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문화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화교중학교는 우선 입학생 가운데 40여명을 선발, 이동극단(流動劇團)을 조직했다.이동극단은 평양을 중심으로 함흥, 청진, 해주, 사리원 등 각지에서 ‘피와 원수’(血和仇), ‘남매개간’(兄妹開荒), ‘부부글자공부’(夫妻識字)를 공연했다. 2차 순회공연이 1948년 8월 20일 끝나자 제1기 학생 가운데 20여명이 최성지의 인솔하에 중국내전에 참가했다. 평양에 남은 학생 중 일부는 화교학교나 연합회에 배치되었다. 1948년 9월 화교중학교는 제2기 신입생을 받아들여 남은 제1기 학생과 혼합하여 1학년을 만들고 정규수업을 시작했다.


그 당시 북한 영토 내 화교학교 운영 관련 일체의 비용은 화교연합회가 각지의 화교로부터 학비를 징수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한편 북한정부는 일부 화교학교에 교육시설을 제공해 주었고 낡은 교실의 보수 작업에 필요한 자재도 지원했다. 일부 학교에서 해방 전 교과서가 그대로 사용되는 곳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중국 국내 중공 해방구의 교과서가 사용되었다.
 

화교연합회는 1948년 7월 제1차 교원 훈련반에 참가하지 않은 각 지방의 시·군 화교학교 교원에게 서한을 보내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평양에서 강습을 받도록 하여 화교학교에 대한 관리를 강화했다. 그러나 이 시기 중국 국내는 중공군이 우세를 차지하면서 해방지역이 넓어져 간부인원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화교연합회의 왕정야 등 중공 지도 간부가 국내로 소환되었고 평양화교중학교 최성지도 귀국하여 단동시 정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결과 북한 화교학교의 운영은 교원 훈련반에 참가했던 화교 교원이 맡았다. 1949년 초 화교학교의 수는 중학교 2개(평양, 신의주), 소학교 87개에 달했으며, 학생 수는 6,883명이었다.
 

화교연합회는 1949년 1월 전체 화교학교를 대상으로 지난 학기(1948년9월-49년1월)의 운영상황을 조사했다. 설문의 내용에 학교수업의 문제점과 화교교육의 장래에 관한 요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함경북도 화교연합회의 보고서(1949년 2월 25일)에 따르면,당시 학교 수업의 문제로 학교 교원이 정치학습에 편중된 나머지 실제의 교육수준이 낮다는 점, 개학된 후에도 중국 국내의 교과서가 도착되지 않아 학생들의 학습에 지장을 주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많은 화교의 경제형편이 곤란하여 학교 자금 확보가 곤란하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요구’ 부분에 경제 조건이 곤란하고 학교 관리가 정규화 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북한정부의 지원을 받는 것이 상책이라고 보고했다.


북한 내각은 1949년 3월 11일 '중국인학교에 관한 결정'에서 “중국동북행정위원회와 북조선화교연합총회의 요청을 접수하여”, 1949년 4월 1일부터 북한화교연합회에 의하여 운영되던 화교학교를 조선 “교육성에서 이를 관리한다”라는 내용을 채택했다. 이 ‘결정’은 북한 교육성이 화교학교의 교과서 편찬, 교수요강의 채택을 정규화 할 것과, 1949년 7월까지 학교 접수에 관한 일체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 명기되었다. 이리하여 화교학교의 운영자금과 교원 월급은 모두 북한정부가 부담하였고, 화교 자녀는 무료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다만 화교소학교는 ‘중국인인민학교’로, 화교중학교는 ‘중국인중학교’로 개칭되고, 화교학교의 교육방침에도 북한정부의 의사가 반영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전국 화교학교는 1949년 9월부터 화교와 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중조아동연환회(中朝兒童聯歡會)등의 다양한 활동이 펼쳐졌다.
 

북한 교육성은 1950년 4월 8일 ‘중국인초급중학교규정에 관해’라는 문서를 작성했다. 그 내용은 화교소학교를 졸업하는 화교학생을 위해 필요에 따라 각지에 화교중학교를 세운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중단되었다. 화교학교는 휴전이후 1958년까지 중학부를 포함하여 자립적으로 운영했다.

 

사진 1  북조선화교 이동극단 제2차공연 단체사진(1948.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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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林明江 主編, 『報效祖國獻靑春: 吉林歸僑口述錄』, 中國華僑出版社, 2011, 309쪽.


사진 2  1915년 청진중화상회 및 화교학교 준공식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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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화교와 한반도 7】

 

송우창(宋伍强) _ 중국 광동외어외무대학(廣東外語外貿大學)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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