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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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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호
베트남 호이안 중화회관에 13명 화교 초상화가 걸린 비밀 _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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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발생 이전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베트남의 명소 중 하나가 중부에 위치한 호이 안(會安)이다. 호이안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베트남과 동남아시아 및 동북아시아 간의 무역의 거점으로 발전했던 항구도시였다. 그 영향으로 호이안에는 일본인 거리와 화교 거리가 형성되었다. 19세기 말 호이안의 투본강 토사의 퇴적으로 인해 항만 기능을 상실, 근대도시로 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이 호이안의 근세 역사 유물을 보존하게 하는 긍정적 역할로 작용하여 1999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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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호이안중화회관 내의 벽에 걸린 13명의 베트남중부화교항전열사초상화


이 도시 관광 명소의 중심지는 쩐푸거리이다. 이 거리에는 화교의 동향회관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동쪽에서부터 시작하여 차오저우방(潮州幇)의 차아저우회관, 하이난방(海南幇)의 하이난회관, 푸젠방(福建幇)의 푸젠회관, 광둥방(廣東幇)의 광비회관(廣筆會館), 그리고 중화회관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광둥성 출신의 자잉방(嘉應幇) 만은 인구가 적어 회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가운데 중화회관은 5방 동향단체의 연합조직의 회관이다. 원래는 양상회관(洋商會館)의 명칭으로 1791년에 설립되어 1928년에 개칭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중화회관은 7차례의 중수(重修)를 거쳤고, 1990년대 초반 미국으로 이주한 화인의 기부와 각 동향회관의 기부로 1995년에 8차 중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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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호이안중화회관 건물 


이 중화회관의 정전(正殿)에는 천후성모인 마조의 상이 모셔져 있다. 회관의 정문을 들어서 오른쪽 벽면에 13명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각 초상화 아래에 각자의 약력이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초상화의 맨 위에 越南中圻華僑抗戰烈士遺像‘(월남중기화교항전열사유상)이라 적혀 있다. 여기서 월남중기는 베트남 중부를 뜻하기 때문에 베트남중부화교항전열사초상화란 뜻이 된다. 왜 이 중화회관에 13명의 화교 초상화가 걸려있는 것일까

  

그 연유는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 통치하던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중일전쟁 발발 후 베트남에서 충칭국민정부로 가는 군사 보급물자를 차단하려는 정치적 의도와, 베트남의 풍부한 미곡을 확보하기 위한 경제적 의도로 프랑스가 통치하고 있던 베트남북부를 19409월, 베트남남부를 19417월 각각 군사적으로 점령, 프랑스 식민당국과 공동통치 했다. 이어 일본은 19453월 무력으로 프랑스 식민지정권을 타도하고 베트남인 괴뢰의 쩐총낌 정권을 세워 단독통치에 들어갔다. 이 시기 일본은 항일적인 베트남화교를 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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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중화회관 내의 예의화문중심(禮義華文中心)


일본 점령군의 헌병대가 사이공, 하노이, 하이퐁, , 다낭, 쩌런에 설치되었고, 호이안에도 파견된 헌병이 주둔하고 있었다. 주둔 일본 헌병은 19434월과 1945년 봄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항일 화교 검거에 나섰다. 1943년의 사건은 같은 해 54일 아침 일본군 헌병대가 프랑스 식민당국에 통보도 하지 않고 항일 혐의의 화교 27명을 체포했다. 당시 체포된 화교는 중국국민당직속지부 비서인 리중쉰(李中珣), 호이안객가방장 예추안잉(葉傳英), 호이안하이난방장 판징췐(潘鏡泉), 호이안광둥방장 루오한슈(羅漢書), 중화회관 서기 정간(鄭幹) 등이었다. 이보다 앞선 49일 하노이에 체재하고 있던 호이안차오저우방장 겸 국민당 호이안지부 상무간사를 역임한 쉬원마오(許文茂)는 그곳에서 체포되어, 다낭으로 송환됐다.

 

체포된 화교 가운데 노약하고 혐의가 불충분한 화교 일부는 석방되었다. 하지만 중요 인물인 예추안잉, 판징췐, 루오한슈, 정간은 하노이 소재 헌병대 본부로 송환됐다. 예추안잉은 헌병대에 의해 취조를 받다 고문으로 109일 사망했다. 리중쉰과 쉬원마오는 다낭에서 살해됐다.


그리고 일본군 헌병대는 화교의 밀고를 접수하여 1945년 봄 호이안, 다낭, 후에의 화교 100여명을 항일 혐의로 체포했다. 이 가운데 10명의 화교는 194541일 복상산(福祥山)에서 참수되었다. 살해된 화교는 왕칭송(王靑松), 루오윈정(羅允正), 시에푸강(謝福康), 린지엔중(林建中), 청이쉰(程貽訓), 정옌창(鄭燕昌), 량싱바오(梁星標), 차이리(蔡禮), 린빙헝(林秉衡), 간빙페이(甘秉培)였다. 이 가운데 왕칭송과 시에푸캉은 중국국민당중앙해외부의 베트남 주재 사무소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베트남 중부 항일운동의 중요 인물이었다. 호이안중화회관 내에 걸려 있는 13명의 초상화 속의 인물은 상기의 1943년 사건에서 사망한 3, 1945년 사건으로 사망한 10명이다. 13명의 열사는 현재 호이안 교외의 5방화인 묘지 근처에 있는 청명사(淸明祀)에 모셔져 있다

 

위의 두 사건은 19458월 일본 항복 후 다낭에 진주한 중국국민당군이 일본군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그리고 두 사건을 기록한 越南會安華僑抗日與十三烈士記念書冊(월남회안화교항일과 13인 열사 기념 서책)2005년에 발간되었다



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 11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부교수

 

                                          

  

* 참고문헌


ヴォミンヴ(VO MINH VU), 第二次世界大戰期佛領インドシナにおける日本華僑政策, 東京大學大學院總合文化硏究科博士學位論文, 129-133.

Nguyen, Thi Thanh Ha, ベトナムにおける明鄕家譜社會組織する人類學的硏究: クアンナム·ホイアンの事例から, 廣島大學博士學位論文, 2017.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모두 조진석씨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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