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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갯벌로에서
5월호
대만 문제의 “오래된 미래”_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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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라이칭더 제16대 대만 총통

  

새로운 총통, 오래된 문제

  

오는 2024520일부터 라이칭더(賴清德) 대만 총통의 임기가 시작된다. 지난 1월의 대만 총통 선거는 전문가들의 관측대로 민진당의 승리로 끝났으나, 입법위원(한국의 국회의원) 의석에서는 전체 113석 중 국민당 계열의 범람연맹(泛藍聯盟)54석을 차지하면서 51석의 민진당의 범록연맹(泛綠聯盟)과 민중당(8)에 우위를 차지함에 따라 향후 대만 정국은 여러 가지 내부 변수를 안고 가게 되었다. 그리고 413일 대만 지방 보궐선거에서는 타이중, 먀오리 등 선거구 6곳 중 5곳이 국민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라이칭더 총통 임기의 첫 단추는 내부 문제부터 정리하는 것에 달렸다.

   

그리고 현재 대만 문제와 관련한 중요한 외부 변수는 올해 115일에 시행 예정인 미국의 대선이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선 주자 중 차기 정권을 어느 당이 이끄는지에 따라 대만 문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다. 다만 최근 트럼프 행정부와 바이든 행정부는 다른 뉘앙스와 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 대만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는 점과 일본 또한 항상 대만과의 우호 관계를 강조하고 연대를 강화하고 있는 상황은 하나의 중국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중국에 긍정적인 미래만을 약속하지 않을 것이다.

   

대만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적 맥락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2014년 라이칭더가 타이난 시장으로 재임하고 있을 당시, 중국 상해를 방문하면서 대만 문제에 대해 아래와 같은 발언을 한 적 있다.

   

중국은 먼저 대만 독립(台獨)과 민진당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역사적 궤적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안(兩岸)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공통점을 찾아 나가야 하며, 이해·공감·양해·화해를 통한 양안 인민의 공존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대만 문제의 역사적 맥락과 논쟁

   

대만과 양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의 역사적 맥락을 우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당시 라이칭더가 한 발언의 이면에는 역사적 맥락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중국이 이전 방식과 원칙만을 고수한다면 대만 독립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못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대만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및 대() 중국 전략에 있어 중요한 지역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1943년 카이로에 모인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은 일본의 패전을 대비하여 식민지 등 일본의 영토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기본 방침을 논의한 바 있다. 한국의 독립과도 관련이 있는 이 회담에서 삼국 수뇌는 대만(Formosa)과 팽호 열도(The Pescadores)중국(China)”에 반환할 것을 명시했다.

   

이후 일본이 패전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국민당이 대만의 주권을 주장하는 유일한 정부가 되는 듯 했다. 그러나 대만을 중국(China)”에 반환한다는 선언은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국민당을 대륙에서 밀어내고, 카이로 선언을 미국이 이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됨에 따라 대만의 주권과 국제 지위 문제는 기나긴 논쟁 속에 빠져들게 되었다.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까지 미국은 전후 일본 식민지의 처리 과정과 대만의 주권에 대한 문제를 두고, 대만의 적화(赤化)를 막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고심했다.

   

중국의 공산화 직후 대만 문제에 대한 미국의 해결안은 결국 카이로 선언의 원칙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실제 카이로 회담에서는 미국, 영국, 중화민국의 수뇌만 참여했기에 연합국이 모인 회의를 통해 대만의 귀속 여부와 같은 문제를 분명히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근거가 부족했다. 미국은 다른 어느 국가보다도 더 중화인민공화국이 티토화(Titoization) 되어 동아시아의 유고슬라비아로 남길 원했다. 또한 대만에 대해서는 케넌 등이 주장한 주민 자결주의(Resident Self-determination) 원칙에 따라 대만의 독립 정부가 구성되거나, 국민당의 새로운 거점이 되어 공산화되지 않길 원했다. 지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대만의 위치는 중요했으며, 한편으로는 일본의 안보를 위해서도 대만의 공산화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 막을 필요가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180도 달라진 동아시아의 정세 역시 대만 문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제7함대를 대만에 주둔시켜 만일에 대비해 대만에 대한 공산권의 무력 침공을 방지하려 했으나, 이에 중국과 소련은 UN 안보리 회의에서 미국의 대만 침공 의혹을 제기하며 맞섰다. 또한 아시아 각국이 서구 제국주의의 재림에 대한 두려움을 여전히 품고 있었다는 점도 미국이 대만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을 어렵게 만든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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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1947년 백악관에서의 회의.

왼쪽부터 트루먼(Truman) 미 대통령로버트 로벳(Robert M. Lovett), 

조지 캐넌(George F. Kennan), 찰스 볼런(Charles E. Bohlen). 

트루먼과 캐넌의 전후 대만 정책은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1951619, 미국과 영국 양국은 덜레스-모리슨 협정을 통해 중국의 참여 없이 다자간 평화조약 체결을 진행할 것과 일본의 주권과 독립을 회복시킬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 협정에서는 일본이 대만과 팽호 열도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도록 명시했다. 이에 중화민국 측은 다자간 평화조약에 참여를 주장하면서 중화민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에 빠지게 된 것에 대해 항의했다. 그러나 결국 이 조약에는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모두 참여하지 못했다. 당시 미국 정부의 목적은 동아시아에 확고한 반공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일본과의 평화조약을 추진한 것이었으며, 대만 역시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카이로 선언의 원칙을 포기하고 대만의 주권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손으로 넘어가는 상황을 막으려 한 것에 있었다. 미국이 주도한 정책에서 대일 강화조약 역시 일본이 대만과 팽호 열도를 포기한다는 규정만을 명시했을 뿐, 이 지역의 주권이 누구에게 귀속하는 것인지를 명확히 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는 다분했다.

   

문제는 대만과 팽호 열도는 현재 중화민국이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으므로 대만 문제를 국내 문제로 인식하고 접근하려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입장과 관계를 고려했을 때, 대만의 국제적 지위는 특수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즉 당시 카이로 회담에서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될 수 있었으나 동아시아의 적화를 막기 위한 미국의 구상 속에서 대만 문제는 국제적인 사안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국민당 정권의 대만 이동(國府遷臺)과 그 영향으로 인해 대만인의 독립 정부가 대만에 세워지지 못한 점은 같은 해방공간인 한국과 차이점을 만들어 냈다. , 2차 세계대전 전후 냉전 초기의 골짜기 속에서 대만의 주권 귀속과 국제적 지위에 관한 갈등은 오늘날 대만 문제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장개석과 장경국 정권하에서 미국과 대만의 관계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2000년대 이전까지 대만과 미국 양국 간에는 무기 거래와 군사·정치 이슈에 따라 많은 불신이 생기기도 했으나, 필요에 의한 전략적 관계를 수립하면서 현재까지 그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

   

대만 내부 상황과 외교의 관계

   

대만을 둘러싼 문제는 찰스 조이너(Charles Joyner)가 말한 작은 지역의 큰 문제들(Large questions in Small places)”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71대만관계법의 시행 이후, 대만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지원이 이루어지면서 중국의 반발을 사기도 했으며, 또한 최근 20228월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을 통해 대만 문제가 미-중 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공화당과 민주당의 미국 내부 정치와도 관련이 있는 사안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즉 대만 문제는 미국, 중국 등 국가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민감한 현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여기에 대만 내부의 상황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 대만은 중국의 대자(對者)적 존재에서 즉자(卽者)적 존재로 정립되고자 하며, 지금도 국제 사회에서의 지위와 영향력을 제고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80년대 정치 민주화부터 현재 대만의 정치·사회적 분위기는 탈중국화(去中國化)의 지향이 자리를 잡았다. 대만과 중국은 정치·사회뿐만 아니라 역사적 맥락에서도 점점 각자의 길을 가려고 한다. 이전 국민당이 지향했던 반공대륙(反共大陸)과 그 가치관은 지금 대만인들의 구상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이데올로기와 양안 이슈에 더 앞서 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최근 민진당 후보가 연속으로 총통에 당선되어 여당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최근 총통 선거의 입법위원 의석에서 국민당이 다수를 차지한 사례뿐만 아니라 2022년 대만 지방공직인원선거(한국의 지방자치단체선거)에서도 국민당에 우세한 결과가 나온 것을 본다면, 대만인들은 정치권의 구호와는 달리 친미와 친중의 사이에서 극단적인 노선의 채택을 거부하고 현실적인 이해관계와 생존을 선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대만 문제를 분석함에 대만의 내부 사정과 역사적 맥락까지 고려해 대만 문제를 이해할 필요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만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외교적 스탠스를 가져가야 하는 것일까? 사실 대만 문제는 동아시아 지역권 전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대중(臺中) 관계 속에서 적은 리스크를 안으면서 단기적인 실리만을 목적으로 삼는 것만이 과연 옳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전 미국 국무장관 휴즈(Charles E.Hughes, 1862~1948)외교정책이란 추상 위에 건설되는 것이 아니다. 눈앞의 필요에 따라, 혹은 역사적 안목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국가이익의 산물이다라고 했다. 현재 한국이 경계해야 하는 점은 전쟁 발발 여부를 마치 정해 놓고 카운트를 맞추려고 하는 예정설에만 주목하는 상황에 빠지는 것이다. 국제정치뿐만 아니라 전략적 측면에서도 대만은 한국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한국과 대만과의 관계에 있어 지난 식민과 반공의 경험에서만 공통점을 찾으려는 시도는 자칫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인식될 수 있다. 특정 이슈나 유사시의 상황에만 단기적으로 집중하지 말고, 현실적인 측면에서 정보와 지식을 축적하고 대만을 보는 한국만의 관점을 만들어 향후 대외 정책의 기반으로 삼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김봉준 _ 인천대 중국·화교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中時新聞網 https://www.chinatimes.com/realtimenews/20240114002807-260408?chdtv

사진 2. Bettmann/Corbis, via From "George F. Kennan: An American Life," by John Lewis Gaddis. https://www.nytimes.com/2011/11/23/books/george-f-kennan-by-john-lewis-gaddis-review.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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