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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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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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의 제자인 에티엔 발리바르는 1990년대부터 폭력이라는 문제를 다시 사유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을 심도 깊게 진행해 왔다. 폭력을 제거하거나 적어도 제어하려는 전통적인 모델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가 국가에 의한 폭력적 수단들의 독점을 통해 사회로부터 폭력을 제거하려는 ‘폭력 독점’(monopoly of violence)의 모델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는 지배계급(또는 그들을 대변하는 국가)의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한 혁명적 폭력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대항폭력’(counter-violence) 모델이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지배의 수단으로서든 그런 지배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서든 간에 모든 폭력은 잘못이라고 비판하는 ‘비폭력’(non-violence) 모델이다. 맑스주의는 통상 두 번째 모델, 즉 대항폭력 모델을 특권화해 왔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는 어느 정도까지는 사실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주지하다시피 첫 번째 모델은 토마스 홉스에 의해, 그리고 세 번째 모델은 마하트마 간디에 의해 특권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맑스주의 내에 대항폭력 모델과는 개념적으로 구분될 수 있으면서도, 그렇다고 폭력 독점 모델이나 비폭력 모델로 환원될 수 없는 또 다른 폭력에 대한 정치가 경향적으로 구성되어 왔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반폭력 모델(anti-violence)이라고 부른다. 반폭력의 정치는 폭력에 맞선 투쟁의 정치로서, 지배계급의 압도적인 폭력에 저항함에 있어서 폭력적 수단을 사용할 필요성이 있다고 인정하지만(따라서 비폭력 모델은 채택할 수 없다), 동시에 모든 폭력적 수단의 활용은 극단적 폭력을 제한하거나 감축하여 (전쟁이 아닌) 정치 그 자체가 가능해지는 방향으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관념을 핵심으로 한다.
맑스 자신의 경우를 먼저 살펴볼 것 같으면, 맑스는 <공산주의자 선언>(1847년)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투쟁 속에서 점점 자신을 정치적으로 통일시켜나가 결국 부르주아지와 계급 대 계급의 최후결전을 치르고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할 수 있으리라는 폭력혁명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848년 혁명이 잔인하게 진압되어 실패로 돌아가자 맑스는 더 이상 이런 전망을 유지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정치경제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했으며, 런던 도서관에 파묻혀 이후 근 20년을 작업하여 <자본> 1권(1867년)을 출판하게 된다.
<자본>에서 맑스는 예전과 달리 역사의 방향에 관한 세 가지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하게 된다. 하나는 <자본>의 32장에 제시되어 있는 생각인데, 이는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이미 나왔던 메시아적 종말론 테마의 반복으로, 혁명을 수탈자들의 수탈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자본>의 33장에 제시되어 있는 생각인데(혁명을 논하는 32장이 마지막 장이 아니라 그 뒤에 33장이 추가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 거기에서 맑스는 중심의 자본주의 국가 내의 모순들이 식민지에 대한 착취를 통해 완화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자본>에 나와 있는 공장 감독관 제도에 대한 그의 분석이다. 여기서 그는 공장 감독관이 국가의 편에서 파견된 ‘착취의 엔지니어’라고 볼 수 있지만, 동시에 공장 감독관은 아동노동 착취를 비롯한 자본가들의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초과착취를 제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파악하면서, 계급적대에 관해 자신이 과거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일정하게 수정한다. 과거에 맑스는 계급적대를 화해 불가능한 것이라고 보았으며, 따라서 (누가 이기든 간에) 계급 대 계급의 폭력적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여겼지만, 이제 <자본>에서는 계급적대를 화해 불가능한 것이 아닌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 보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이 (여론 등을 활용하고 다른 시민 세력들과 연대하여) 자본가 계급의 극단적 폭력을 제어하면서 자본주의를 좀 더 민주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분명히 <자본>에서 혁명에 대한 사유는 결코 사라지지 않지만, 그것은 역사가 발전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한 경로로서만 고려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부르주아지의 폭력에 맞서는 반폭력의 정치가 폭력적 혁명의 정치의 곁에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 나란히 제출되고 있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맑스가 바로 이 두 가지 가능성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었지만, 얼마 안 있어 발발한 1871년의 파리 코뮌으로 인해서 그 망설임이 강제로 중단되었다고 말한다. 맑스는 파리 코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수 있다고 보면서 봉기 이전에는 봉기에 반대했지만, 대중들이 실제로 봉기에 나서자 찬성 입장으로 돌아서서 파리 코뮌에 실천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동참하게 된다(비극적이게도 맑스의 애초의 예상은 틀리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으며 맑스는 이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맑스주의에서 또 다른 반폭력의 정치의 거대한 사례는 레닌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데, 레닌은 혁명 그 자체를 하나의 반폭력의 정치로 만들어낸 최초의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제2인터내셔널은 반전 입장을 취하고 있던 많은 좌파 정치인들이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애국주의와 참전으로 돌아서면서 돌이킬 수 없이 붕괴하게 되었다. 끝까지 반전의 입장을 고수했던 극소수의 사람들(레닌,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등)은 짐머발트 회의(이른바 제2.5인터내셔널)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 전환할 것을 결의했지만, 유일하게 레닌만이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를 이론적으로 연구했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탐독하면서 레닌은 전쟁이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라는 통찰을 얻어냈으며, 따라서 전쟁 초기에는 대중들이 애국주의에 고무되어 전쟁에 찬성할 것이지만 장기간 지속되는 전투 속에서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하게 되면 결국 근본적인 불만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예상하고, 볼셰비키 조직원들로 하여금 제국주의 군대에 스스로 지원하게 만들었다. 이 조직원들은 처음에는 전쟁에 나온 다른 병사들과 함께 전투를 하면서 그들과의 유대감을 발전시키다가 전쟁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이 쌓여나가기 시작하면 그 불만을 정치적으로 조직해내는 임무를 맡았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발발했을 때 만들어진 대중조직은 단순한 노동자 소비에트가 아니라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였으며, 재향 군인들은 이 평의회 조직의 거대한 한 축을 구성했다. 레닌은 바로 이런 정치적 개입을 통해 러시아를 혁명적으로 패배하게 만듦으로써, 사실상 1차 대전이라는 거대한 폭력 그 자체를 멈출 수 있었다(실제로 2월 혁명이 발발했을 때 망명 중이었던 레닌은 독일 정부를 찾아가, 만일 자신을 러시아 한복판으로 들여보내만 주면 혁명을 일으켜서 러시아를 전쟁에서 빼내고 이 전쟁을 멈추게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독일 정부로부터 그 유명한 ‘밀봉열차’를 받아내서 러시아로 멈추지 않고 들어가 10월 혁명을 성공시킨다).
반폭력의 정치의 또 다른 사례는 바로 대장정의 마오에게서 발견된다. 마오 또한 국공합작이 깨진 이후 중국 공산당이 처해 있던 거대한 열세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제시된, ‘방어전이 늘 공격전보다 용이하다’는 테제를 독특하게 해석하여 중국 상황에 적용시켰으며, 중국 공산당원들이 인민대중 속으로 숨어들어가도록 만드는 전략을 구사했다. 공산당원들은 이렇게 대중 속으로 도망침으로써 그 속에서 전세의 역전을 도모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는데, 그 속에서 그들은 주민대중을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편으로 돌려놓을 수 있었고, 또한 다양한 소규모 게릴라전을 수행함으로써 전쟁에 필요한 무기 및 전쟁기술들을 확보하여 마침내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불가능해 보였던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으로까지 이어지는 이 놀라운 대역전극은 지배계급의 압도적 폭력에 대해 맞서 싸우기 위해 무대의 중앙을 단번에 장악하는 전술(예컨대 파리 코뮌의 전술)을 구사하지 않고 오히려 대중들 속으로 숨어들어가 정치와 방어전쟁을 결합하는 길을 마오가 찾아낼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반폭력의 정치로서 혁명을 사유하고 또 성공시켰던 레닌과 마오의 정치는 혁명 성공 이후 오히려 홉스적인 폭력 독점의 모델로 도착되고 말았을까? 우리는 다음 칼럼에서 이 문제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프랑스의 마오 5】
최원 _ 단국대 철학과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