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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11월호
동남아화교의 교비(僑批) _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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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 송금 네트워크는 그 중요성만큼이나 비교적 일찍부터 많은 주목을 받아왔는데, 교비(僑批) 문서들(편지, 송금 영수증, 봉투 등등)2013년 유네스코 세계 기억 문화유산 아시아 태평양 목록에 선정되면서 더욱 큰 관심을 받고 있다.


남경조약 체결 이후 중국인의 해외 이주의 가장 큰 원인은 경제적으로 빈궁한 교향(僑鄕)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중국인이 가장 많이 이주한 동남아시아의 대농장 및 광산에서 번 돈을 고향의 가족에게 송금하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었다. 가족에게 보내는 것이었으므로 부양자금과 함께 안부를 묻는 편지 역시 동봉하게 되는데, 이러한 자금과 편지가 결합된 형태의 송금을 일반적으로 교비(僑批)라고 부른다.


그림 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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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교비의 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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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민남어(閩南語)로 편지의 뜻이 있다. 화교 송금과 관련되어 자주 사용됐다. 화교가 보내오는 송금과 편지를 합하여 僑批’, ‘批信’, ‘銀信이라 칭하였고, 이 교비를 처리하는 조직 혹은 기업을 僑批局이라고 했다. 그리고 僑批局批信局’, ‘信局’, ‘民信局’, ‘銀信局’, ‘匯兌信局’, ‘批館’, ‘僑批館’, ‘匯兌莊’, ‘僑匯莊으로 불리기도 했다.


초기에는 수객(水客) 및 객두(客頭)와 같은 개인 무역업자 혹은 이민 중개자 등을 통해 송금을 하다가 교비의 대량 증가와 송금 방식의 전문화에 따라 교비국(僑批局), 은신국(銀信局) 등의 이름을 단 대행업체들이 생겨나 교비업계를 형성했다. 화교 노동자의 수가 수백만에 달하자 그에 따른 송금액 역시 천문학적으로 증가하게 되어 교비업 역시 크게 성행했다. 실질적으로 유통되는 자본의 액수로만 따졌을 때, 수백만 화교 노동자의 송금은 자본력이 뛰어난 화상(華商)이 본국에 투자하는 액수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규모의 자본이 이동했다.


이 송금의 중요성은 당시 날로 심각해지던 중국의 무역수지적자를 메꾸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광동 및 복건 지역사회의 경제를 지탱하는 주요한 축이었다. 이처럼 교비업을 통한 화교 송금 네트워크는 동남아시아와 중국 화남지역을 잇는 거대한 경제 네트워크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화교의 경우 교향(僑鄕)인 산동성의 가족에게 송금을 했지만 동남아화교와 같은 전문 송금업체인 교비국이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 조선 각 지역에 설치된 전장(錢莊)을 이용한 송금이 일반적이었으며 중일전쟁 시기는 우체국을 통한 송금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동남아화교의 송금 시스템은 조선화교와 다른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수객(水客) 및 객두(客頭)의 중개인을 통한 송금의 절차는 비교적 간단했다. 송금을 위한 연락용의 통신수단으로 봉투에 수취인의 주소, 수취인 성명, 금액과 송금인성명을 기재했다. 봉투 안에는 송금자에게 답장을 보낼 수 있는 봉투와 답신용 收取證이 동봉되었다.


【세계 화교화인의 역사와 관행 5】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참고문헌

김종호·이정희(2016,논문투고), 왕정위(汪精衛) 남경국민정부 시기 동남아화교 송금 시스템의 변화복건성 민남(閩南)지역 및 광동성 차오샨(潮汕)지역을 중심으로-

鄭林寬著·滿鐵東亞經濟調査局譯(1940), 福建華僑送金, 滿鐵東亞經濟調査局

濱下武志(2013), 華僑·華人中華網, 岩波書店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baike.baidu.com/view/35575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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