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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6월호
연구성과 소개(2) _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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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대구중화기독교회의 운영과 화교사회: 양춘상장로소장자료를 근거로, 동서인문12, pp.263-300.

 

본고는 한국화교의 종교생활에 대해 대구중화기독교회를 중심으로 분석한 것이다. 홍콩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화복중심(世界華福中心, CCCOWE)이 집계한 세계 각지의 화교·화인의 교회는 9천여 개이며 교인수는 208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 홈페이지에 존재가 확인된 화인교회는 6,093개였다. 화교·화인은 교회를 세워 기독교 신앙에 근거하여 자신들만의 종교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한국에도 화교교회가 7개 존재한다. 서울 소재의 한성중화기독교회(1912), 인천 소재의 인천중화기독교회(1917), 부산 소재의 부산중화기독교회(1929), 수원 소재의 수원중화기독교회(1955), 영등포중화기독교회(1958), 군산 소재의 군산중화기독교회(1959), 그리고 대구 소재의 대구중화기독교회(1957)이다.

 

본고는 대구중화기독교회에서 1964년경부터 2014년까지 50년간 집사, 장로, 원로장로로 근무한, 이 교회의 산증인인 화교 양춘상 소장 자료(이하, 양춘상장로소장자료라 칭함)에 근거하여 이 교회의 1967년부터 1973년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교회 건축과정과 교회 운영 실태 그리고 화교 및 한국인 사회와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검토했다.

 

상기의 검토를 통해 밝혀낸 새로운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양춘상장로소장자료의 가치이다. 현재까지 한국의 7개 화교교회에 관한 기존의 연구는 자료의 부족으로 각 교회의 운영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밝혀내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번에 한국의 화교교회에 관한 연구에서 처음으로 교회 내부의 자료를 통해 화교교회가 어떻게 작동하고, 운영되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역으로 이러한 검토 결과는 이 자료의 가치를 확실히 입증할 수 있었다.


둘째, 대구교회 설립의 특성이다. 대구교회는 해방 후 설립된 화교교회 가운데 수원교회 다음으로 설립된 교회로 한국 제3의 도시에 세워진 교회이다. 교회 설립 과정에서 한국인 홍대위 목사가 교회의 초석을 놓고 기반을 닦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해방 후 설립된 수원교회는 화교 마수신에 의해, 군산교회와 대전교회는 미국인 맥클레인 선교사에 의해 초창기 교회가 운영된 것과 조금 양상이 달랐다. 하지만 맥클레인 선교사와 한국인 박부옥 전도사가 홍대위 목사를 적극 도와준 결과이기도 했다.

 

셋째, 대구교회 건축물의 1층이 대구화교 모문금에 의해 시공되었다는 점이다. 모문금은 대구·경북지역 주요 종교 건축물을 시공한 쌍흥호의 경영자로 대구교회 1층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한국인 이태중이 교회 2층 증축공사와 목사 거주 주택 공사를 담당했다.

 

넷째, 대구교회는 목사를 중심으로 장집동공회를 조직하여 교회를 운영했으며, 1971년 조직된 여한중화기독교연합회에 소속되어 활동했다는 점이다. 대구교회를 비롯한 연합회 회원 교회는 교회 수입의 15% 혹은 10%를 회비로 내 연합회 조직을 운영했다. 교회의 예배와 각종 명칭은 한국의 장로교회와 거의 비슷했다.

 

다섯째, 대구교회는 교인의 각종 헌금을 수입으로 하여 운영되었다. 십일조헌금, 주일헌금, 월정헌금이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이것은 한국의 교회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대구교회는 수입에 맞게 지출을 했으며, 가장 큰 지출항목은 정신 목사 월급과 생활비로 전체의 약 6할을 차지했다. 1970년 당시 교인수는 약 100명이었다.


여섯째, 대구교회는 대구지역 화교사회, 타 지역 화교교회, 화교언론 등과 관계를 맺으며 운영을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활동은 화교교회의 기본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대구지역의 교회, 경찰(경목위원회) 그리고 지역의 방범 및 환경미화원과도 관계를 맺으며 지역사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것이 엿보였다.

 

일곱째, 대구교회는 대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 성경과 성가집은 대만에서 구매했으며, 목회자와 특별전도회 강사는 대만에서 파견된 목사가 많았다.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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