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지난 6월4일로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건이 30주기를 맞았다.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중국 대륙에서는 어떠한 공식적인 언급도 나오지 않는 가운데, 타이완에서는 톈안먼 시위 당시 탱크를 가로막은 청년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전시되고 홍콩 시민들이 빅토리아 공원에서 추모집회를 열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여기에 한창 중국과 무역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이 중국 정부에 희생자 공개,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며 중국의 인권 상황을 비난하고 나서자, 중국 측은 이를 ‘내정간섭’으로 규정하고 정치적 혼란에 대한 중국 정부의 올바른 대응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중국이 엄청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고 맞섰다.
대륙 바깥에서만 요란할 뿐, 정작 내부에서는 침묵과 통제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톈안먼 사건에 대한 제대로 된 규명과 평가가 가로막혀 있는 현실은 이 사건에 참여했던 이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나아가 이렇게 역사를 제대로 교육하지 못해서는 당시 시위를 통해 주장했던 가치와 지향은 잊혀지고 정치에 대한 사회적 참여도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 역시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특히 톈안먼 사건이 ‘잊지 않으려는 노력’ 속에 촉발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현대 중국에서 톈안먼 사건은 1976년과 1989년 두 차례 있었다. 문화대혁명이 막바지로 접어든 1976년, 4월 청명절이 되자 베이징 시민들은 같은 해 1월 사망한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를 추모하기 위해 톈안먼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정부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화환을 갖다 놓고 저우언라이를 칭송하는 시를 낭송하고 대자보를 붙였다. 그리고 여기에 사인방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기도 했다. 추모 열기가 시위로 번져가자 덩샤오핑(鄧小平)은 이 사건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해임됐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죽고 사인방이 몰락하고서야 그는 정치 무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
두 번째 톈안먼 사건은 1989년에 일어났다. 이번에는 후야오방(胡耀邦) 전 공산당 총서기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다. 돌아온 덩샤오핑이 진두지휘하는 개혁개방의 물결 아래 80년대 중국은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국가 주도의 성장전략에서 나타나는 부정부패와 빈부격차, 여기에 인플레이션과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는 긴축정책까지 겹쳐지며 도시민, 노동자, 농민 등 국가정책을 이용해 한 몫 잡을 기회를 갖지 못한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혁을 주장하는 지식인들을 후원하고 스스로도 당 내 개혁을 지지했던 후야오방이 1989년 4월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학생들은 행진과 시위를 벌이며 관료들의 부패를 비판하고 언론의 자유를 요구했다.
이들은 6월4일 진압됐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톈안먼 광장으로 탱크가 들어와 대규모 유혈 진압을 강행했던 ‘톈안먼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6월4일’은 중국에서는 그저 날짜가 아닌 민감한 어휘로 분류되어 인터넷에서 검색이 금지되거나 삭제된다. 그래서 이날을 기억하기 위해 사람들은 ‘5월35일’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단순한 말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5월35일식의 표현은 고인을 추모함으로써 정치적 의지를 표명했던 톈안먼 사건의 행위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상대를 손가락질하고 그의 행위에 직접 분노를 터뜨리기보다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기호화하고 상징으로 내세움으로써 이상을 투사하고 요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작가 위화(余華)는 5월35일이 하나의 표현방식, 예술이 되었다고 말한다. 정부의 검열을 피하느라 암시와 비유, 풍자 등 다양한 수사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중국어가 다채로워지고 풍부한 상상력을 담은 정치언어가 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5월35일은 역설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현재적 의미를 담은 기호가 되어가고 있다.
소모적인 정치투쟁에 지친 1976년의 중국인들이 중용을 지키며 공무에 헌신한 저우언라이를, 부정부패에 대한 불만을 터뜨릴 통로가 없었던 1989년의 중국인들이 개혁을 지지했던 후야오방을 기억함으로써 자신들의 요구를 담아내고자 했다면, 현재를 사는 중국인들은 5월35일이라는 허구의 기호를 통해서, 혹은 그것과 유사한 표현을 끊임없이 만들어냄으로써 정치에 참여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지만, 과연 톈안먼 사건을 기억하고 언젠가 사건의 진실과 의미를 규명할 때까지 지속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생긴다. 새로운 기호의 생산이 처음에 주었던 신선한 충격과 효과는 점차 감소할 것이고 정치 허무주의에 빠질 위험도 있다. 이렇게 한계가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허구의 기호에 기대어 우회적인 의사표현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 중국의 정치현실이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을 하나하나 실현해가고 있는 지금, 중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번영을 구가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세계역사를 통해 우리는 침묵하던 민심이 정치 지도자의 죽음(두 차례 톈안먼 사건), 학교규정에 대한 대학생들의 반발(1968년 68운동), 열차 안에서 벌어진 학생 간의 충돌(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과 같은 작은 마찰로 일어난 불꽃에 의해 폭발하는 것을 보아왔다. 중국이 진정한 의미의 강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역사와 민의에 대해 보다 진지한 성찰을 기울여야 한다. 역사로서 톈안먼 사건을 직시하는 것, 그에 대한 비판과 평가를 겸허히 수용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 시작이 될 것이다.
김남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상임연구원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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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19년 6월 10일자 『국민일보』 (인터넷판)칼럼 [차이나 로그인]에 게재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