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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8월호
진먼도 화교 역사·문화의 형성과 활용 _ 김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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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냉전기, 닫힌 섬이 된 진먼

 

19491210, 장제스(蔣介石)가 타이완 행 군용기에 올랐다. 1945년 일본 패망 직후 시작된 국공내전은 국민당의 패배로 막을 내리고 양안은 분단됐다. 대만의 진먼도(金門島)210km나 떨어진 타이완 본섬을 지키는 최전방 방어선이자 반공 진영의 첨병 역할을 맡게 됐다.1) 진먼과 중국 샤먼(廈門)과의 거리는 불과 8km 남짓에 불과하다.

 

진먼도 전역이 빠르게 군사요새화 됐고 세상과 격절(隔絶)된 닫힌 섬이 됐다. 통금과 등화관제 그리고 인근 마을로의 이동과 숙박마저도 사전허가를 받아야 했다. 주민들은 섬 밖으로의 이동은 물론 외부와의 서신 왕래도 금지됐다. 적과의 내통을 우려한 군 당국은 라디오를 포함한 모든 통신장비의 민간 소유 역시 금지했다.2) 그러나 진먼은 외부와의 교류가 단절된 접경이 되기 이전에는 중국 동남 연해 지역과 일상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개방성을 지닌 곳이었다. 특히 진먼은 근대 중국 해외 진출 화교의 발원지로서 동아시아 화교네트워크의 중요한 결절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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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진먼도 너머로 보이는 샤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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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진먼 해변의 용치(龍齒)와 샤먼 컨벤션센터

         

2. 진먼화교(金僑)의 형성 

 

진먼이 지닌 개방성은 근대에 이뤄진 해외로의 대규모 인구 이동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840년 발발한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홍콩을 할양하고 샤먼을 포함한 연해 항구 5곳을 개항했다. 남중국해와 맞닿아 있는 샤먼이 서방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를 잇는 무역항으로 번성했다. 진먼 사람들은 샤먼을 통해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지의 동남아는 물론 일본의 개항장인 나가사키, 고베 등 각지로 진출했다.

 

진먼은 소금기가 많은 척박한 토질에다 겨울이면 세차게 불어오는 모래바람 때문에 농업 발달하지 못했다. 1910년대 초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기근까지 겹치면서 많은 진먼인들이 살 길을 찾아 앞 다퉈 동남아 등지로 떠났다. 이 같은 해외 진출은 1915~1929년 사이에 최고조에 달해, 동 기간 섬 인구의 41.45%가 감소했다.3) 동남아와 일본 등지로 건너간 진먼인들은 현지 생활의 안전과 편리, 정보교류와 상호부조 등을 위해 동향 조직을 결성했다. 상업과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진먼 화교가 점차 늘어났다. 진먼화교(金僑)들은 타 지역 출신들과 자신들을 구별하고 동향인들의 내부 결속을 위해 일종의 조직이자 모임 공간인 진먼회관(金門會館)을 동아시아 각지에 설립했다.4) 회관을 중심으로 진먼화교들은 고향과의 연계 및 문화적 유대를 가졌다. 또한 화교들은 근대 국제우정(郵政)제도를 통해 고향 집으로 돈을 송금할 수 있었다. 교회(僑匯)로 불린 화교의 송금으로 고향에 남은 가족들은 매우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5)

 

진먼 화교들은 해외에서 성취한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성공을 이웃들에게 알리고 집안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고향 마을에 동·서양 건축 양식이 뒤섞인 양루(洋樓)를 지어 올렸다. 1949년 이전까지 56곳의 부락에 총 161개의 양루가 세워졌다.6) 진먼 화교들은 문중 사당의 정비, 신식학교 건립 등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공적인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30년대 동남아 현지의 반화(反華)조류가 고조되면서 귀향 화교들이 많아졌다. 귀향 화교를 통해 서구 열강의 식민지 문화가 진먼에 전파됐다. 진먼 주민들은 양복을 입고 커피를 마시며 파티를 즐기는 귀향 화교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1969년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진먼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2,335가구의 약 13,782명이 귀환 화교였다.7) 하지만 양안의 군사적 대치 상황에서 진먼의 개방성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동남아와 연결되어 있던 화교네트워크는 단절됐다. 귀환 화교는 해외에 친인척을 둔 요주의 감시 대상으로 전락했고 간첩으로 몰려 희생을 당하기도 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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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진먼의 대표적 양루-득월루(得月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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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4. 화교 기부로 지어진 수이진(水金)학교, 현재 화교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음

         

3. 탈냉전과 화교 역사·문화 자산의 활용

 

탈냉전의 세계적 흐름 속에서 양안 간 긴장도 누그러졌다. 하루 걸러 홀숫날이면 어김없이 날아들던 중국의 포탄이 1979년 미·중 수교 이후 멈췄다. 1987년 타이완 본섬에 이어 1992년 진먼 역시 계엄령이 철폐됐다. 진먼도의 닫힌 문이 다시 열렸다. 그러나 동시에 진먼도의 군축이 시작되고 중앙정부 지원 역시 줄어들면서 군대에 의존한 진먼 경제의 근간이 흔들렸다. 진먼 당국은 급변 상황에서 고유의 역사·문화 자산을 활용한 지역 명소화를 통해 활로를 모색했다. 군사안보를 이유로 개발이 지체되고 사회적 인구이동이 억압된 덕분에 원형이 유지된 유·무형의 전통문화 자산이 지역 명소화의 밑거름이 됐다.9)

 

수 백년 역사의 민난(閩南)전통가옥과 촌락, 동서양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양루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씨 집성촌으로 700여 년 역사의 수터우(水頭)마을은 푸젠 전통 역사·문화 자산을 간직한 진먼의 대표적인 지붕 없는 박물관이자 관광명소로 손꼽힌다. 화교 발원지로도 유명한 수터우 마을의 중심에는 1931년 황씨 가문에서 세운 양루인 득월루(得月樓)가 자리 잡고 있다. 당시 극성을 부리던 떼강도를 막기 위해 11m 높이의 망루를 갖추고 있는 이 건물은 진먼의 화교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 건축물로서 대만 역사건축 100선에 선정됐다. 1932년 수터우 출신 진먼 화교들의 기부로 서양양식의 진수이(金水)학교가 세워졌다. 지금은 화교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진수이 학교에는 근현대 진먼화교 삶에 대한 다양한 사료가 전시되어 있다.

 

4. 진먼의 해금(解禁)과 화교네트워크의 복원

 

1992년 진먼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끊어졌던 화교연계망이 다시 복원됐다. 진먼 출신 해외 화교들이 자신들의 혈연·문화적 뿌리를 찾아 고향을 찾기 시작했다. 2001년 진먼이 양안 교류의 선행 시범지역으로 선정되어 샤먼과의 통항·통상·통신의 소삼통(小三通)이 이뤄졌다. 화교들의 진먼 투자가 줄을 잇기 시작했다.10) 특히 1997년 진먼도에 국립대학이 설립될 때, 해외 진먼화교들의 대규모 후원과 기부가 이뤄졌다. 국립진먼대의 단과대 및 건물·강의실 대부분은 화교 기부자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1) 진먼대학의 민난문화연구소 및 진먼 지방정부는 체계적인 진먼화교 조사와 100여권의 자료집 발간을 통해 자신들의 개방적 역사·문화를 집성하고 있다.

 

5. 역사·문화 자산, 양안의 동질성 회복에 기여

 

최전방의 전장으로서 세상과 격절되었던 진먼은 과거 동아시아를 넘나들었던 자신들의 개방적 역사·문화와 화교연계망을 복원하고 활용, 지역 명소화에 성공했다. 또한 이 같은 역사·문화 자산의 복원과 활용은 진장과 갈등이 지배했던 진먼도가 다시 접경 고유의 접촉·연결 기능을 강화하고, 분단되었던 양안 간 역사·문화 동질성을 회복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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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국립진먼대학 본부 건물

 


김수한 _ 인천연구원


                                       


1)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의 국호는 각각 중국과 대만으로 약칭한다. 타이완, 진먼, 샤먼 등의 지명은 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한다.

2) 냉전기 진먼도의 병영화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Michael Szonyi (2008::25-41)을 참고.

3) 근현대 진먼인들의 해외 진출에 대한 내용은 江柏煒(2017:94-96)을 참고.

4) 동아시아 진출 진먼화교 커뮤니티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李任德(2014:196-223)을 참고

5) 화교송금 시스템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金門國家公園管理處(2017:115-119) 참고

6) 진먼 전통가옥 및 양루의 분포 등에 대한 내용은 金門縣政府(2000) (2017:156-188) 참고

7) 귀향화교에 대한 내용은 江柏煒(2017:94-96)참고

8) 인도네시아 화교 출신 진먼 주민 인터뷰 (2020.6.15)

9) 접경 특유의 진먼 장소자산을 활용한 지역명소화에 대한 내용은 김수한(2020)참고

10) 진먼 소삼통 및 화교 투자에 대한 내용은 張梨慧(2017:234-236) 金門縣政府(2014:425-445) 참고

11) 국립진먼대학교 국제사무처 관계자 인터뷰 (2020.6.18)


* 참고문헌

김수한(2020), “양안 접경 진먼에서 남북접경 인천의 미래를 찾다”, 인천투데이 (http://www.incheon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201204: 검색일 2020.7.24.)

Michael Szonyi (2008), Cold War Island: Quemoy on the Front Line, (Cambridge:Cambridge Univ)

李任德(2014), “近百年來金僑的成就與貢獻”, 金門縣政府,世紀的金門百年冠慧,金門建縣百年紀念(台北;國家書店)

江柏煒(2017),”僑鄉文化:華僑網絡,僑鄉社會及其物質文明-19~20世紀的金門島”,陳奇中編,金門學概論(台北;東華書局).

金門國家公園管理處(2017),冷戰金門:世界史與地域史的交織(台北;國家書店)

金門縣政府(2014),世紀的金門百年冠慧,金門建縣百年紀念(台北;國家書店)

金門縣政府(2000), 走訪金門古厝.(金門:金門縣政府)

張梨慧(2017),”觀光旅遊”, 陳奇中編,金門學概論(台北;東華書局).

曾逸仁(2017),”閩南聚落與建築”, 陳奇中編,金門學概論(台北;東華書局).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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