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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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1927년 하이퐁(Hải Phòng) 화교배척사건의 발단, 전개, 대응의 제 양상-자료《民國十六年 八一七 越南海防慘殺華僑案紀》를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제158집, 2022.3.31., pp. 327-365.
이 논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하이퐁에서 1927년 발생한 화교배척사건을, ‘중국국민당중앙해외부주월판사처’가 간행한 1차 자료 《民國十六年 八一七越南海防慘殺華僑案紀》를 활용하여 사건의 발단, 전개, 그리고 중국 정부, 하이퐁 화교사회, 베트남인 사회의 대응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베트남에선 이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도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고, 세계 화교학계도 이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상당히 가치 있는 연구성과라 할 수 있다. 분석 결과 새롭게 밝혀낸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이퐁 사건의 발단은 1927년 8월 17일 저녁 화인가의 공중취수장에서 베트남인 부녀자와 화교 부녀자 간에 물 뜨는 과정에서 말싸움으로 시작되어 하이퐁 거주 양 민족 간의 충돌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하이퐁 화교사회와 중국 측은 프랑스 식민당국이 조기 진압을 철저히 하지 않고 방관 및 방조하는 자세를 취해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보았지만, 프랑스 측은 적절한 조치를 했다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하이퐁 화교사회는 하이퐁 사건을 베트남인에 의한 일방적인 화교 폭력 사태로 보았지만, 프랑스 식민당국과 베트남인 사회는 양자의 충돌에 의한 피해 발생으로 보았다. 중국 측 화교 사망자는 12명, 부상자는 88명, 프랑스 식민당국은 사망자 15명, 부상자 60명으로 각각 파악했다. 사망자 15명 가운데 1명은 베트남인이었다. 피해의 정도로 볼 때 화교의 피해가 훨씬 컸던 만큼 이 사건은 베트남인에 의한 일방적 폭력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8월 20일 화인가의 상점과 주택을 소유한 화교 100명이 약탈을 당하고 막대한 재산손실을 입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 한다.
둘째, 하이퐁 사건의 원인(遠因)은 베트남인은 화교가 자신들의 통치자는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자신들의 상위에 자리하고 있고,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고 교향(僑鄕)에 송금하는 화교를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프랑스 식민당국은 화교의 경제력이 프랑스인 자본을 위협하는 것과 중국 및 화교가 베트남인의 독립활동에 영향을 주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베트남인 정치단체와 경제계는 하이퐁 사건 발발 이전 화교의 경제활동에 대항해 ‘북화배척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셋째, 난징국민정부는 주광저우프랑스영사관을 통해 이 사건의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으며, 하이퐁 화교의 교향인 광둥성과 광시성의 지방정부, 중국국민당지부, 각종 사회단체도 화교 보호를 중앙정부와 프랑스영사관에 요청했다. 하지만 이러한 외교적 시도는 프랑스 식민당국이 이 사건을 적절히 처리하여 진압했고, 쌍방이 충돌했다는 관점으로 일관하면서 모두 실패로 끝났다.
넷째, 하이퐁 화교사회는 중국국민당하이퐁지부와 화상회관의 주도로 피해 화교 보호와 피해 조사, 구금 화교 석방운동을 전개했다. 광둥방과 푸젠방의 동향단체는 식민당국과 상하 종속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한편, 베트남인 정치단체는 하이퐁 사건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필요한 중국 및 중국국민당의 협력을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해 중국국민당중앙으로 성명서를 보내 베트남인과 화교의 연대를 강조했다.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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