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ISSN 2508-2884 (Online)

학술원 사람들
9월호
일본어 서적 『東アジアにおける租界硏究: その成立と展開』의 출판에 참여
프린트 복사 페이스북

동아시아의 조계연구.jfif


중국학술원 이정희 교수의 논문 近代朝鮮における淸國專管租界朝鮮華僑(근대 조선에 있어 청국전관조계와 조선화교)가 최근 일본에서 출판된 동아시아의 조계연구: 그 성립과 전개(アジアにおける租界硏究: その成立展開, 東方書店, 2020)에 수록되었다(pp.353-383). 이 책은 한중일의 조계 연구자 14명이 참가하여 완성한 것이다. 분석 대상은 중국의 텐진(天津)조계, 한커우(漢口)와 쑤저우(蘇州)의 일본조계, 조선의 청국조계 등이다.


동아시아 조계사 연구는 중국의 조계를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 조선에 청국전관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학계에서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에 설치된 조계는 일본전관조계가 4개소, 청국전관조계가 3개소, 각국공동조계가 6개소, 13개소가 있었다. 조계의 총면적은 약 123만평에 달했다. 조선의 조계 수는 중국에 설치된 조계 25개소에 비해 절반 정도에 불과하지만, 영토 면적을 고려하면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조선의 청국전관조계는 인천(1884.2), 부산(1886.7), 원산(1888.3)에 각각 개설되었다. 3개 조계의 총면적은 18,443평에 달했다. 청국전관조계가 설치되게 된 계기는 조선에 이주한 화교의 거주 및 경제활동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의 전관조계가 조선에 먼저 개설되었는데, 이주한 중국인이 이들 일본전관조계에서 거주와 경제활동을 펼치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부산 일본전관조계에서 발생한 덕흥호사건’(德興號事件)이었다. 고베 화상이 1883년 부산의 일본전관조계 내에 일본인 주택을 빌어 덕흥호 서양잡화상점을 개설하자, 주부산일본영사관이 그 철폐를 요구하면서 양국 간에 외교적 마찰이 발생했다. 결국 주부산일본영사관은 덕흥호의 영업을 묵인하지만, 청국정부는 자국민의 보호를 위해 전관조계를 설치하게 되는데, 그것이 인천, 부산, 원산의 청국전관조계이다. 이들 3개소의 청국전관조계는 행정 및 법률 자치권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는 역할을 했다. 화교가 조선에서 조계라고 하는 공간을 근거지로 조선에 설치된 청국의 외교기관의 비호를 받으면서 경제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국가와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조선화교의 특징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청국정부는 일본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청국전관조계의 자치권과 영사재판권을 지켜냈지만, 일본의 조선 강제 병합과 동시에 일본정부가 제정한 법률에 대해서는 저항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자치권과 영사재판권 철폐를 수용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영사재판권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불평등조약에 의한 특권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 철폐는 곧바로 조선화교의 지위의 저하를 초래했다기보다 조선화교의 특권이 철폐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일본은 조선 강제 병합 시 구미 열강의 승인을 얻기 위해 외국인의 기득권익을 존중할 방침을 견지했지만, 그것은 조선화교의 토지소유권, 관세, 세금 등에서 유리하게 작용했다. 청국전관조계 및 각국공동조계는 철폐되었지만, 이들 조계에 거주하는 화교가 보유한 차지(借地)에 대해서는 영대차지권 혹은 소유권이 보장되었다. 이것은 조선의 식민시기 인천, 부산, 원산, 진남포, 군산, 목포의 조계가 차이나타운으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일본정부는 통감부령 제52호를 공포하여 화공(華工)에 대해 단속 정책을 도입했다. 이는 조선인의 만주 이주 문제와 연계되어 일본 국내와 같은 입국제한과 거주제한을 엄격하게 시행한 것과 달리, 단체로 이주하는 화공인 쿨리를 주요한 타깃으로 한 것이었다.


관세 및 이출입세(조선과 일본 간의 관세)10년간 구 조선의 관세제도를 그대로 적용하게 됨에 따라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조선화교의 무역에는 거의 지장이 초래되지 않았다. , 이 기간중 조선과 중국 간의 육로무역의 일부 품목에 한해 관세율과 이출입세의 변경이 있었지만, 해로무역이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 영향은 미미했다.


청국전관조계 철폐 후 조계 내 거주의 화교에 부과된 세금 부담액은 과세의 종류가 늘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감소했다. 내지 거주의 화교는 강제 병합 직전부터 시장세, 담배세 등을 납부하고 있었지만, 그와 같은 세금은 화교뿐 아니라 조선인 및 일본인에게도 똑같이 부과되었다. 화교만이 이전보다 불리한 입장에 놓인 것은 아니었다.


조선화교는 이와 같은 환경 하에서 1910년대와 1920년대 상업, 삼도업(이발,양복,중화요리점), 제조업, 농업, 건축시공업, 노동시장 등의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뤄, 조선인과 일본인을 압박하는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프린트 복사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