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현대사회에서도 가족·친족에 관한 연구는 그 사회의 뿌리 깊은 역사와 내면을 들여다보는 중요한 통로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가 가족의 형성과 구조, 그 속에서 파생되는 가족과 친족 구성원의 관계와 역할, 기능 등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이다. 특히 혼인은 가족의 형성 과정에서 발생하는 보편적인 절차이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민족이 채택하고 있다는 혼인제도는 각 집단이 처한 자연환경 및 각종 사회경제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혼인하는 과정은 집단마다 고유한 방식을 계승해왔고, 이 때문에 혼인 관습은 그 집단의 정체성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혼인 관습을 통해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그에 속한 사람들은 어떤 가치관과 철학적 사유를 보유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가족과 종족이 사회의 기초로서 향촌사회에서 강력하게 작용해왔던 전통 중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중국 전통 관습 중 지금은 사라진 것이 적지 않다. 그중 혼례와 관련된 대표적인 것으로 곡가(哭嫁)를 빼놓을 수 없다. 말 그대로 “시집가는 것을 슬퍼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결혼을 앞둔 신부가 결혼 한 달 전 혹은 보름 전부터 울면서 노래를 부르는 관습이다. 이때 부르는 노래를 곡가가(哭嫁歌)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토족(土族), 토가족(土家族), 모난족(毛難族), 포이족(布依族), 백족(白族) 등 소수민족1) 중에서 많이 행해졌기 때문에 곡가를 소수민족의 고유하고 독특한 전통 관습 정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통시기에는 한족 사회에서도 널리 퍼져있던 관습이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중국 31개성 자치구 중 15개 자치구의 지방지에 곡가의 기록이 있다. 그 지역은 사천, 귀주, 운남, 티벳, 하북, 산서, 섬서, 청해, 신장, 산동, 상해, 절강, 안휘, 복건, 대만 등2) 주로 서남부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곡가는 여자가 출가하기 전에 반드시 행해야 하는 혼인 의식이었다. 이 밖에 광동, 광서, 호북, 호남, 강서 등에서도 곡가가 행해했음이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곡가는 소수민족뿐 아니라 한족에게서도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관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림 1. 토가족의 곡가 모습
그러나 곡가의 관습은 지역과 민족에 따라 동일하지 않은 형태로 나타났다. 명칭부터 다르고 곡가를 하는 방법에서도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절강 일대에서는 곡가(哭嫁), 사천 일대에서는 작좌가(作坐歌), 광동 일대에서는 개탄정(開嘆情), 복건 일대에서는 제비절(啼悲切), 호북·호남 일대에서는 곡교(哭轎)라고 불렀다. 곡가를 진행하는 방식에서도 각 지역이나 민족에 따라 차이점이 존재한다. 곡가는 결혼을 앞둔 신부가 찔끔찔끔 울면서 탄식을 내뱉는 것으로 시작된다. 곡가에 참여하는 사람은 신부와 신부의 모친, 오빠의 올케, 자매 등 가족이 일반적이지만, 신부의 친구나 동네 아낙들까지 참여하기도 했다.
곡가의 시작은 보통 결혼 전 한 달, 혹은 보름, 혹은 며칠 전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빠르면 반년 전부터 시작하기도 하고, 늦으면 결혼 당일에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역시 민족과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렇게 시작한 곡가는 마치는 시간도 제각각이다. 예식이 끝나면서 곡을 마치는 경우, 신부가 신랑집에 가기 위해 꽃가마에 오를 때 울음을 그치는 경우, 혹은 꽃가마를 타고 가면서도 내내 울다가 신랑집에 도착할 무렵에 곡을 마치는 경우도 있다. 곡가의 형식도 노래 없이 곡만 하는 경우, 곡을 하면서 노래를 하는 경우, 노래만 하고 곡을 하지 않는 등 다양하다. 또 그 민족이 얼마나 곡가를 중히 여기는가의 정도에 따라서도 곡가의 내용과 형식 및 그 규모가 달라진다.
이러한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공통점도 나타난다. 그것은 결혼을 앞둔 신부가 곡가의 주인공이라는 것, 민족과 지역을 막론하고 곡가에 참여하는 사람은 모두 여자라는 것, 또한 곡가의 시작과 끝은 다를지라도 신랑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곡가를 마친다는 사실이다. 신랑집에 들어가서도 신부가 계속 울면 그 결혼이 불길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문을 갖게 된다. 곡가의 관습은 왜 행해졌던 것일까? 정든 집과 부모를 떠나 새로운 생활을 꾸려야 하고 형제, 자매들과의 동거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아쉬운 심정은 일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을까? 아무리 전통사회라도 그것이 보름, 혹은 한 달 이상을 울어야 하는 이유였을까? 곡가의 가사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 신부가 울면서 내뱉는 슬픈 노랫가락은 사람이 상(喪)을 당했을 때 하는 곡조와 비슷하다고 한다. 더구나 곡가가 지속적이고 체계적이며 상당히 풍부한 내용의 가사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적잖게 놀라게 된다. 곡가는 민간의 개별적인 행위가 아니라,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당시의 제도적이고 합법적인 혼인 절차 중의 하나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곡가의 내용은 주로 신부 자신의 결혼에 대한 원망을 토로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남의 집에 자신을 시집보내는 부모에 대한 원망, 신랑집에서 받은 돈(차이리:彩禮)과 자신을 ‘맞바꿔버린’ 오빠와 올케에 대한 질책, 온갖 감언이설로 부모를 ‘꼬드겨’ 끝내 이 결혼을 성사시킨 중매인에 대한 한 맺힌 욕지거리,3) 매서울 것 같은 시집살이에 대한 두려움과 이에 대항할 수 없는 무기력한 신세 한탄 등이 그 주요 내용이다. 흥미로운 것은 신부가 쏟아내는 곡가가 아무리 독기 서리고 등골 오싹한 저주를 퍼붓는 것이라 해도 지목된 당사자들은 이를 묵묵히 들어준다는 사실이다. 얼마간 이렇게 신부가 가슴 속에 있는 한을 울부짖음과 노래로 실컷 뿜어내고 나면 속이 조금이나마 풀리면서 체념의 단계로 넘어간다. 그제야 이제까지 자신을 키워주신 부모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떠오르게 된다. 따라서 곡가는 부모에 대한 감사와 효심, 그리고 형제, 자매, 친우들에 대한 고마움과 아쉬움으로 석별의 정을 나누면서 마무리가 된다.
이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곡가의 관습은 전통사회의 혼인제도의 불평등, 불합리성에 대한 일종의 탈출구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곡가의 관습은 혼인 당사자와는 상관없이 부모가 결정하는 강압 결혼, 그리고 혼인과 동시에 신랑집에 거주하는 친영제와도 무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의 비교적 완전한 혼인제도는 주대부터 시작되어 몇천 년간 지속되어 왔다. 왕조가 바뀌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혼례의식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했지만 6례(禮)를 기본으로 하는 규범은 시종 바뀌지 않았다. 현재의 혼인 입법도 전통 혼인의 도덕과 관습에서 유래하여 변화와 변화를 거듭해온 결과이다. 6례(납채, 문명, 납길, 납징, 청기, 친영)는 간소화되어 3례(지역마다 다름)로 축소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가장 마지막 순서는 혼례를 치른 신부가 바로 신랑집으로 가서 혼인생활을 시작하는 친영(親迎)의 단계이다. 이는 부계사회에서 주로 행해지는 부방거주제(夫方居住制)의 방식이다. 중국의 소수민족에서도 친영제는 보편적으로 행해졌다.
이는 혼인의 목적을 종조계승(宗祧繼承:제사와 계승)에 두는 중국 전통 가정의 핵심 가치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전통 중국사회가 법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채택하고 있으면서도 첩제도를 용인하는 것이나 친생자가 없을 때 양자(후계자)를 두거나 데릴사위제를 채택하는 것, 성비 불균형 지역에서 미리 신부를 확보하기 위해 동양식(童養媳)을 두는 것 등, 이 모든 행위의 뿌리에는 종조계승이 있다. 물론 이것은 불합리한 제도를 합리화시켜 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명분은 언제나 종조계승이었다.
종조계승 사회에서 가장 불리한 사람은 딸이었다. 부모로부터 정규적인 상속을 받을 수 없고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집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정식으로 혼례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대를 잇는다는 핑계로 남편이 첩을 두어도 말하지 못했고, 아들을 낳지 못해 축출되어도 눈물만 삼켜야 했다. 어린 신부로 남편 집에 들어가 죽도록 일만 하는 동양식이 되어도 그것을 운명이라 여겼다. 따라서 중국 전통의 혼인제도는 애초부터 딸에게는 말도 안 되게 불리한 제도였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딸이 조용히 이러한 제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가정은 평화롭고 자자손손 대를 이어 조상에 대한 제사와 가계의 계승을 온전히 완성할 수 있었다. 그것은 중국 전통사회에서 일생일대의 목표이자 목적이었다. 이런 불합리한 제도를 딸이 수긍하기만 하면 말이다.
따라서 곡가는 딸이 이 모든 제도의 시작인 결혼에 대해 극단적인 저항을 하지 않도록 ‘합법적인’ 저항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곡가가 송나라 영녕(永寧) 공주가 시집갈 때 가전(嫁錢) 10만을 요구했지만 송 인종이 허락하지 않아 영녕 공주가 울면서 철야했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이를 방증한다. 곡가와 함께 신부에게 가능한 한 혼수를 두둑하게 챙겨주고자 했던 것도 그런 이유이다. 곡가에 여자만 참여했던 것도 이미 겪은, 앞으로 겪을 여자의 운명에 대한 공감과 위로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었다. 상술했듯이 곡가의 시작 시점은 제각각 다를지라도, 혼인에 대한 원망과 노래는 결혼 당일 최고조가 된다. 지역이나 민족에 따라 신랑집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우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혼인 의식을 마친 신부는 더 이상 곡가를 하지 않는다. 이때 신부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모습으로 꽃단장을 하고 꽃으로 화려하게 수놓은 가마를 타고 모든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신랑집으로 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습은 천년 이상 지속되다가 근대시기에 와서 공화국 정부에 의해 법적인 폐지의 절차를 밟게 되었다. 중화민국 남경국민정부에 의해 혼인과 관련된 악습의 폐지가 선언되었고, 강한 공권력을 앞세운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1950년 혼인법이 반포되어 혼인과 이혼의 자유, 혼인에 대한 제 3자의 불개입 원칙 등이 수립되었다. 특히 1950년대 정부차원에서 추진되었던 혼인법 관철운동을 통해 전통적인 많은 악습이 사라졌다. 화려한 혼례는 금지되었고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보내는 차이리 관습도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사라졌다. 당 간부의 눈만 속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혼수는 검소한 것들로 채워졌고 혼례는 간소화되었다. 혼인법 공포 이후 전통 관습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해도 전통시기와 같은 강압 혼인, 희생 혼인은 법적, 사회적으로 금지되었던 것이다. 거기다 토지개혁을 통해 여성에게 토지가 분급되는 등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었던 것도 이러한 관습을 더 이상 필요치 않게 했다.
그러나 개혁개방으로 경제가 활성화되고 사회의 경직성이 완화되면서 억눌려왔던 전통시기의 여러 관습들이 부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향촌사회에서는 종족의 사당이 세워지고 촌민위원회 선거에서 종족의 역할이 강화되었으며, 축첩현상은 바오얼나이(包二奶)로 이름을 바꾸어 등장했다. 혼인할 때 주고받는 차이리 관습 역시 부활했고 경제 성장과 더불어 그 규모도 급속하게 커지고 있다. 그러나 곡가의 관습이 전면적으로 부활하지는 않았다. 이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현실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기야 필자는, 결혼 당시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남자와 1980년대 후반에 결혼했다는 한 중국 농촌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관습의 지속성은 강한 생명력이 있어 곡가의 관습이 지금 현재 향촌마을 어딘가에서 행해지고 있다고 해도 그리 놀랍지는 않다. 적어도 1950-60년대까지는 향촌사회에서 상당히 행해졌고, 소수민족 지역에서는 지금도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현대사회에서 전통 곡가의 방식은 더 이상 행해지지 않는다. 있다 하더라도 우는 시늉만 낸다든지 형식적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고, 곡가의 가사도 혼인에 대한 원망보다는 부모의 은혜와 가족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주류이다. 다만 이러한 관습의 역사가 중국 여성들의 결혼관 형성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은 듯하다. 근대 이후 전통의 혼인제도는 시대에 맞게 ‘획기적’으로 수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중국의 독신여성(剩女)들은 여전히 결혼제도 자체가 여자에게 불리하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의식에 내재된 전통의 영향이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가.
【중국문화오디세이 9】
손승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1) 이밖에 回族, 納西族, 苗族, 侗族, 羌族, 瑤族, 撒拉族, 藏族, 彝族, 傣族 등에서도 행해졌다. 특히 토가족의 곡가 습속이 가장 전형적이라고 알려져 있고, 지금도 곡가는 토가족의 대표적인 민속으로 주목받고 있다.
2) 潘旦, 「哭嫁習俗探微」, 『溫州師範學院學報』, 2003-6, p.30.
3) 전통 혼인의 주혼권은 부모에게 있었고, 법적으로 반드시 중매인을 두어야 혼인을 성사시킬 수 있었으며, 가족들은 이왕이면 차이리를 많이 받고자 하는 심리가 있었다. 신부의 입장에서 이 모두는 원망의 대상이었다.
* 참고문헌
唐正明, 「民法典婚姻家庭編的編纂應該加入“六禮”制度」, 『法治與社會』, 2017-11.
潘旦, 「哭嫁習俗探微」, 『溫州師範學院學報』, 2003-6.
匡天齊, 「四川漢族民間婚禮與婚嫁歌」(續二), 『四川音樂學院學報』, 19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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