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인천시 중구 중앙동 1가 18번지(인천 중구 신포로 23번길 101) 에는 현재 대불호텔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전시관의 이름이 싱징하듯 원래 이 자리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인정받고 있는 대불호텔이 자리해 있었다. 하지만 대불호텔은 경인철도 개통 후 수요 감소로 문을 닫았고, 중화루 중화요리점으로서 다시 문을 열어 1970년대 초반까지 영업을 계속하다, 1978년에 해체되었다. 대불호텔 건물은 호텔로서의 역사보다 중화요리점으로서의 역사가 보다 길었다.
사진 1. 중화루의 사각 간판과 삼각 간판
중화루는 인천의 근‧현대 중화요리점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공화춘보다도 규모가 더 큰 인천 최대의 중화요리점이었다. 공화춘과 관련해서는 그 자리에 짜장면박물관이 들어서면서 공화춘의 존재가 대외적으로 비교적 많이 알려지게 되었지만, 대불호텔 건물의 역사성에다 규모와 역사를 자랑하는 중화루 중화요리점인데도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다.
필자는 각종 자료를 활용하여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중화루의 역사를 새로 발굴한 논문을 발표했다(이정희(2021.12)).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새로 밝혀진 역사를 연재하고자 한다. 대불호텔은 호텔로서 문을 닫은 시기가 선행연구에서 1907년경으로 알려져 왔지만, 이번의 검토로 오사카부 사카이시 소재 다쿠합명회사의 인천지점이 1906년 7월에 대불호텔 건물에 입주한 것을 근거로 볼 때 1906년 7월 혹은 그 이전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 회사는 청주 판매회사였다. 대불호텔의 주인 호리 리키타로는 대불호텔의 영업이 어려워지자 건물을 다쿠합명회사의 인천지점에 대여한 것이다.
대불호텔 건물이 중화루 중화요리점으로 바뀐 것은 일본인이 쓴 『인천부사』에 “다이쇼7‧8년(필자: 1918‧1919년)경부터 중화민국인에 의해 지나요리점이 개업하여 이상하게도 인기를 끌었다.”고 기재되어 있어, 이를 근거로 중화루가 1918년 혹은 1919년에 대불호텔 건축물에서 영업을 시작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하지만, 인천화상상회(仁川華商商會)가 1935년 3월 인천화교 상황(商況)을 정리하여 보고한 보고서 가운데, ‘화상 각 업체의 영업 자본 개설 연도표(華商各行牌各營業資本開設年度表)’를 보면 1935년 3월 기준으로 ‘개설 19년’으로 나와 있어 1915년에 개설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구청 발행의 토지대장에 의하면, 1922년 9월 12일 대불호텔의 대지는 호리 리키타로에서 뇌문조(賴文藻)로 변경되어 기재되어 있다. 호리 리키타로가 뇌문조에게 대지와 건물을 매각한 것이다. 뇌문조는 중화루의 경영자, 산둥성(山東省) 출신의 인천화교였다. 그의 손자인 뇌성옥(賴聲玉)에 의하면 뇌소정(賴紹晶)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었고, 1872년 푸산현(福山縣)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뇌문조는 중화루의 제1대 경영자였다. 그렇다고 해서 중화루가 그 개인의 소유는 아니었다. 1912년에 개업한 공화춘은 제1대 경영자가 우희광(于希光)이었지만, 인천의 화교와 화상이 자본가로 참가하여 합과(合夥, 합자) 방식으로 설립되었다.
당시 인천화교를 비롯한 조선화교 경영의 주단포목상점과 각종 상점 및 요리점‧음식점은 대부분 중국 전통의 합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중화루도 뇌문조가 주주로 참가했을 것이다. 합과는 투자액에 상응하여 영업이익을 배분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1935년 중화루의 자본액은 1.6만원으로 공화춘의 5천원, 동흥루의 6천원보다 2-3배나 많았다. 중화루에 주주로 참가한 자본주가 공화춘과 동흥루보다 더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
사진 2. 편액 ‘把酒臨風(파주임풍)’
그런데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중화루의 편액과 간판은 대부분 1922년에 제작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먼저 중화루의 간판을 보도록 하자. ‘중화루(中華樓)’라고 쓰인 간판은 원래 2개였다. 하나는 ‘중화루 화기(中華樓 和記)’라 적힌 간판이었다. 당시 화교 경영의 상점과 중화요리점은 상호 뒤에 ‘화기(和記)’, ‘보호(寶號)’가 붙어 있었다. 주권(株券) 등에 기재된 공식 명칭은 ‘중화루’라 적지 않고, ‘중화루 화기’라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 간판의 행방을 모른다.
또 하나의 간판은 중화루 입구 현관에 걸려 있던 것인데,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이 이 간판을 소장하고 있다. 직사각형 나무판에 붓글씨로 ‘중화루(中華樓)’라 쓴 간판이다. 정면에서 볼 때, 간판 왼쪽 하단에 ‘부배동(傅培桐)’이라 쓰여 있고 그 밑에 부배동의 인장이 그려져 있고, 간판 오른쪽에는 ‘임술 중춘(壬戌 仲春)’이라 쓰여 있다. 임술은 임술(壬戌)년을 말하는 것으로 중화루 설립을 고려하면 임술년은 1922년이 된다. 중춘(仲春)은 음력 2월을 뜻한다.
편액 2점도 1922년 음력 2월에 기증된 것이었다. 먼저 ‘파주음풍(把酒淫風)’ 편액은 왕정증(王鼎曾)이 쓴 것으로 간판 오른쪽에 중화루 간판과 같이 ‘임술 중춘(壬戌 仲春)’이라 쓰여 있다. 이 편액의 제작 연대도 1922년 음력 2월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하나의 편액인 ‘춘광화애(春光和靄)’는 ‘부배동(傅培桐)’이라는 인물이 쓴 글씨로 똑같이 ‘임술 중춘(壬戌 仲春)’이 적혀있기 때문에 역시 1922년 음력 2월에 기증된 것이다.
중화루 간판과 편액 2점 모두 1922년 음력 2월에 기증되었다는 것은 이때 특별한 행사나 일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1915년 대불호텔 건물을 빌어 뇌문조가 중심이 되어 중화루를 개업했고, 1922년에는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로부터 토지와 건물을 매입한 사실을 고려하면, 1922년 음력 2월 봄에 중화루를 신장개업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인천화교의 입장에서 인천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을 일본인으로부터 매입하여 중화루 중화요리점을 신장개업한 것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중국인 부배동과 왕정증이 편액을 기증한 것은 이러한 신장개업을 축하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뇌문조가 1915년 대불호텔 건물을 세내어 중화루를 시작했지만, 불과 7년 만에 그 건물과 대지를 매입할 수 있었던 것은 중화루의 영업이 매우 순조로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천의 일본사회도 “이상하게도 인기를 끌었다. 인천의 중화루로서 경성 인사들에게도 그 존재를 인정받았다.”라고 표현한 것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 20】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참고문헌
이정희(2021.12), 「근·현대 인천 중화요리점 역사 속의 중화루」, 『2021년도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소장유물 자료집: 중화루의 얼굴-간판』, 인천광역시립박물관, pp. 100-126.
손장원‧조희라(2011), 「대불호텔의 건축사적 고찰」, 『한국디지털건축인테리어학회논문집』11-3, pp. 27-34.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2.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