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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시사&테마
4월호
한 프랑스 시인이 만난 한자의 세계 _ 김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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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지평을 열었다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는 이런 시행이 있다. “은밀한 기쁨으로 가득했던 순수한 낙원은 / 벌써 인도보다, 중국보다 멀리 있는가?” 세상에 없는 낙원을 꿈꾸며 이 시의 제목처럼 「슬프고 정처 없이」 평생을 떠돌았던 보들레르. 이 불행한 시인이 지상에서 맛보았던 행복의 순간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보낸 1년 남짓이 전부였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기에 더욱 그리운 순진무구한 시절. 그러나 이 “어린 사랑의 푸른 낙원”은 인도처럼 아니 중국처럼 까마득히 멀기만 하다. 사라져버린 유년기처럼 도저히 갈 수 없는 곳, 구차하기 짝이 없는 이 칙칙한 현실과는 다른 곳, 요컨대 지금-여기가 아닌 어떤 곳, 보들레르가 상상하는 중국은 피안과 같은 곳이었다.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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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죽은 다음 해(1868년)에 태어난 폴 클로델에게 중국의 이미지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이 시인은 『악의 꽃』의 시인과 달리 우리에게 다소 생소하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의 누나 카미유 클로델이 우리에게는 좀 더 친숙할 것 같다. 수년 전에 개봉된 영화 『카미유 클로델』을 통해, 로댕과의 불행한 사랑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녀의 삶이 꽤 널리 알려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인과 극작가로서 프랑스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클로델의 위상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보들레르에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그 또한 프랑스 문학의 굵직한 거목이다. 일찍부터 외교관의 길을 걸었고 일생의 태반을 타국에서 보냈는데, 가장 오랫동안 체류한 나라는 1895년 첫발을 내디딘 중국이었다. 간간이 고국을 오가며 15년가량을 중국 땅에서 물을 마시고 숨을 쉬었으니 중국통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중국이란 이질적 문명을 직접 보고 느끼며 구체적으로 사유한 시인이다. 그러니 이 나라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보들레르와 그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에게 중국은 상상을 부추기고 욕망을 투사하는 머나먼 미지의 땅이 아니다.


폴 클로델(Paul Clau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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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 발표한 『동양의 인식』에는 클로델이 만난 중국의 모습이 깊숙이 배어 있다. 중국의 경관, 탑이나 정원, 사찰과 같은 건축물, 관습과 문화 등이 다채롭게 시적 관찰과 명상의 소재로 등장한다. 그 중에 한자를 화두로 삼아 집필한 「기호의 종교」라는 시편이 있는데, 이렇게 시작된다. “줄지어 늘어선 한자들 속에서 염소의 머리라든가, 손이나 인간의 다리라든가, 나무 뒤에서 떠오르는 해의 모습 따위를 발견하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나는 그 속에서 더욱 복잡하게 뒤얽힌 실타래를 풀어보고자 한다.” 이어서 기호에 대한 시인의 명상이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모든 문자는 선이나 획으로 이루어진 기호이다. 기호를 구성하는 선에는 크게 수평선, 수직선, 사선이 있는데, 수평선은 자기충족적인 안정성과 부동성(不動性)을 상징하고, 수직선은 “인간과 나무처럼” 행위와 자기주장을 표명하고, 사선은 움직임과 방향을 나타낸다. 선의 시니피앙(記標)에 이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물론 그의 시적 직관과 상상력이다. 그리고 선에 대한 이런 전제 또는 해석은 알파벳과 한자를 비교하기 위해서이다.

 

“로마자의 원칙은 수직선이었고, 한자의 핵심적 특징은 수평선인 것 같다.” 알파벳이란 기호는 수직선을 근간으로 하고 한자는 가로획을 중심으로 구성된 기호라는 말이다. 알파벳의 경우는 그렇다 치고 한자의 근간이 가로획인지는 따져 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마 서양문자에 비해 중국문자가 상대적으로 가로획이 많고 훨씬 안정적인 모습을 띠고 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클로델은 선뿐만 아니라 글자의 차원에서도 알파벳의 동태성(動態性)과 한자의 정태성(靜態性)을 대비하고 강조한다. 서양의 “단어는 철자의 연속적 배열을 통해 존재하는 반면, 한자는 획들의 균형과 조화를 통해 존재한다.” 철자가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단어, 더 나아가 문장을 구성하는 서양의 표기방식은 시간과 함께 진행되는데, 획(철자)들이 동시에 조화롭게 결합하여 하나의 글자를 형성하는 한자는 시간과 시간에 따른 변화의 개념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한자에서는 “살아 있는 존재처럼” 자신만의 고유한 구조와 형태, 내적 자질과 움직임을 지닌 “어떤 도식화된 존재”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이 문자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 그리하여 완결된, 완결되었으므로 변하지 않고 영원한 존재방식을 표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자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오묘한 뜻과 힘을 내장한 일종의 “우상”과 같은 것이다. 그에 따르면 중국인들이 문자에 대해 거의 종교적인 경건한 태도를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시인은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중국인들이 한자가 적힌 보잘것없는 종이조차 예의를 갖춰 소각한다는 말을 덧붙인다. 부적이나 제문(祭文), 서예 등을 통해 나타나는 문자에 대한 중국인의 믿음과 존경심은 사실 유별나게 각별한 것 같다. 문자의 신통력을 이렇게 신뢰하고, 문자의 ‘인격’을 이렇게 귀히 여기며 예술의 경지로까지 승화시킨 문화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말할 나위 없이 이 모든 것은 한 서방시인이 한자를 두고 펼친 시적 몽상의 이야기다. 언어학자라면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너무도 친숙한 문자라서 별반 느낌이 없지만, 클로델에게는 참으로 이국적이고 기이한 기호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알파벳과 한자의 생김새는 사실 천양지차가 아닌가. 시인은 이 이방의 기호를 그림을 바라보듯 바라보며 그 시니피에(記意)를 시적으로 명상한다. 비문처럼, 기념비처럼 고정되고 안정된 어떤 불변의 세계. 그에 비하면 알파벳의 시니피에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만물유전의 세계에 가깝다. 이러한 해석이 사실에 부합하는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은 뜻에 매몰돼 형태를 보지 못하니, 문자를 추상화처럼 바라보며 선과 점, 선과 점이 만들어내는 구도의 의미를 몽상하는 것은 시인의 특권이 아닌가.

 

의미뿐 아니라 소리까지 언어의 모든 것에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이 시인이다. 그러나 말을 표기하는 문자의 형태에 대해서까지 시인의 감수성이 섬세해진 것은 서구의 경우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서적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는 19세기에 시의 소비방식이 큰 폭으로 바뀐다. 읊고 듣는 행위에서 읽는 행위로 급속도로 전환하면서, 시에 있어 활자의 중요성 또는 문자에 대한 민감성이 비례하여 증가한다. 시를 묵독하면 소리의 위상은 축소되고 소리의 그릇인 문자의 비중이 커지기 마련이다. 이와 함께 언어의 조형적 측면이 시적 표현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서 새롭게 조명을 받는데, 클로델의 민감성도 이런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가 문자의 시적 (또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깊숙이 성찰하는 결정적 계기는 무엇보다 한자의 발견이었다.

 

사물의 실체와 세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시 속에 담고 싶어 하는 시인들이 있다. 이들에게 한자는 더없이 매력적인 문자일 것이다. 추상적인 개념과 기호로 이루어진 언어에는 지금 내 앞에 현존하는 구체적인 사물(또는 세계)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예컨대 알파벳은 숫자만큼 추상적이다. 시인은 화가처럼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세계를 표현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개념을 통해 굴절되고 기호를 통해 간접화된다. 그래서 르베르디 같은 프랑스 현대시인은 화가의 처지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자는 어떤가? 나무를 뜻하는 프랑스어 arbre란 기호에는 나무와 관계되는 어떤 요소도 없지만, 동일한 의미의 한자 木에는 나무의 모습이 아직 남아 있다. 적어도 사물의 자취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기호의 세계와 사물의 세계를 연결하고 있다.

 

앞서 거론한 「기호의 종교」에서 클로델은 한자의 상형적(象形的) 성격을 짐짓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이 표의문자를 일반적 차원에서 추상적 기호로 다루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자의 형태에 이토록 민감한 시인이 어떻게 한자의 상형성(象形性)에 매료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알파벳 또한 서양의 표의문자일 수 있다며 한자의 본을 따라 기발하고 엉뚱한(?) 상상을 펼치기까지 했다. <toit>는 프랑스어로 지붕을 의미하는 단어다. 클로델은 이 단어가 두 개의 굴뚝까지 달린 (굴뚝이라고 본 <t>가 두 개 있다) “집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이유인즉, 두 굴뚝(t) 사이에 있는 <O>와 <I>는 각각 보존을 의미하는 여자(아내)와 힘을 상징하는 남자(남편)를 표현하고, 더 나아가 <i> 위의 점은 벽난로에서 나는 연기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나만 더 소개하면, 눈(目)을 의미하는 <œil>의 <œ>는 “동공과 옆에서 본 눈꺼풀을 갖춘 눈 자체”의 모습이고, <i>는 대상을 “겨냥하는 눈빛”이며, <l>은 눈이 “던지고 또 눈으로 되돌아오는 시선”이라고 한다. 좋게 말하면 시인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이고, 따갑게 말하면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그러나 클로델이 “서양의 표의문자”라고 부른 이런 형태적 유희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한자가 그에게 행사한 자극과 매력이다. 그런데 이러한 영향력은 클로델에 국한되지 않는다. 물론 소수이지만, 한자는 현대 서양시인들이 알파벳 더 나아가 서양 시의 시각적 형태를 더욱 민감하게 감지하고 성찰하는 데 의미 있는 자극제가 되었다.


사물의 흔적이 그나마 보존되어 있는, 다시 말해 가장 덜 기호화(추상화)된 문자. 여기서 나온 의미의 조각들이 수많은 방식으로 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대한 체계. 이런 점에서 한자는 시와 가장 가까운 문자가 아닐까 싶다. 메마른 기호인 알파벳에만 익숙한 서양시인이 한자를 발견했을 때 느끼는 경이로움을 이해할 만하다. 사실 이 동양의 표의문자 속에는 한 문화권의 진수가 형태적으로 녹아 있다. 알파벳이나 다른 표음문자처럼 다른 기호로 대체할 수 없는 한자는 일반적인 기호체계를 넘어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문화이다. 문자 안에 한 문화의 창조력을 이처럼 깊이 시각적/체계적으로 각인시켜 놓은 경우는 달리 찾을 수 없다. 인류가 이런 문자체계를 만들어 간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불가사의한 일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서 상석을 차지해도 마땅할 것 같다. 위대한 문자의 주인으로서 중국인은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김용민 _ 인천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50303&cid=41762&categoryId=41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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