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한국화교의 구성은 근대든 현대든 산동성 출신이 전체의 8∼9할을 차지하는 단조로운 구성으로 이뤄져 있다. 광동성과 복건성을 비롯한 중국 남방 출신은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 화교는 출신지별 동향회 조직을 결성하여 친목을 도모하면서도 중화회관 및 중화상회 조직을 통해 ‘조선화교’ 및 ‘한국화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이에 비해 베트남화교·화인의 양상은 보다 복잡한 구성을 보여주는데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응아이(Ngai)’의 존재이다. 일본의 문화인류학자인 이토 마사코(伊藤正子) 교수의 연구성과에 근거하여 ‘응아이’를 살펴보자.
베트남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소수민족은 53개 있다. 53개 소수민족 가운데 ‘Hoa(華)’라고 하는 베트남화교·화인은 2009년 82만여명에 달하며, 53개 소수민족 가운데 8번째로 인구가 많다. 그런데 같은 중국계 소수민족이면서 ‘Hoa(華)’에 속하지 않으면서 독립적으로 53개 소수민족에 포함된 것이 ‘응아이’이다. 2009년의 인구는 불과 1,035명에 불과하지만, ‘응아이’이면서 ‘Hoa(華)’에 소속된 인원을 포함하면 수만명에 달한다.
그림 1. 광서성 동흥(東興)에서 베트남 몽까이에 입국하기 위한 대기실
‘응아이’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베트남과 인접한 광서성의 방성(防城)에서 베트남 동북부에 정착했다. 그들의 조상은 광동성과 복건성에서 거주하다 광서성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응아이’와 가장 유사한 것은 ‘Hoa(華)’에 속하는 객가(客家)이다. 객가와 ‘응아이’는 서로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객가는 주로 광동성 동부와 중부에서 베트남으로 직접 이주하여 그 루트가 ‘응아이’와는 다르다. 또한 ‘응아이’는 베트남 동북부의 산간부에서 농사에 종사했지만, 객가는 주로 평야 지대와 도시부에서 생활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산간부에서 주로 생활했기 때문에 도시부에서 주로 운영되는 화교사회단체에 참가는 하지 않았다.
‘응아이’가 ‘Hoa(華)’가 아니라 1979년 베트남정부로부터 53개 소수민족의 하나로 지정된 데는 중국과 베트남 간의 관계가 배후에 있다. ‘응아이’는 1940년대 중반 베트민(越盟)의 베트남 독립운동 시기에 무장선전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활약했다. 1947년 프랑스가 베트남 동북지방에 타이족이 많이 거주하는 하이닌성에 ‘눙자치국’을 설립했는데, 바로 그 지역이 응아이의 집단거주지였다. 중국공산당은 1948년과 1949년 중국과 베트남 국경지역 거주 ‘응아이’를 중국공산혁명에 도움을 주는 존재로 간주하여 그들을 ‘화교’로 불렀다. 베트민도 ‘응아이’를 ‘화교’로 간주했다.
그러나 1954년 남북 베트남 분단을 초래한 제네바협정 체결 이후 ‘눙자치국’ 거주의 응아이는 남베트남으로 대량 이주했다. 중국공산당과 베트남공산당 사이에 1955년 베트남화교·화인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 후 북베트남 거주 화교·화인의 지위는 향상됐다. 합의는 크게 3가지. ① 북베트남화교는 베트남 공민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② 베트남 북부 화교를 베트남 노동당의 지도하에 두고 베트남 공민으로 한다. ③ 베트남 북부 화교를 교육시킨다. 이러한 원칙 하에, ‘응아이’는 1970년대 말까지 ‘Hoa(華)’의 서브 그룹으로 간주되어 당의 간부와 공무원, 군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무력으로 통일시킨 이후, 베트남과 중국 간에 국경분쟁이 발생하자 ‘응아이’의 지위에 큰 변화가 발생했다. 베트남 정부는 중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에서 ‘Hoa(華)’에서 ‘응아이’를 분리시키는 정책을 폈다. 1979년 2월 중국과 베트남 간에 전쟁이 발발하자, 베트남정부는 그동안 ‘Hoa(華)’의 일부로 간주하던 ‘응아이’를 독립적인 소수민족으로 분리했다. 하지만 대우는 ‘Hoa(華)’와 다르지 않았다. 응아이는 군인과 당 간부에서 갑자기 추방당했다. ‘응아이’는 베트남을 위해 여러 가지로 기여해 왔는데 갑자기 이런 처우를 받게 되자 베트남 국가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 1978∼1979년 상당수의 ‘응아이’가 육로를 통해 중국으로 귀국했다.
‘응아이’에 대한 차별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젊은 세대의 ‘응아이’에게는 경찰관과 경찰관학교 입학이 허용되지 않고 있다. 군인과 공무원이 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설령 된다고 해도 행정 촌(村)의 촌장 이상이 될 수 없다. ‘Hoa(華)’와 ‘응아이’ 이외의 소수민족에게는 이러한 차별이 없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응아이’는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없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질 수 있는 데 한계가 있다. 베트남 정부는 ‘응아이’의 신분증명서에 반강제적으로 ‘Hoa(華)’로 등록시켜 그들과 똑같이 차별하고 있다. ‘응아이’는 이러한 베트남 정부의 차별 조치에 대해 “우리는 ‘응아이’이지 화인이 아니다.”라고 다른 소수민족과 같이 동등하게 대우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림 2. 중월 국경도시 몽까이 시내의 모습
2000년대 후반 들어 베트남의 ‘응아이’가 중국 국경을 넘어 출가노동을 가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중국의 고도경제성장으로 베트남보다 경제수준이 향상되면서 광서성의 옥수수농장, 공장 등지로 응아이가 대량으로 단기 이주하고 있는 것이다. ‘응아이’가 광서성에 자신들의 ‘응아이네트워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 4】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참고문헌
伊藤正子(2018.3), 「“わたしたちは華人ではない”: ベトナムの華僑定策と北部農村に住むガイの現代史」, 『アジア·アフリカ地域硏究』第17-2號, 京都大學大學院アジア·アフリカ地域硏究課.
華僑華人の事典編纂委員會 編(2017), 『華僑華人の事典』, 丸善出版.
이정희(2018), 『한반도화교사』, 동아시아.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황재경씨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