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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시사&테마
9월호
피서산장, 중국 외교의 상상력 부족 _ 구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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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피서산장의 정문(麗正門)


더위도 막바지에 들어섰지만 코로나 여파로 피서는 꿈도 꾸지 못한 상황에서 피서산장 이야기를 하려 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열하(熱河)가 그곳이다. 현재는 청더(承德)라는 지명으로 부른다. 정식 명칭은 열하행궁이지만, 정궁의 오문에 걸려있는 '피서산장(避暑山荘)'이라는 현판 때문에 피서산장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하다. 황제가 머무는 곳이라 넓기도 하여 면적은 베이징의 자금성보다 8배나 크다.

 

각설하고, 박지원은 왜 베이징이 아닌 그곳에 가야 했을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청나라 황제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건륭황제의 칠순 생일잔치를 축하하는 사신단에 끼어 그곳에 갔다. 그렇다면 건륭제는 왜 베이징에서 한참 떨어진 그곳에서 칠순 잔치를 했을까. 베이징의 더위를 피해서? 열하행궁은 만리장성을 넘어 한참 북쪽에 있다. 조금만 더 가면 초원이 시작된다. 다들 아시다시피 베이징이나 열하나 여름에 덥기는 마찬가지다. 대륙성 기후의 특징이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는 거 아닌가. 피서 때문에 그 먼 길을 갔다면 시간 낭비 돈 낭비다. 그렇다면 황제는 고령에도 왜 열하에 자주 행차했을까? 열하와 맞닿아 있는 초원이 바로 그 실마리다.

 

중국 문명은 만리장성 이북의 유목민들과의 상호작용의 역사다. 유목민들이라는 자극이 없었다면 중국의 역사가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몽골을 쫓아내고 중국을 차지한 명나라는 항상 몽골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래서 장성을 새로 수축하고 정비하면서 대비하였다. 이후 중원을 차지한 청나라는 태생이 만리장성 이북이라 장성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신들의 고향에 가는 길에 장성이 버티고 있다는 것도 기분이 별로 안 좋지만, 더 중요하게는 장성의 효용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방 유목민들의 침입을 막는 데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청을 건국한 누루하치는 주변의 여진족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몽골과 접촉을 하게 된다. 해서여진이 몽골 일부와 연합하여 누루하치가 통일한 건주여진에 대항한 것이다. 그는 이후 몽골에 대한 정벌과 동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일부 부족과는 결혼을 통해서 동맹을 맺고 반발하는 부족은 무력으로 정벌하였다. 이러한 통혼정책 외에 청은 몽골의 부족장들을 만주족과 마찬가지로 왕공귀족에 봉하고 우대하였다. 누루하치의 아들 태종은 몽골족, 한족, 만주족을 모아놓고 칭기즈칸의 대업을 물려받았다고 선언하고 초원의 대칸으로 즉위하였다. 만주족의 황제뿐만 아니라 몽골족의 대칸이 된 것이다.

 

청나라 초기 황제들의 피에는 몽고족의 혈통이 강하게 흘렀다. 누르하치부터 시작하여 대대로 몽골 여인들이 비빈으로 많이 입궁했기 때문이다. 여러 부족으로 나뉜 몽골 가운데는 복속한 부족도 있었지만, 칭기즈칸의 후예로 청나라에 복속하는 것을 수치로 아는 부족들은 청나라에 반발하며 전쟁을 지속하였다.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통일한 만주족 후손인 강희제는 장성으로는 몽골의 침입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리하여 새로운 방식, 사람으로 장성을 쌓는 방법을 취하였다. 그것이 바로 열하행궁, 피서산장이다. 황제가 피서산장에 행차하면 몽골의 왕공귀족들을 포함하여 주변국 사신들은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피서산장으로 와야 했다. 황제는 그들에게 선물을 내리며 위무하는 동시에 군사 열병식을 보여주며 청의 군사력을 은근히 과시하였다. 넓게 펼쳐진 사냥터 목란위장(木蘭圍場)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 반란을 일으키면 어찌 될지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당근과 채찍 전략이다.

 

하지만 준가르 부족은 여전히 반발하고 그 여파로 티베트까지 정쟁에 휘말리게 된다. 원나라 쿠빌라이칸 이후 몽골족은 티베트불교를 믿었고 이후 몽골족과 티베트는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된다. 청나라 황실 또한 티베트불교와 밀접한 연관을 맺는데 옹정제가 황제가 되기 전에 기거하던 옹화궁이 라마교 사원이 된 것은 단적인 예이다. 준가르 부족의 티베트 공략으로 청 왕조는 티베트에 군사적 간섭을 취하게 되는데, 건륭제 때에도 준가르 부족뿐만 아니라 네팔 구르카의 침입을 받자 군사를 파견하고 열하에 대규모 라마교 사원을 짓는다. 피서산장 외곽에 라싸의 포탈라궁을 모방하여 작은 포탈라궁이라 불리는 보타종승지묘가 세워진 유래다.

 

결국 피서산장은 단순히 청나라 황제의 휴식처가 아니라 외교와 국방의 중요한 근거지였고, 외교의 전진기지이자 청나라의 국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그러나 흥성하면 쇠퇴하기 마련이다. 청나라의 국력도 건륭제를 정점으로 쇠퇴해 가고, 이에 따라 피서산장에 행차하는 황제의 발걸음도 뜸해진다. 그러다 결국 함풍제가 영국, 프랑스군의 침입을 피해 피서산장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사망한 후 피서산장도 역사적 임무를 마치게 된다. 이후 청나라 황제 가운에 그곳에 행차한 사람은 없었다.

 

피서산장에서의 외교 원칙은 권위의 인정과 복종이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는 왕공귀족 대우와 다양한 물질적 보상이다. 중국이 부상한 후의 최근 외교는 이러한 원칙을 답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은 2004년 중국-아랍포럼을 설립하여 장관급 회담, 에너지 협력대회 등을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있다. 이 포럼은 에너지 안보가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2006년 중국-아프리카 포럼 정상회담에서는 그 성격이 조금 달라진다. 이 회의에서 당시 중국 국가주석 후진타오는 아프리카에 대한 원조를 늘리고 새로운 차관, 보건과 농업에 대한 개발 프로젝트, 채무탕감을 약속했다. 동등한 입장에서의 협력보다는 시혜적인 내용이 늘어난다. 이어 중국은 2012년 중국-중동부 유럽 포럼, 2014년에는 중국-라틴아메리카 포럼 창설을 제안하고 설립하였다. 아세안(ASEAN) 국가들과도 이런 회의를 개최하지만 주변의 한국과 일본의 영향력으로 ASEAN+1뿐만 아니라 ASEAN+3도 같이 개최된다는 차이가 있다. 이런 포럼들은 인문교류 평화협력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경제협력을 목적으로 한다. 특이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다. 각 지역의 지도자들이 단체로 중국을 방문하거나 중국 지도자가 각 지역을 방문하여 대규모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이다.

 

이런 포럼들은 일대일로(一帶一路: 실크로드 경제대, 21세기 해상실크로드)를 계기로 시혜적 성격이 강화된다. 시진핑 주석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이 이니셔티브는 중국에서 유럽까지 연도 국가들의 인프라 건설 투자가 수반된다. 기초 인프라가 낙후된 국가들은 그 혜택을 위해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는 유인이 생긴다.

 

그러나 청제국 시대와 다른 점은 중국이 유일한 종주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까지 최강 국가인 미국이 버티고 있다. 거기에 트럼프 시대 미국은 중국과의 패권경쟁에서 중국을 억누르기 위한 정책을 공공연하게 추진하고 있다. 이에 대한 중국의 대책은 당근을 통한 우군 만들기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한 각국의 태도는 우호적이지 않다. 당근이 통하지 않았을 때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중국의 보복을 경험하거나 지켜봤기 때문이다. 한국도 사드(THAAD) 배치 후 이런 보복을 경험했다. 중국 늑대전사(戰狼) 외교관 행태도 중국 외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언론 보도에 의하면, 2028년 중국의 경제 규모가 미국을 앞지를 것이라고 한다. 그에 따라 미국과의 패권경쟁도 더 격화될 것이다. 그러나 당근과 채찍으로만 외교를 한정시키면 중국의 승산은 높지 않을 것 같다. 커진 덩치에 맞는 현대적인 외교모델을 찾지 못한다면 중국의 입장을 수긍할 나라가 많지 않을 것이다. 유구한 전통을 갖고 있는 중국이지만, 그 전통이 현대적 상황에 적용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중국 외교는 전통에서 벗어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것 같다.


구자선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상임연구원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중국학술원에서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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