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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3월호
연구성과 소개(1) _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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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만주 건국대학의 교육과 조선인 학생, 만주연구22, 225-255쪽, 2016.12.

      

본고는 만주 건국대학’(이하 건국대학)의 교육이 이 대학에 입학한 조선인 학생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를 통해 건국대학의 교육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건국대학은 19385월 제1기 신입생이 입학했지만 일본의 패전으로 19458월 폐교된 만주국 新京(長春)에 존재했던 대학이다. 건국대학은 73개월의 단명으로 끝났지만 일본 관동군이 만주국의 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해 만든 최고학부의 국립대학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만주국 통치와 관련,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또한 건국대학은 五族協和王道樂土를 건학 이념으로 신입생을 일본인, 중국인(한족, 만주족, 대만인), 조선인, 백계러시아인, 몽고인의 五族의 수재를 선발했는데 이 대학에 입학한 조선인 학생은 후술하겠지만 약 90여명으로 전체 입학생의 약7%에 달했다.


건국대학에 재학 혹은 졸업한 조선인 학생 가운데 약 50명은 해방 후 한국에 귀국, 한국의 초기 국가 건설에 참가했다. 특히, 초기 한국군 창설과 발전에 있어 그들의 역할은 매우 컸다. 대표적인 인사로 건국대학 신3기 출신의 강영훈은 육군사관학교 교장(중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며, 같은 신3기 출신의 민기식은 육군참모총장과 국회의원을 지냈다. 정진환(3)은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여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을 지냈으며 박중윤(3)은 육군대학 교장(소장)을 지냈다. 안광호(1)는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여 튀니지 대사를 역임했으며, 방희(3)는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후 주일공사, 주영공사, 스웨덴 대사를 역임했다. 학계에서는 동완(2) 전 고려대 교수가 한국의 노어노문학을 개척했으며 진원중 전 서울대 교수는 한국 교육학의 초석을 쌓은 인물이다. 경제계에서는 한홍수(3)가 한일은행장을 역임하고 김영록(2)은 재무부 이재국장, 사상계의 편집위원, 한국마이콤사장으로 활동했다. 조선인 학생은 한국 현대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고에서 주로 활용한 자료는 일본, 대만, 중국의 동창생이 발생한 문집과 1966년 설립된 滿洲建國大學在韓同窓會1986년과 19882차례 발행한 歡喜嶺: 滿洲建國大學在韓同窓文集이다. 재한동창회 문집은 21명의 동문이 건국대학 재학 시절의 회고와 해방 이후의 활동에 대한 수기를 게재하고 있어 당시 건국대학 교육에 대한 조선인학생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건국대학 19435기생으로 입학한 김재진을 수차례에 걸쳐 인터뷰하여 문집에 드러나지 않는 건국대학의 교육과 조선인학생의 활동 내용을 참고로 했다.


본고의 검토 결과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다음과 같다. 건국대학에 입학하여 재학한 조선인학생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90명을 넘었으며 전체 학생 수의 약 7%를 차지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만주국의 인구 구성으로 볼 때 중국인(한족, 만주족)이 전체의 9할 이상을 차지했기 때문에 건국대학은 중국인이 대다수를 차지해야 했지만 37%에 불과했고, 전체 인구의 1.9%에 불과한 일본인이 학생 전체의 47%를 차지한 것은 건국대학이 일본의 식민지대학이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같은 일본의 식민지대학인 경성제국대학과 대북제국대학의 일본인 학생의 비중이 각각 66%85%였던 것과 비교하면 건국대학은 그보다 훨씬 낮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두 민족 이외의 조선인, 몽고인, 백계러시아인, 대만인 학생을 모두 합한 비중이 전체 학생의 17%를 차지하기 때문에 그 비중만큼 건국대학의 일본인학생 비중이 두 제국대학에 비해 낮았다고 할 수 있다. 학생 구성만을 놓고 보면 건국대학은 중국인과 일본인 이외의 타 민족의 학생 선발에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의도가 일본의 만주국 통치를 보다 철저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조선인학생이 건국대학을 지원한 이유는 경제적 요인이 가장 컸다. 건국대학은 학비가 무료이고 생활을 했기 때문에 생활비가 거의 들지 않았다. 여기에다 졸업과 동시에 만주국의 고급 관료가 보장되는 특전이 부여되었다. 이 두 가지는 조선인학생 뿐 아니라 일본인, 중국인 등 타 민족 학생이 건국대학을 지원한 주요한 동기였다. 이외의 조선인학생의 지원 동기는 모교의 교사와 건국대 선배의 영향, 최남선의 건국대 재직, 일본인과 공평하게 경쟁할 수 없는 조선을 떠나고 싶은 마음 등이 작용했다

  

건국대학의 학과 교육은 크게 정신훈련과 각종 훈련, 어학교육, 일반과목 교육의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었으며 할애된 강의시간은 세 부분이 거의 균등하게 배분되어 되어 있었다. 당시 제국대학에 비교하면 정신훈련 및 각종 훈련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았고, 어학교육 시간도 상대적으로 많은 반면, 일반과목 교육 시간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조선인학생은 정신훈련 및 각종 훈련 교육, 그리고 어학교육에 대해 높은 만족도를 보인 반면, 일반과목 교육은 배당 시간이 적어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조선인학생은 1944년부터 특별지원병,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간부후보생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한 자가 많았다. 조선인학생이 해방 이후 한국군의 창설에 기여하고 육군의 핵심적인 장성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건국대학 재학 시절 강도 높은 군사훈련과 무도훈련을 받은 것이 큰 도움이 됐다는 증언이 많았다. 또한 조선인학생은 에서 타 민족 학생과 공동생활을 하면서 민족의식을 깨달았다.


한편, 조선인학생은 학교생활 중 타 민족 학생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중국인학생과 같은 항일활동에 참가했는지, 그리고 최남선 교수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논문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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