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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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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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6월 말에는 4박 5일 동안 백두산을 다녀왔다. 패키지여행이었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일정을 짤 수는 없었다. 또 아내와 함께 가는 길이어서 동행도 배려해야 했다. 노정을 따져 보자면 인천공항-> 대련-> 통화(1박) -> 백두산 북파 ->이도백하(2박) ->백두산 서파 ->통화(3박) ->집안 -> 단동(4박)-> 대련-> 인천공항으로 이어지는 코스였다. 요즘의 백두산 여행은 위의 경우처럼 북쪽벽과 서쪽벽을 번갈아 오르는 것이 인기를 끈다고 했다. 서파로 오르는 길은 2007년 여름에 갔었기 때문에 북파만 가도 될 것이었으나 여행사에서는 그렇게 가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팀이 구성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12년 전에 백두산으로 갈 때는 인천항->단동 ->통화-> 백두산 ->집안-> 단동으로 이어지는 뱃길과 버스 노정이었다. 이 때의 노정은 다른 것은 제쳐 놓고 거의 고구려 유적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백두산과 집안, 환도산성, 오녀산성 등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당시는 만주라든가 좀 더 넓게는 중국이라든가 하는 공간이 시야에 들어올 틈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런 특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대련에서 버스를 타고 요동 벌판을 달린 것, 6월이어서 산을 수놓은 밤꽃이라든가 백두산의 야생화 등을 구경한 것이나 이미 초여름에 접어들었음에도 산의 정상에는 군데군데에 잔설과 빙벽이 남아 있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림 1> 세계 최고 높이의 화산 호수인 천지. 일부가 장백폭포로 흘러 나와 송화강의 원류가 된다.
나는 여행에서 최종 목적지를 물론 중시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달리는 차창을 통해서 보는 주변의 풍경에도 될 수 있는 대로 눈을 떼지 않는다. 그 풍경에는 농촌들, 인민들, 특산물들이 포함되기 때문에 의외의 소득을 얻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여행은 그 점에서 타지의 삶을 관찰하면서 그것을 통해 ‘관광’하는 효과를 노리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대련 일대는 중북부 만주처럼 드넓은 평야로 이어졌다. 보통 요동평야라고 불리는 이곳은 오랫동안 밭농사지대였을 것이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논에 벼가 자라고 있었다.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농업생태계가 바뀐 셈이다. 아마 최근의 일일 것이다. 지도를 보면 대련의 위도가 평양과 비슷하므로 논농사가 가능할 것이다. 논농사와 밭농사의 경계선은 대략 북한과 접경하고 있는 집안쯤이었다. 어느 논에서는 벼와 옥수수가 동시에 자라고 있었다. 결국 만주에서도 해안가 혹은 남쪽의 저지대 쪽이 논농사에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전통적으로 구분해 왔던 수전과 한전이라는 중국농업의 오랜 관행은 요동평야를 중심으로 큰 변화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그림 2> 백두산 가는 길의 농촌 경관. 마을 뒤쪽의 산자락을 개간하여
옥수수와 같은 밭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사실 이번 여행의 백미는 백두산이었다. 6월에도 잔설과 잔빙이 있을 정도의 고산이고, 세계에서 가장 고지에 있는 최대의 화산 호수이자 끊임없이 물을 담고 있는 천지가 있고, 그곳에서 흘러내리는 장백폭포와 그곳에서 용솟음치는 온천수 등은 이 산의 특색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동행한 아내는 유럽이나 남미 어느 곳보다 뛰어난 경관이었다고 다소 감격스런 어투로 이야기 했다.
뛰어난 경관 속에는 대략 만주 중남부의 거점 도시 통화通化 부근에서 백두산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자작나무 숲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자작나무는 백두산 정상으로 오를수록 그 시원한 자태를 잃고,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 듯이 보이다가 정상 부근에서 고산지 풀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 뿐만 아니라 빽빽하게 들어선 침엽수도 오랫동안 이 산을 지켜왔을 터이고 그 덕에 백두산, 곧 중국의 장백산 일대는 중국에서도 으뜸가는 숲의 제왕으로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광대무변의 숲이 없는 중원에서 볼 때 이곳은 황금의 땅이라고 해도 좋을 터였다.
<그림 3> 백두산에서 바라본 중국측 고원지대. 외견상 숲이지만,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천상의 보물창고다.
청나라 때에 백두산에서 나오는 산물은 갖가지였지만 그 중에서도 인삼은 특수한 의미를 지닌 상품이었다. 누루하치 시절부터 백두산 일대의 인삼은 후금과 청의 재원이자 자신들의 정체성으로까지 인식하여 외부인이 이곳에 들어와 채취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인삼 중시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그것은 일단 백두산 일대, 연변지역, 훈춘지역, 북한의 양강도 일대가 산삼이 자라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산삼의 수직분포는 해발 800미터에서 2,000미터, 섭씨 20도 전후인데, 이러한 조건이 산삼이 자라기에 최적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그 지역민들의 인심에 대한 믿음도 과거보다 강화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 4> 집안시 외곽의 식당 마당에서 보게 된 북한 산삼. 휴게소나 식당,
호텔 부근에서는 백두산에서 채취한 산삼, 장뇌삼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백두산에 오르내릴 때에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지만, 휴게소나 식당, 호텔 주변에서는 예외 없이 백두산에서 캐 왔다는 산삼이나 장려삼 혹은 북한 산삼이라고 들고 나온 상인들이 적지 않았다. 통화에서 집안으로 가는 도중에 들른 휴게소에서 조선족인 듯한 사람이 북한 산삼이라면서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통화 주변의 식당에서는 장뇌삼을 파는 중국 노점상이 서툰 한국어로 호객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보다 인상 깊었던 장면은 통화에서 집안으로 가는 노변의 산자락을 가득 메운 푸른색 혹은 검은색 비닐막이 덮인 인삼밭이었다. 이 일대의 인삼밭이 몇 헥타인지, 거기서 생산되는 인삼의 총량이나 품질이 어떤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길림성 당국의 통계에 따르면 2012년도 길림성 전체 면적으로는 약 60평방킬로미터, 생산량은 약 2만톤 정도라고 한다. 통화나 이도백하 등의 숙소 부근에서는 대개 장려삼을 많이 팔고 있었는데, 산에다 인삼을 뿌려서 생산되는 장려삼의 양이 또 얼마인지는 알 수 없고, 이곳에서 유통되는 북한인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림 5> 집안 일대 농촌에서 재배되고 있는 인삼.
인삼은 길림성의 농산물량에서 옥수수에 이어 2위를 차지할 정도로 많이 생산된다.
백두산 일대의 특산품인 버섯이나 약초, 녹용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것들이 1세기 이전에는 어떤 양상으로 채취되거나 재배되어 가공 유통되었는지는 제대로 아는 바가 없으나 버섯의 경우 농협 마켓이나 특산품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식품류였다. 예컨대 백두산의 송이버섯은 최고급 상품에 해당하며 식당에서도 송이버섯+소고기는 한국인들이 매우 선호하는 메뉴였다. 그보다 싼 값의 목이버섯은 식사 때마다 빠지지 않는 식당의 단골메뉴이기도 하였다.
<그림 6> 단동의 호텔 식당에서 본 송이버섯된장. 된장에 송이버섯을 버무려 만든 가공식품이다.
우리들은 단동의 호텔에서 마지막 아침을 먹다가 그곳에서 캔에 든 송이된장 6개 들이 한 세트를 사들고 왔다. 영지된장도 하나 끼워주었는데, 말하자면 송이나 영지도 가공식품으로서 한몫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통화에는 약초를 자원으로 한 제약회사가 많았던 것도 눈에 띄었다.
백두산은 자연 경관으로서도 세계 어느 명승지 못지않게 뛰어난 곳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삶의 안식처요, 먹거리를 제공해주는 식량자원의 보고이자 재부의 원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백두산은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은 성소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장에서 마주친 관행 22】
유장근 _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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