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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시사&테마
10월호
누가 베란다를 소유하는가 – 5피트 공간의 발견과 Verandah Riot (2) _ 김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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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로 양 측면에 주상복합의 숍하우스를 연속적으로 배열하여 지붕이 있는 외부 복도 공간이 자연스럽게 조성될 수 있도록 한 건축양식은 이미 싱가포르 도시개발 초기에 스탬포드 래플스에 의해 구상된 것이었다. 일찍이 래플스는 싱가포르의 도시개발 위원회(Town Committee)’의 위원장에게 아래와 같이 보낸 바 있다.

 

각각의 집은 일정한 너비의 베란다(verandah)를 갖추어야 하는데, 이는 중앙대로 양측면에 연속적이면서 지붕으로 덮인 통로로써 항상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지난 연재에서 인용한 바 있지만, 각종 해협식민지 법령(Acts and Ordinances of Straits Settlements)에서는 이 외부 복도, 즉 외랑을 주로 베란다(verandah)’라고 지칭하고 있다. 베란다라는 용어는 19세기 유럽의 도시에서 쓰이기 시작한 용어로써, 자동차와 같은 바퀴 달린 이동수단의 출현으로 중앙도로 측면에 형성된 보행자 통로를 가리킨다. 이 용어가 싱가포르의 도시개발과정에서 중앙도로와 숍하우스 건축군 사이에 형성된 지붕덮힌 통로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래플스의 이러한 정책이후 영국 식민당국은 숍하우스를 밀집하여 건설하면서 시내중심가의 주요 도로와 맞닿은 일층에는 필히 공간을 남기고 지붕을 덮음으로써 보행로로 삼을 것을 요구하였고, 19세기 중후반에 걸쳐 이러한 건축양식이 영국령 말라야와 해협식민지 주요도시 도심지의 주요 주거양식이 되었다.

 

사실 이러한 숍하우스 건축양식을 통한 외랑(베란다)의 형성은 기후적 측면과 도시공학적 측면을 고려한 것이기도 했다. 우선 적도에 걸쳐있는 동남아시아의 고온다습한 열대기후를 고려하여 보행자들이 태양빛과 우기의 비를 피하면서 이동할 수 있도록 고려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집중호우로 인한 배수와 방화의 목적도 있었다. 그리고 도시구획에 있어서 미관을 고려한 조치이기도 했는데, 기존의 일정하지 않은 건축물들의 병렬을 일정하게 정비하고, 중앙도로와 외랑의 폭을 연속적이고 통일성있게 함으로써 질서정연하게 구획된 도시의 모습을 구현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중후반을 지나 20세기에 들어서면 점차 이러한 숍하우스 건축양식을 고층으로 짓기 시작하였고, 건물의 외관 역시 각종 상징물을 활용하여 장식하기도 했다. 흔히 초기, 중기, 후기, 장식형 주상복합 건축양식으로 분류되는데, 구체적인 형태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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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하우스 건축양식의 변화

 

흥미로운 점은 숍하우스 건축양식이 점차 고층화되고 화려해 지면서 각종 장식물들이 상징하는 바가 각 종족적 특징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점이다. 사실 숍하우스 건축양식은 중국인 거주지뿐만 아니라 인도인, 아랍인 거리에도 조성되었는데, 동일한 건축양식에 각 종족적/문화적 특징을 보여주는 상징물들의 이질성이 두드러져, 해당 지역이 강제된 초경계적 다문화/다종족 공동체인 서구식 근대 제국(empire)’의 일원이었음을 상기시켜 주는 듯하다.

 

숍하우스 건축양식과 외랑의 조성은 영국령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기타 동남아시아 지역의 중국인 거주자들에게 특히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우선 동남아시아 특유의 열대기후는 유럽인들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역시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에, 기후적 고려가 가미된 건축양식이 환영받았다. 게다가 외랑을 두고 일층을 상점으로 활용함으로써 발생한 개방된 공간은 화교화인들 사이에 공적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또한 일층의 외랑들이 연결되어 복도(베란다)가 형성됨으로써 동남아시아 중국인 거주구역 및 중심가 특유의 상가거리가 형성될 수도 있었다. 화교화인들 사이에서는 우쟈오치(五腳基) 혹은 치로우(騎樓) 건축양식으로 불리며 이후 해협식민지뿐만 아니라 동남아 화교 거주지역의 주요 주거건축양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페라나칸(및 메스티조)이라고 불리던 중국인 이민 2세대 혹은 3세대 역시 이러한 건축양식을 통해 거주구역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페라나칸 건축이라고 불리며 해협식민지 특유의 혼종문화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숍하우스 건축양식과 외랑조성의 유행에는 19세기 중후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급격하게 증가한 중국인 이주가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싱가포르의 경우 도시개발이 막 시작되던 19세기 초기까지만 해도 숍하우스 건축양식은 기후와 도시외관을 위한 고려였다. 그러다가 19세기 중후반을 넘어서면 급격히 늘어나는 중국인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대안으로 떠오르게 된다. 통계에 따르면 1871년 싱가포르 전체인구는 약 97천 명인데, 1931년이 되면 557천 명으로 급증한다. 그 가운데 중국인의 비중 역시 56%에서 75%로 커진다. 거주인구의 증가는 도시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지만, 급격한 인구의 증가는 그들에게 제공해야 할 거주공간의 부족이라는 도시행정적 문제점을 동시에 발생시킨 것 역시 사실이다. 1901년 싱가포르 식민정부에서 조사한 해협식민지의 인구밀도 조사에 따르면, 중국인 이주자들이 주로 밀집해있는 지역의 한 가구당 거주인의 숫자는 평균 11명에서 13명에 이르렀다. , 한 집에 10명 이상의 중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인 이주자의 급격한 증가는 그들이 점차 제한된 중국인 거주구역을 넘어 그 영역을 확장해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고, 영국 식민당국에서는 이를 조정할 필요를 인지하고 있었다.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한 거주공간의 부족을 그나마 해결해 줄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숍하우스 건축양식이었다. 래플스에 의해 강조되었지만, 권고사항이었던 숍하우스 건축이 1882년이 되면 도시 중심가 주거건축의 규범으로 제정되어 본격적으로 건축되기 시작한다. 게다가 주로 5피트 너비였던 외랑식 통로 공간을 담보로 하는 숍하우스 건축양식은 급증한 인구로 인해 그 위험성이 높아진 도시위생상의 문제에 있어서도 통풍과 배수가 용이하다는 측면에서 장려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특히 강조된 것은 한정된 공간에서 최대한 많은 거주민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로 인해 개별 숍하우스의 폭을 줄이면서 배후의 거주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점차 길어지는 방향으로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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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숍하우스의 구조. 중국인 인구의 급증으로 인해 싱가포르를 비롯한 해협식민지의 숍하우스는 폭이 좁아지면서 줄어든 공간을 뒷부분을 늘리는 방식으로 커버하게 된다.

 

좀 더 근본적으로 살펴보면,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주요 도시들에 숍하우스 건축문화가 형성된 것은 중국인 이민자 그룹이 각 제국주의 식민영역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상 및 역할과 관련이 있다. 19세기 들어 영국 및 네덜란드가 제국의 운영형태를 점을 연결하여 선을 그리는 기존의 무역로 중심에서, 대농장 혹은 광산운영과 같이 면을 차지하여 1차 산품을 대량생산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면서 다수의 이민자 수요가 발생하였다. 아울러 소수의 무역상들이 무역거래를 하기위해 거주하는 대시장 혹은 출입항구로서의 항구도시가 아닌, 대량의 장기거주민이 머무는 주거중심의 도시건설이 요구되었다. 그에 따라 중국인, 인도인, 현지인(싱가포르의 경우 말레이인, 부기스인) 등 대규모의 노동력이 동원되었고, 그들의 이동과 이주, 현지적응 등의 해결이 시급해졌다. 동시에 그에 따른 각종 도시 인프라가 필요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 상인그룹은 그들의 생활잡화, 각종 물품 및 교역품 등을 중국의 교향으로부터 가져와 각 도시의 중국인 이민자들에게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울러 각종 금융서비스(송금, 환정, 전장, 대출)도 제공하였다. 중국인 노동자들의 경우 각종 노동서비스(인력거, 대농장 및 광산의 인부, 호커)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이러한 상업 및 노동서비스의 경우 중국인 이주자 그룹뿐만 아니라 현지 원주민들까지도 공급받거나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실제 호커들은 푸젠 및 광둥 음식뿐만 아니라 말레이, 인도, 아랍의 음식을 팔기도 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싱가포르 숍하우스의 5피트 공간이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말레이인들, 인도인들에 의해서도 활용되고 있었음을 관찰할 수 있다. , 각 거주민 그룹들은, 심지어 유럽인들도 도시생활에 필수적인 각종 인프라 및 서비스를 중국인들을 통해 공급받게 되는데, 숍하우스 건축군은 도시행정적인 측면에서 그 인프라를 보다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건축양식이었다. 숍하우스를 이용해 주상복합의 도심지 거리를 형성함으로써 도시환경에 필수적인 상가수요를 충족하고, 베란다 공간을 통해 기후적 고려와 함께 쇼핑아케이드를 외부에 형성함으로써 상품의 매매가 쉽도록 고려하였다. 영국 해협식민지 법령은 이를 보행자의 순환(pedestrians circulation)’을 돕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중국인 이주자 제공의 도시 인프라를 기반으로 하여 형성된 싱가포르의 도심지에서 숍하우스 건축양식은 갈수록 열악해지는 공간활용에 훌륭한 대안이었을 것이다. 19세기 이후 중국인 이주자들은 이러한 도시개발의 과정과 숍하우스 건축문화 및 5피트 공간의 유용성을 충분히 경험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19세기 후반 영국 식민정부가 이 5피트의 공간을 공적인 영역으로 상정하고 중국인 이주민들의 사적인 사용을 통제하려 시도하였을 때, 싱가포르의 화교화인사회가 격렬하게 반응한 것이다. 바로 베란다 폭동(Verandah Riot)’의 시작이다.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19


김종호 _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 이번 호의 연재는 김종호, 싱가포르 · 샤먼 도시개발과 도심지 주상복합 건축문화의 형성 - 숍하우스 ‘5피트외랑공간의 발견과 역사적 의미-, 동아연구382, 2019의 일부 내용을 재구성한 것임.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그림 1.하우스 건축양식의 변화

江柏煒, 五腳基近代閩粵僑鄕洋樓建築的原型, 成市與設計學報13/14, 2003

그림2. 숍하우스의 구조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hophouse-prototyp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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