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호찌민(Hồ Chí Minh, 1890-1969)은 베트남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1930년 창당된 베트남 공산당의 설립을 주도한 것도, 1945년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한 것도,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에서 프랑스에 대항하여 승전으로 이끈 것도, 모두 호찌민이었다. 또한 1969년 9월 사망할 때까지 줄곧 국가주석의 자리에 있었다.
사진 1. 호찌민 베트남민주공화국 주석
호찌민은 베트남 공산당의 창당 과정과 건국 과정, 그리고 프랑스와 미국과의 항전에서 가장 중요하게 외교 교섭해야 할, ‘이용’해야 할 대상은 ‘중국’이었다. 호찌민이 1920년대 프랑스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학습과 공산주의 혁명 활동을 위해 소련으로 입국할 때는 화교인 것처럼 꾸미고 여권을 손에 넣었다. 장제스 충칭(重慶) 국민정부와 중국공산당의 지원을 받기 위해 1942년 베트남에서 중국으로 입국할 때는, ‘胡志明’이라는 베트남화교 기명의 통행증을 사용했다. ‘胡志明’을 베트남어로 옮기면 호찌민이 된다. 호찌민의 원래 이름은 응우옌 떧 탄(Nguyễn Tất Thành, 阮必成)이었다가 프랑스에서 공산당 활동을 할 때는 응우옌 아이 꾸옥(阮愛國)이란 가명을 사용했다. 1945년 9월 2일 하노이의 바딘(Ba Đình) 광장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할 때는 호찌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그후에도 계속 이 이름을 사용했다.
베트남민주공화국 성립 직후, 호찌민은 베트남화교에게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베트남 임시정부는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부이며, 우리 국가에 생활하고 있는 10여만 화교의 생활 상황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화교 형제와 베트남 인민은 이전에 함께 의좋게 살았고, 우호적으로 친교를 맺어 서로 무역하고 형제처럼 친했다. 프랑스, 일본에 통치받던 시기에는 함께 착취와 억압의 고통을 당했다. 베트남 인민정부 수립과 동시에 즉각적으로 프랑스가 이전 화교에게 강제하던 각종의 가혹한 법률의 폐지를 선언했으며, 화교의 자유 및 인신·재산의 안전을 기본정책으로 확정했다. 화교와 베트남 인민이 공동으로 새로운 베트남을 건설하는 것을 환영한다. 우리 베트남 인민 임시정부와 전체 베트남 인민을 대표하여 우리 국가에서 생활하는 화교에게 열렬히 환영의 손을 내밀고, 우리 형제 양국의 단결 우호를 희망한다. 어떤 일에 처하면 합법에 의거하여 합리적 원칙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상호 존중하며 참고 양보하며, 작은 분쟁으로 인해 민족 간의 감정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전에 오해 혹은 기쁘지 아니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면 지금 이후 쌍방이 고정관념을 던져 버리고 상호 진정한 우호 합작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호찌민이 이처럼 베트남화교를 상대로 매우 우호적인 메시지를 발표한 배경에는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과 발전에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지지와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을 벌인 직후인, 1946년 12월 28일에는 ‘화교 형제에게 보내는 편지’를 공표했다.
“베트남이 망국한 지 80여 년이 지났다. 화교 형제는 프랑스 식민주의자로부터 여러 종류의 압박을 받았다. 수입허가증이다, 화교거주세다,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조차 없다. 지금 프랑스 식민주의자는 도발하여 전쟁을 일으켜 화교는 살해되었고 거리는 불태워졌다. 또한 토비(土匪)를 사방에 보내 집을 불태우고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약탈했다. ……중월 민족은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 동족으로 수천 년의 우의는 매우 두텁다. 화교 형제와 베트남 인민은 생계를 도모한다는 점에서 하나이며, 인정이 친형제같이 두텁다. 베트남 민족이 힘차게 떨쳐 일어나 항쟁하고 있는데, 화교의 처지도 우리를 더욱 분발하게 하고 있다.”
사진 2. 중국 류저우(柳州)의 호찌민 고거(故居)
호찌민의 이 편지는 화교를 ‘볼모’로 중국에게 지원을 압박하는 복선이 깔려 있다. 즉, 베트남화교가 전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으니 우리를 도와달라는 강한 메시지이다. 사실, 호찌민은 외교적 수완이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프랑스어, 러시아어, 태국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중국어는 베이징 표준어와 광둥어(廣東語)까지도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베트남민주공화국 정부의 초대 국가 주석과 외무부장관 직을 겸임했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재점령하기 위해 일으킨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기간 중 프랑스와 평화 교섭을 벌인 것도, 이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1954년의 제네바협정을 배후에서 총지휘를 한 것도 호찌민이었다. 1960년대 중소 이념 분쟁 시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능수능란하게 펼친 결과, 미국에 항전한 베트남전쟁 때 양국으로부터 모두 원조를 받아낼 수 있었다. 특히, 대약진운동 실패와 문화대혁명으로 중국과 베트남 관계가 소원해진 시기에는 호찌민 자신이 병 요양을 명목으로 베이징, 류저우(柳州), 광저우(廣州) 등지를 몇 차례 방문하여, 마오쩌둥(毛澤東), 저우언라이(朱恩來) 등과 친교를 이어갔다. 이런 호찌민의 ‘탁월한 수완’ 때문인지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과 베트남전쟁 과정에서 직접 참전하고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베트남화교가 적지 않았다.
【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 9】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부교수
* 참고문헌
찰스 펜 지음, 이우희 옮김, 『인간 호치민』, 녹두, 1995.
다니엘 에므리 지음, 성기완 옮김, 『호치민-혁명과 애국의 길에서』, 시공사, 1998.
윌리엄 J. 듀이커 지음, 정영목 옮김,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陳國保, 「戰後國民政府複員越南華僑問題管窺(1946-1948), 『越南硏究』, 2019.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네이버 지식백과
사진 2. 황재경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