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라스푸틴이니 ‘진령군’이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엄중한 시기에 한가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면, 어떤 것도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블랙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삶은 오래도록 지속되고 그러한 삶은 하나로 귀결될 수 없는 풍부함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때 누군가는 다른 문제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최후의 외교수단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외교는 말로 하는 전쟁이리라. 전쟁이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무력을 동원하는 것이라면 외교는 협상을 통하여 이익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최고의 국가 이익은 생존과 안전이다. 몇 마디 말로 생존과 안전을 살 수 있다면 그것보다도 더 효율적이고 값싼 거래가 어디에 있을까?
그러한 생각을 한 것은 요즘 사람들뿐만 아니라 과거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요동정벌을 강행한 최영 장군의 높은 기개는 가히 존경할만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폄하되어서도 안 될 일이다. 병사들과 백성들을 전쟁의 참화로부터 구해내기 위한 냉정한 현실적 판단과 고뇌에 찬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이러한 입장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엿볼 수 있다. 조선을 건국한 후 이성계는 명 태조에게 보낸 표문에는 “황제의 은혜에 감읍한다”, “황제의 강녕을 축원한다”, “억만년이 되어도 조공하겠다” 등등의 구구절절한 표현으로 신속의 예를 다한다. 반면, 『태조실록』 3권(태조 2년 5월 25일)의 기사에는, 명 태조의 폭정과 조선에 대한 강압에 대한 불만과 약소국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다. 이성계의 선택은 태생이 사대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상황에 대한 고려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현실적 고려는 비단 조선이나 주변국의 전유물이 아니라 중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에는 흉노의 선우 묵특(冒頓)이 당시 한나라의 실권자였던 여후(呂后)에게 보낸 편지와 답신이 실려 있다. 묵특은 ‘소리 나는 화살’인 명적(鳴鏑)으로 부하들을 훈련시켜 자신을 태자에서 몰아내려고 하던 아버지 두만(頭曼) 선우를 죽이고 초원을 재패하여 강성한 유목제국을 건설한 바로 그 유목 제왕이다. 여후는 고조 유방(劉邦)의 황후로 유방의 사후 아들 혜제(惠帝)가 즉위했을 때 실질적인 전권을 행사한 여걸이다.
묵특은 여후에게 홀아비인 나도 즐거움이 없고 과부인 당신도 낙이 없으니 서로 합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희롱에 가까운 편지를 보낸다. 여후는 격노하여 흉노의 사신을 죽이고 흉노를 정벌하고자 하여, 승상 진평(陳平)과 번쾌(樊噲), 계포(季布) 등과 상의를 한다. 홍문연(鴻門宴)에서 유방을 구했던 바로 그 번쾌는 병사 10만을 주면 흉노를 쓸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한다. 하지만 계포는 고조(高祖)시기 한나라의 32만 군사가 있었지만 상장군이었던 번쾌가 평성(平城)에 포위된 유방을 구해내지 못했는데 10만으로 쓸어버리겠다고 하는 것은 기만이라고 비판하면서, 금수와 같은 이적(夷狄)이 좋은 말을 한다고 기뻐할 것도 없지만 험한 말을 한다고 노할 것도 없다고 한다.
이에 여후는 계포의 말을 받아들여 묵특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선우께서 변변치 못한 한나라를 잊지 않고 편지를 주시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노쇠해 머리도 빠지고 이도 빠져 나들이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선우께서 잘못 아시고 스스로를 욕되게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 소국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부디 용서해주시고, 제가 사용하는 마차 두 대와 말 여덟 필을 바치겠습니다.” 제국의 실권자가 보냈다고 하기에는 구차하기 짝이 없는 서신이다. 그러나 답신을 받은 묵특은 여후가 보통의 인물이 아님을 알고, 중원의 예절을 몰랐으니 용서해 달라는 답신을 보내고 말을 바쳐 화친을 맺는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봤다고 해야 할까? 묵특 자신도 마찬가지로 일을 처리한 적이 있었다. 묵특이 선우가 된 직후, 당시 강한 세력을 가진 동호(東胡)가 사신을 보내 묵특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선우가 된 것을 힐난하며 두만의 천리마를 달라고 겁박한다. 신하들은 모두 흉노의 보물이라고 반대하였지만 묵특은 개의치 않고 “어찌 말 한 마리로 이웃을 곤란하게 할 수 있겠느냐?”며 내주라고 한다. 그러자 동호는 묵특이 자신들을 두려워하는 줄 알고 선우의 연지(閼氏, 흉노 왕후의 칭호)를 달라고 한다. 이번에도 신하들은 반대하지만, 묵특은 “여자 하나로 어찌 이웃을 곤란하게 할 수 있겠느냐?”며 보내라고 한다. 그러자 더욱 교만해진 동호는 흉노의 땅까지 요구한다. 이번에는 신하들이 내어 주자고 하지만, 묵특은 “땅은 나라의 근본이거늘 어찌 남에게 줄 수 있겠는가?”하고 동호의 사신을 그 자리에서 죽이고 동호를 공격하여 멸망시킨다. 그러했던 묵특은 스스로를 낮추는 여후의 편지에서 오히려 상대의 강함을 읽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전두환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평가할 부분이 있다고 본다. 박철언의 회고록에 따르면, 전두환은 김일성에게 보내는 친서에 “주석님께서는 광복 후 오늘날까지 40년에 걸쳐 조국과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모든 충정을 바쳐 이 땅의 평화 정착을 위해 애쓰신 데 대해, 이념과 체제를 떠나 한민족의 동지적 차원에서 경의를 표해 마지않는다”는 문구를 넣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박철언의 의견에 따라 친서에는 그 표현을 넣지 않았지만 대담시에 구두로 표현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대화가 그것을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을 극대화하는 목적이라면, 대화를 결정한 이상 상대에게 듣기 좋은 소리 몇 마디쯤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냉전시기 전장에서 맞섰던 전두환뿐만 아니라 2000여년 이전의 여후는 물론 ‘야만’의 흉노 수장도 알았던 것을 21세기가 되어서도 깨닫지 못하고, 사소한 빌미를 침소봉대하여 ‘종북’이나 ‘종복’이니 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현대 중국의 경험을 비추어 보면, 몇 마디 말을 이유로 ‘우파’, ‘우경’, ‘간첩’, ‘배신자’와 같은 ‘모자 씌우기(戴帽子)’나 “애국이냐 매국이냐”와 같은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냉전과 문혁과 같은 ‘극단의 시대’의 산물이자 ‘소수의 음모가’들의 권력 탈취를 위한 기획의 결과에 다름 아니었다.
타이완과 대륙은 우리보다 늦게 대화를 시작했지만, 지금은 서로 자유롭게 왕래할 뿐만 아니라 대륙의 농촌마을에서는 국민당 장군들의 사진을 자랑스러운 선조로 마을 앞에 진열하여 기념하고 있다. 그에 비해 21세기도 10년을 훌쩍 넘긴 현재까지도 여전히 냉전의 섬에 갇혀, 현실적 이해나 일의 실제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오간 몇 마디 말을 이유로 문혁시기에나 있었을 법한 극단의 언어로 서로를 규정하고 상처를 주는 우리의 모습이 대비되어 서글픔을 금할 수 없다.
안치영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 / 중국학술원 중국자료센터장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blog.naver.com/battlcar?Redirect=Log&logNo=5017817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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