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2월호
오정희의 소설 <중국인 거리>와 인천차이나타운 _ 이정희
프린트 복사 페이스북

오정희 작가가 문학잡지 문학과 지성에 단편 <중국인 거리>를 발표한 것은 1979년이었다. 작가 33살 때였다. 작가가 어떤 경위로 <중국인 거리>를 집필하게 됐는지 알려진 것은 없지만, 화교 연구자로서 이 소설을 읽고 매우 놀라웠다. 휴전협정 직후 1950년대 중반 인천차이나타운을, 그곳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는 사람처럼 그 묘사가 너무나 사실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한 편의 소설이라기 보다는 르포르타주(reportage) 같았다.


이 소설 제목인 중국인 거리는 바로 인천차이나타운이다. 인천차이나타운은 1884년 청국조계로 설정된 후, 중국 대륙에서 이주한 상인이 주로 거주했다. 당시의 면적은 5천여평에 불과했지만, 대형 주단포목상점, 잡화상점, 중화요리점 등 크고 작은 가게들이 즐비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한 후인 19143월 청국조계가 철폐된 후, 인천부의 지나정(支那町, 일본어 발음은 시나마치)의 행정구역에 편입되었다. 인천화교의 경제가 가장 왕성했던 1920년대 지나정은 인천의 가장 번화한 거리의 하나였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 화교 경영의 주단포목상점이 쇠퇴하고,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지나정은 점차 활기를 잃어갔다. 중국인은 지나(支那)’라는 단어를 몹시 싫어했다. 원래 영어의 ‘China’에서 나온 것인데, 일본인이 중국을 경멸할 때 지나(支那)’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신해혁명 직후 탄생한 중화민국의 국명 대신에 지나공화국이란 단어를 고집했다. 인천화교는 지나정의 명칭을 인천부에 고쳐달라고 진정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천화교는 지나정 대신에 자체적으로 중국가(中國街)’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인천부도 그들의 집요한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는지, 중일전쟁 전후 시기에 미생정’(彌生町, 일본어 발음은 야요이마치)으로 바꿔 주었다. 하지만 미생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중국 및 중국인과 연고가 없는 그런 지명이었다. 얼마나 인천부 및 일본인이 화교를 무시한 것인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미생정의 명칭이 계속 사용되었고, 해방 직후 선린동으로 변경되었다. 한중 선린 우호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화교 마을의 의미를 잘 담은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요즘 자주 부르고 있는 인천차이나타운1992년 한중 국교 수립 이후 선린동 일대 중국인 거리를 해외의 번화한 차이나타운처럼 발전시키기 위해 행정 측에서 만든 이름이다. 이에 따라 도로명도 차이나타운로로 정해졌다.

 


이정희 1.jpg

사진 1. 19625월의 인천차이나타운 거리 모습

 

작가가 선린동을 중국인 거리로 부른 것은 당시 한국인들이 그렇게 불렀던 것이지, 화교들이 그렇게 부른 것은 아니었다. 화교는 선린동을 청관(淸館)’ 거리라 불렀다. 인천차이나타운의 인천화교학교 운동장 자리에 청국 및 중화민국의 영사관이 1884년 개설되어 1930년까지 존재했다. 1930년 영사관이 철폐된 후, 서울 총영사관의 판사처가 설치되어 해방 직전까지 존재했다. ‘청관이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중국인 거리>의 주인공은 초등학교 여학생이었다. 주인공의 가족은 한국전쟁 때 북한에서 피난 온 실향민이었다. 할머니, 부모, 그리고 다섯 명의 형제, 모두 8명의 대가족이었다. 북한에서 피난 온 주인공 가족은 어느 시골에서 생활하다, 아버지가 중국인 거리소재 석유배급소장의 일을 구해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주인공이 이사해 처음으로 마주친 중국인 거리길의 양켠은 가건물인 상점들을 빼고는 거의 빈터였다. 드문드문 포격에 무너진 건물의 형해가 썩은 이빨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고 묘사됐다.


여기서 포격은 바로 19509월 월미도 해상에서 중국인 거리방향으로 파상공격을 퍼부은 바로 인천상륙작전을 말한다. 인천화교의 인구는 1949년에 5천여 명에 달했다. 일제강점기 때 가장 많을 때도 이 정도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인천이 대() 중국, 홍콩, 마카오 무역의 중심이 되면서 중국인 거리는 대호황을 맞았다. 중국 대륙과 홍콩, 마카오 등지서 온 중국인 무역상인과 국내 각지에서 모여든 한국인 무역상인이 물건이 넘쳐나는 중국인 거리로 쇄도했다. ‘중국인 거리와 신포동 일대는 당시 한국 민간무역의 7할을 독점하던 화교 무역회사와 중국집, 잡화점 등이 즐비했다.


인천상륙작전 때의 포격은 중국인 거리를 강타했다. 현재의 세계미니어처 소방박물관 바로 옆 자리에 서 있던 3층 벽돌건물인 산동동향회관이 파괴되었다. 인천화교의 9할 이상이 산동성 출신이라 동향 출신 화교의 친목 도모와 불우한 동향인을 도와주기 위한 시설이었다. 당시 인천에 3층짜리 건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던 때라 중국인 거리를 상징하는 건물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그 많던 무역 상인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홍콩과 인천을 왕래하던 대형 정기여객선도 뚝 끊겼다. 여기에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인천화교는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생활 기반이 없는 부산, 제주도, 대구 등지로 피난을 갔으니 그 고생은 미뤄 짐작이 간다. 휴전협정이 체결되던 1953년을 전후하여 피난 갔던 화교는 하나, 중국인 거리로 돌아왔다. 전쟁의 피해가 컸고, 어수선한 정국(政局)이라 다시 장사를 시작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주인공이 이사하여 목도한 중국인 거리의 광경은 그러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인 거리>는 차이나타운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을 담아냈다. “전쟁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는 치열했던 함포사격에도 제 모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것은 중국인 거리라고 불리는, 언덕 위의 이층집들과 우리 동네 낡은 적산 가옥들뿐이었다.……시의 정상에서 조망하는 중국인 거리는 검게 그을린 목조 적산 가옥 베란다에 널린 얼룩덜룩한 담요와 레이스의 속옷들은, 이 시의 풍물이었고 그림자였고 불가사의한 미소였으며 천칭의 한쪽 손에 얹혀 한없이 기우는 수은이었다.” , 산동동향회관과 같은 일부 건물은 함포 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다른 건물 피해는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묘사 또한 사실에 가깝다. 작가가 이 작품을 발표한 1979년만 하더라도 일제강점기 중국인 거리의 풍경이 상당 부분 보존되어 있었다.


<중국인 거리>가 소개하는 화교 상점은 두곳이었다. 하나는 푸줏간이었다. “내가 언덕의 내리받이에 이르러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돌아볼 즈음이면 언덕의 초입에 있는 가게의 덧문을 여는 소리가 들여왔다. 일주일에 한 번쯤 돼지고기를 반 근, 혹은 반의 반 근 사러 가는 푸줏간이었다. 푸줏간에서는 한쪽 볼에 여문 밤톨만한 혹이 달리고 그 혹부리에, 상기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꼬드기고 있는 듯 길게 뻗힌 수염을 기른 홀아비 중국인이 고기를 팔았다,” 일제강점기 때도 중국인 거리에는 금성동(錦成東)이라는 푸줏간이 영업을 하고 있었고, 신포시장 일대에는 장적방(張積芳)이라는 화교가 돼지고기를 팔고 있었다. 해방 직후 중국인 거리가 일시적으로 최대의 호황을 누릴 때에는 더 많은 푸줏간이 영업을 했다. 중국인은 소고기보다 돼지고기를 훨씬 좋아하는 민족이다. 당시 소고기는 매우 비쌌기 때문에 한국인도 돼지고기를 주로 사서 먹었다. 북한에서 피난 온 주인공 가족이 화교 푸줏간에서 돼지고기를 사 먹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가게는 잡화점이었다. “단 하나 푸줏간에 잇대어 후추나 흑설탕, 근으로 달아주는 중국차 따위를 파는 잡화점이 있었다. 이 거리에 있는 단 하나의 중국인 가게였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가끔 돼지고기를 사러 푸줏간에 갈 뿐 잡화점에는 가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옷이나 신발에 다는 장식용 구슬, 염색 물감, 폭죽놀이에 쓰이는 화약 따위가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화교 잡화점은 한국인을 위한 잡화점이 아니라 화교를 위한 잡화점이었다. 염색 물감은 빵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고, 섣달 그믐 밤에 잡귀를 쫓기 위해 큰 폭음을 내는 중국의 세시풍속 때 필요한 것이 폭죽놀이 화약이었다. 한국인과 중국인의 관습이 달랐다.


작가는 한국인이 바라본 중국인 거리를 정말로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저녁 무렵이 되면 바구니를 팔에 건 중국인들이 모여 들었다. 뒤통수에 쇠똥처럼 바짝 말아붙인 머리를 조금씩 흔들며 엄청나게 두꺼운 귓불에 은고리를 달고 전족한 발을 뒤뚱거리면서 여자들은 여러 갈래로 난 길을 통해 마치 땅거미처럼 스름스름 중국인 거리로 향했다. 남자들은 가게 앞에 내놓은 의자에 앉아 말없이 오랫동안 대통 담배를 피우다가 올 때처럼 사라졌다. 그들은 대개 늙은이들이었다.” 1천여 년 동안 중국 여성의 멍에가 됐던 전족은 한국화교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부산 구포역 앞 화교 중화요리점에서 식당 주인의 구순이 다 된 어머니가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요즘도 인천차이나타운에 가보면, 해질 무렵 화교 노인들이 집 앞이나 가게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잡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중국인 거리의 화교는 한국인에게 의심과 조롱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찻길과 인도를 가름짓는 낮고 좁은 턱에 엉덩이를 붙이고 나란히 앉아 발장단을 치며 그들을 손가락질했다. 아편을 피우고 있는 거야. 더러운 아편쟁이들. 정말 긴 대통을 통해 나오는 연기는 심상치 않은 노오란빛으로 흐트러지고 있었다. 늙은 중국인들은 이러한 우리들에게 가끔 미소를 지었다. 통틀어 중국인들은 이러한 우리들에게 가끔 미소를 지었다. 통틀어 중국인 거리라고 불리는 동네에, 바로 그들과 인접해 살고 있으면서도 그들 중국인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아이들뿐이었다. 어른들은 무관심하게 그러나 경멸하는 어조로 뙤놈들이라고 말했다.”


화교에 대한 이런 편견은 일제강점기 때 형성되었다. 중국의 근대는 아편에 찌들어 있었다.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자, 아편 무역과 거래가 더욱 자유화되어, 중국인의 몸과 마음을 더욱 황폐화 시켰다. 중국 대륙의 아편이 화교를 통해 한반도로 들어와, 아편 단속에 걸려 처벌받는 화교가 적지 않았다. 휴전 직후에도 아편을 피우는 화교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편 하면 중국인을 떠올리는 기억이 작동한 것이 아닐까. 화교를 경멸하는 대표적인 속어가 되놈그리고 짱깨. ‘되놈때놈혹은 땟놈이라고도 한다. ‘장깨는 원래 화교 주단포목상점의 지배인인 장꾸이(掌櫃)’라는 중국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한국인이 주단포목상점의 종업원이 장꾸이라고 부르던 것이 와전되어 짱깨가 되었다.


<중국인 거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국인의 화교에 대한 인식의 구체적인 단면을 보여준다. “그들은 우리에게 밀수업자, 아편쟁이, 누더기의 바늘땀마다 금을 넣은 쿠리, 그리고 말발굽을 올리며 언 땅을 휘몰아치는 마적단, 원수의 생 간()을 내어 형님도 한점, 아우도 한 점 씹어 먹는 오랑캐, 사람 고기로 만두를 빚는 백정, 뒤를 보면 바지도 올리기 전 꼿꼿이 언 채 서 있다는 북만주 벌판의 똥떵어리였다. 굳게 닫힌 문의 안쪽에 있는 것은, 십 년을 사귀어도 좀체 내뵈지 않는다는 깊은 흉중에 든 것은 금인가, 아편인가, 의심인가.”


먼저 화교가 밀수업자로 인식된 데는 미군정기 때 화교가 무역업을 독점한 영향이 컸다. 화교 무역업자는 세관을 통한 공식 무역 이외에도 밀무역을 많이 했다. 중국 대륙은 국공내전의 와중이었기 때문에 무기와 물자에 대한 수요가 왕성했다. 석유, 직물 등을 공해상에서 거래하면 수십, 수백 배의 이익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밀무역을 감행했다. 화교 밀무역업자가 해안경비대에 발각되어 신문에 많이 보도되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194912월과 1950년 초 인천항 근처의 화교 창고를 봉쇄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밀무역을 방지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누더기의 바늘땀마다 금을 넣은 쿠리는 화교는 절약 정신이 투철해 돈을 모아 금을 사서 축재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쿠리는 화교 노동자인 쿨리(苦力)’를 말한다. ‘쿨리는 근대 조선에서 번 돈으로 중국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조선의 화폐를 중국에 가져가도 소용이 없기 때문에 환금성이 높은 금을 구입하여 소중히 보관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조금 다르다. 쿨리의 수입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고, 큰 수입을 얻는 화교 상인이 금으로 축재하는 경향이 있었다. 쿨리는 조선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나쁜 이미지가 심어져 이런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이정희 2.jpg

사진 2. 1930년대 40년대 초반 추정의 인천차이나타운

 

말발굽을 올리며 언 땅을 휘몰아치는 마적단, 원수의 생 간()을 내어 형님도 한점, 아우도 한 점 씹어 먹는 오랑캐, 사람 고기로 만두를 빚는 백정, 뒤를 보면 바지도 올리기 전 꼿꼿이 언 채 서 있다는 북만주 벌판의 똥떵어리.” 이 표현은 조선인의 만주 이주와 관련되어 있다. 한국인의 중국인 및 화교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인식은 만주 거주 조선인에 대한 중국 관헌과 중국인의 탄압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일제의 폭정과 경제적 이유로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은 근대시기 급증했다. 여기에다 일제는 만주를 침략하고 통치하기 위해 조선인을 의도적으로 만주로 이주시켰다. 만주 거주 조선인은 해방 직전 200만명에 달했다. 조선인 이주민은 중국인 지주의 땅을 소작하여 논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일제가 조선인 이주민을 통치에 활용하는 정책을 펴자, 만주의 중국인은 조선인을 주구(走狗)’로 인식했다. 만주의 조선인은 중국인 마적단의 공격 목표가 됐고, 신문에선 중국인에 박해받는 조선인의 비참한 모습을 자주 보도했다. 이러한 박해 사실이 국내의 신문에 보도되면서, 국내 거주 화교에 대한 조선인의 감정은 나빠져 갔다. 1927년과 1931년 두 차례에 걸친 화교배척사건의 촉매제가 된 것은 바로 그러한 만주 거주 조선인에 대한 중국인의 탄압이었다. 1927년 화교배척사건 때는 2, 1931년화교배척사건 때는 무려 200여명의 화교가 학살되는 참사가 발생했다. 해방 이후 만주 거주 조선인 가운데 상당수가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만주에서 겪은 나쁜 기억을 조국에 다시 퍼뜨려, 중국인에 대한 일그러진 이미지는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이러한 나쁜 기억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분노를 잉태했다. “굳게 닫힌 문의 안쪽에 있는 것은, 십 년을 사귀어도 좀체 내뵈지 않는다는 깊은 흉중에 든 것은 금인가, 아편인가, 의심인가.” 인천에 1902년 한반도 최초의 화교학교가 세워졌다. 해방 직전에는 전국에 29개의 화교학교가 존재했다. 화교학교에선 조선어를 가르치는 교과가 없었다. 통치자의 언어인 일본어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으로 강압적으로 국어(중국어)와 같은 시수를 할애했다. 하지만 정작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의 언어인 조선어는 정식 과목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휴전 직후 중국인 거리의 화교는 한국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주인공이 짝사랑 하던 언덕 위의 이층집 화교 소년과 마주치긴 했지만, 한마디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던 것은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은 측면이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한국인과 화교가 대화할 공간과 기회도 없고, 서로의 마음을 소통할 언어가 부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인 거리>는 한국인과 화교를 대립 구도에서만 바라보지 않았다. “집 앞에 이르러 언덕 위의 이층집 열린 덧창을 바라보았다. 그가 창으로 상체를 내밀어 나를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내가 끌리듯 언덕 위로 올라가자 그는 창문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닫힌 대문을 무겁게 밀고 나왔다. 코허리가 낮고 누른 빛의 얼굴에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내게 종이 꾸러미를 내밀었다. 내가 받아들자 그는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잠근 뒤 종이 뭉치를 끌렀다. 속에 든 것은 중국인들이 명절 때 먹는 세가지 색의 물감을 들인 빵과, 용이 장식된 엄지손가락만한 등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금이 가서 쓰지 않는 빈 항아리 속에 넣었다,” 화교 소년이 말없이 건넨 선물은 빵과 작은 등이었다. 인천화교는 빵에다 동물이나 복숭아 그림을 그려 기념할 때 내놓는 관습이 있다. 집안 어른 생신 때는 복숭아를 그려 넣은 수도(壽桃)라는 빵을 만들어 생신상에 올렸다. 주인공과 화교 소년의 애틋한 사랑은 양 민족 간의 나쁜 기억, 의심들, 편견들, 그 모든 장벽을 부숴버렸다. ‘사랑의 힘이라고나 할까. 이런 점에서 <중국인 거리>는 과거와 현재를 묘사한 소설이면서도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이야기하려는 소설이기도 하다.


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 8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부교수

 

                                          


* 이 글은 문화인천Vol.37(2020.12)에 게재된 글에다 일부 내용을 추가한 것임.


** 출처

사진 1.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사진 2. 화도진도서관이 제공

프린트 복사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