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절강성 자싱(嘉興)에 가면 '난후(南湖)'라는 이름의 호수가 있다. 꽃피는 계절이면 영락없이 사람들로 붐비겠지만, 쌀쌀한 겨울철에는 찾는 사람이 없어 고즈넉하기만 하다. 조용하고 한가롭게 보이는 이 호수는 한때 중국혁명의 격랑 한가운데 놓인 적이 있었다. 중국공산당(이하 공산당)의 창당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1921년 7월 23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 내에서 창당대회를 개최했다. 현재는 9,000만 명이 넘는 당원 수를 자랑하지만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57명밖에 되지 않았을 정도로 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소수의 지식인 그룹에 불과했다. 중국공산당의 창당은 공산당의 세계조직인 코민테른의 지원하에 진행되었다. 창당대회에는 코민테른의 극동 담당 마링(Maring)과 중국의 각 지역대표인 리다(李達), 마오쩌둥(毛澤東), 장궈타오(張國燾), 동비우(董必武) 등 13명이 참석했다.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리다자오(李大釗)와 천두슈(陳獨秀)의 공로 또한 컸다.
공산당이 창당 장소를 상하이 조계지로 정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조그만 어촌이었던 상하이는 아편전쟁의 패배로 개항되었고 그로 인해 황푸강 주변 노른자위 땅에는 프랑스 조계지와 공공 조계지가 설치되었다. 조계지는 외국인 거주지로, 서구 열강의 행정력과 사법권의 통제를 받고 있어 중국 정부가 간섭할 수 없는 식민공간이었다. 당시 비자 없이도 드나들 수 있었던 상하이 조계지역은 세계 각국의 자본가들이 모여들어 개방적인 국제금융가로 성장해갔다. 외국인들을 위한 레스토랑, 재즈바, 펍(pub), 양복점 등 서양문물이 속속 전해지면서 이곳은 ‘동양의 파리’로 불릴 정도로 첨단 유행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상하이 조계지의 이러한 자유롭고 포용적인 성격은 외국인뿐 아니라 중국 정부에 반대하는 자유사상가, 반정부세력, 심지어는 범죄자들까지도 모여들게 했다. 상하이 조계지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동서양의 문화가 융합되고 세계인을 향한 열린 공간으로 변모해갔던 것이다. 공산당이 이곳을 창당 장소로 지목했던 것도 중국 당국의 눈을 피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운신의 폭이 넓었기 때문이다.
공산당의 창당 장소였던 지금의 ‘싱예루(興業路) 76호’는 당시 공산당 상하이 대표였던 리한쥔(李漢俊)의 거처였다. 이곳은 지금 ‘중국공산당 제1대 전국대표대회지(中共一大會址)’로 보존되어 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 주변지역은 ‘신톈디(新天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옛 20세기 전반기 상하이의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재현하듯 이국적 분위기의 레스토랑과 노천카페들이 즐비하다. 아무튼 공산당은 1921년 7월 23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인 이곳에서 창당대회를 개최했으며 대회는 며칠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30일이 되던 날 프랑스 경찰의 갑작스러운 수색을 받고 불안을 느낀 창당 발기인들은 급하게 기차를 타고 절강성 자싱으로 몸을 피하게 된다. 다음날인 31일에는 자싱의 난후 호수 위에 배를 띄워 거기서 창당대회를 마무리하고 극적으로 공산당의 창당을 완성하게 된다. 공산당에게 난후가 특별한 의미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더욱이 공산당의 창당은 중국 내 공산당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그림 1. 난후의 모습
그림 2. 난후혁명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당시 배 사진
공산당의 창당을 도운 코민테른은 중국 내 공산당을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당시 국민당 최고 실력자인 쑨원(孫文)과 관계강화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1923년 성사된 쑨원과 요페(Joffe)의 공동선언에서 소련이 중국의 통일과 독립을 지원하겠다고 한 약속은 바로 그 결정(結晶)이었다. 국민당과의 관계강화는 제1차 국공합작이 성사되는 계기가 되었다. 공산당원이 국민당에 가입함으로써 국민당 조직을 통해 그 조직기반과 대중적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공산당이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작용했다. 공산주의자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던 ‘창당’은 그만큼 중요했다. 창당대회 중 피신을 해야 할 만큼 급박한 상황에 놓였었지만, 무사히 창당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싱의 난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산당에게 난후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난후 한가운데 있는 섬 후신다오(湖心島)에는 1959년 난후혁명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여기에는 공산당의 창당을 기리기 위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 배 한 척도 전시되어 있다. 상하이의 중국공산당1대회지 기념관에도 역시 동일한 배 모형이 놓여 있다.
그림 3. 난후혁명기념관 정면
그림 4. 난후혁명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창당 당시의 배 모형
난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인연이 있는 곳이다. 자싱은 1932년 여름 백범 김구선생이 일제의 밀정을 피해 피신했던 곳이다. 더욱 특별한 것은 당시 백범 선생이 일제를 피해 난후에 배를 띄워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를 주재했었다는 사실이다. 동일한 배는 아니었겠지만, 공산당의 창당을 도왔던 난후의 배는 그렇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도 의미 있는 일로 각인되었다.
【이미지 중국 2】
손승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이 글에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직접 촬영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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