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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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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호
잊을 수 없는 ‘배급표증 시대’ _ 류정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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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중국 정부는 계획 공급제도를 실행하기 위해 도시주민에게 양곡, 포목 등을 교환 가능한 배급표증를 발급하는 방식으로 생필품을 공급했다. 이 시기는 흔히 '배급표증 시대'로 기억된다.

 

1. 다양한 배급표들

40년 동안 지속된 배급표증 시대에는, 몇 푼 안 되는 성냥부터 수백 위안에 달하는 텔레비전과 냉장고까지 거의 모든 상품을 배급표증으로 구매해야 했다. 특히 식료품 분야에는 양곡표, 기름표, 육류표, 달걀표, 설탕표, 채소구매증, 양곡구매증 등과 같은 매우 다양한 배급표증 종류가 존재했으며, 이는 크게 구매증과 배급표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져 있었다. 구매증은 가족 단위로 발급되는 증서로서 주소, 구성원 현황, 구매 가능한 식료품의 종류와 수량 등과 같은 세부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사진 1 참조). 배급표는 지폐와 유사한 인쇄물로서,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으며 식품의 종류, 수량, 사용 지역, 유효기간이 표시되어 있다(사진 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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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1976년 톈진시(天津市)에서 사용된 구매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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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1961년 시안시(西安市)의 춘절 배급표


일반적으로 주민들은 현금과 알맞은 종류의 배급표증을 지참하여 양곡 판매점과 식료품 매점에 직접 방문해야만 양곡과 식료품을 구매할 수 있다양곡 판매점은 밀가루옥수수 가루각종 콩찐빵국수 등과 같은 곡물 및 곡물 가공품을 공급했다또한 양곡 판매점은 배급표의 발급 및 관리를 담당하며 매년 12월 말에 해당 지역 주민에게 다음 해의 식량 배급표를 발급했다식료품 매점은 곡물 및 곡물 가공품 이외의 식료품 공급을 담당하며공급되는 식료품의 종류는 상점의 규모에 따라 상이했다(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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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베이징시(北京市) 자오부거리(赵府街)의 한 식료품 매점의 모습1)

 

2. 줄 서기, 물물교환 및 사재기

양곡 판매점과 식료품 매점은 국영 기업이며 지역 내 수백, 수천 가구의 유일한 식량 조달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들 점포에서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의 종류와 수량이 제한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고객이 직접 상품을 고를 수도 없었다. 따라서 시민들은 일상적인 식생활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야만 했다.



가장 흔한 수단 중 하나는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줄서기에 대해 톈진(天津)에서 생활하던 S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는 채소 공급량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매일 장을 보러 다녀야 했죠. 식료품 매점에서 오후 330분에 야채를 팔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오후 3시부터 줄을 서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학교가 끝나면 책가방을 내려놓고 식료품 매점에 가서 줄을 섰습니다. 어렸을 때 어른들 대신 줄을 서는 것은 흔한 일이었죠. 작은 간이 의자 두 개씩 가져가서 이웃 사람을 도와 대신 줄을 서곤 했는데, 그때는 줄을 서다가 짜증이 나서 서로 다투는 일도 많이 벌어졌어요."



이처럼 식료품을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서는 장면은 당시에는 흔한 풍경이었으며 삶의 일부분이었다. 특히 춘절(春节, )에는 명절 때에만 구할 수 있는 닭이나 오리 등 차례상에 올려야 할 특별한 식자재를 구입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줄을 서야 했다.



물물교환과 뒷거래도 주민들이 흔히 사용하는 수단이었다. 시민들은 남는 음식이나 생활용품, 배급표증 등을 친구나 친척과 교환하였으며, 돼지갈비나 신선한 활어 같은 더 좋은 품질의 식재료를 뒷거래할 수 있도록 식료품 매점의 점원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애를 많이 썼다.



또한 계절적 식량 공급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채소를 대량 비축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이들을 보관했다. 예를 들어, 중국 북부에서는 겨울철에 신선한 채소가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11월 초에 배추가 나오면 주민들은 수백 또는 수천 근(, 중국에서 1=500g)의 배추를 구입하여 잠깐 말린 뒤에 이를 산더미처럼 쌓아 저장했다. 이렇게 "겨울철 배추"라는 민간 풍습이 형성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무, 당근과 같은 뿌리채소를 항아리에 넣어 염장하거나 입추 전후에 수안차이(酸菜) 혹은 쉐리홍(雪里蕻) 등과 같은 절인 음식을 만들어 채소 공급 부족에 대비했다2).

 

3. 식습관과 소비이념의 재구성

양곡 판매점과 식료품 매점 중심의 공급 시스템은 음식 소비에 대한 도시민의 자유를 크게 제한하고, 식습관과 소비이념 재구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식자재의 종류와 수량이 제한되면서 도시주민의 식단 구조는 상대적으로 단일화·동질화되어 곡물류와 제철 채소 위주의 식단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 결과, 오랜 기간 유지된 식습관이 도시주민의 미각에 대한 기억이나 소비인식을 형성시켰고, 가족 단위 내 음식과 관련된 실천은 이를 바탕으로 반복되어 왔다. 예를 들어, 많은 노인들은 "요즘 채소는 예전만큼 맛이 없다. 특히 토마토와 양배추는 예전의 맛이 안 난다"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들 중의 절대다수는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된 채소를 즐겨 먹지 않는다. "비닐하우스에 재배된 채소를 먹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다. 가능한 한 적게 먹고 제철 채소를 더 많이 섭취해야 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국가 공급 시스템의 제약을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물물교환, 뒷거래, 생필품 사재기, 그리고 염장과 같은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야만 했다. 이러한 수단들은 은연중에 그들의 생활경험과 사고방식에 내면화되었다. 따라서 물자가 부족할 때마다 사람들은 유사한 대처방식을 채택했다. 예를 들어, 코로나 대유행 시기 사람들은 장기간의 록다운에 대처하기 위해 고기, 달걀, 우유와 같은 신선한 식품을 대량 사재기하고 전통적인 절임 또는 건조 방법을 사용하여 야채를 장기간 보관했다. 아울러 이웃 간 물물교환을 통해 통조림, 분유, 화장지 등과 같은 식료품과 생필품을 서로 받아주기도 했다.



'배급표증 시대'는 중국 현대사에서 특수하고 중요한 시기로서, 중국인의 일상적인 식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를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과 대응 전략은 이들의 식습관과 소비이념을 재구성했으며, 현재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도 여전히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류정위 _ 일본국립민족학 박물관 연구원



                                                           

해당 글은 중국학술원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1) 이상 모든 사진은 저자가 제공함.

2) 배급표증 시대 도시주민의 채소 보관 방법에 대한 연구는 졸고 참조: 刘征宇, “毛泽东时代下的食物供应与日常生活以天津城市居民的蔬菜消费为例河合洋尚刘征宇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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