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
2019.04
-
2019.04
-
2019.04
20세기 영국의 역사학자 홉스봄은 20세기를 “재앙의 시대”라고 불렀다. 사실 20세기는 “화약혁명” 이래 진행된 지구적 군사화 경향의 종착점이었다. 국제적 분쟁의 해결 방식으로서의 전쟁은 그래서 20세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내각전쟁(Kabinetts Krieg)” 형태의 전쟁이 종말을 고하고 총력전 체제가 일반화되면서 국민국가는 기본적으로 군사화 논리를 내면화하게 되었으므로 전쟁과 보통사람들의 삶은 분리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군사화된 사회는 교육, 오락, 경제, 문화, 스포츠 등 모든 영역에서 군사적 논리를 적용하는데 익숙해 졌다. 회색지대 혹은 중간지대의 존재를 결코 허락할 수 없는 군사화 사회는 선악 혹은 피아의 이분법적 논리로 세계를 구분하고 상대편을 적대시하는 데 골몰하는 현상을 만들어냈다. 악덕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러한 현상을 활용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대화와 토론 보다는 힘의 논리가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가의 군사화 현상은 국민국가의 방어적 혹은 공격적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극단적으로 나아가면 “군사형 사회” 즉 군국주의 국가를 탄생시킨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일본은 그 전형적 사례였다. 사회학자 스펜서(Herbert Spencer)는 “군사형 사회”의 특징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회에 대해 항상 전투행위의 준비”를 완비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따라서 군사형 사회에서의 최대 가치는 전쟁을 수행하는데 가장 적합한 형태가 무엇인지를 모색하는데서 찾아 진다.
이념적, 사회학적 분석과 관계없이 사실 군사화 경향을 추동했던 핵심적 요소는 사실상 시장의 논리 더 구체적으로는 기업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법으로서의 전쟁의 도구화였다. 이런 현상은 전쟁이 총력전으로 전개되면서 승리를 위해서는 국가 자원을 총동원하는 체제가 필요했고 그에 따라 국가체제가 전쟁에서의 효율성을 우선시하기 시작하면서 나타났다.
미국의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1961년 퇴임연설에서 군산복합체(Military Industrial Complex)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경제의 군사화가 초래할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영웅이었으며 군인출신의 대통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는 정치, 경제, 군사의 결합이 초래할 위험에 대해 깊은 우려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경고는 이미 2차 세계대전 이전에 한 양심적 미군 장군에 의해 제기된 바 있었다. 1935년에 출판된 버틀러(Smedley D. Butler 장군: 의회명예훈장을 2회 수상)의 『전쟁은 사기다(War is a Racket)』는 전쟁을 통해서 이익을 챙기는 기업가와 정치인들의 실상을 자신의 체험을 기반으로 폭로하고 있다. 그래서 캐나다의 한 역사가(Jaques R. Pauwels)는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에서 ‘좋은 전쟁이란 없으며 모든 전쟁은 지배엘리트들의 이익을 위해 수행되었다’고 지적한다. 버틀러나 파웰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양차세계대전 시기 미국 지도부의 상당수가 파시즘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1) 그것은 기업의 논리에서 정치를 해석하는 자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었다.
군산복합체가 군사화 현상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그것이 보통사람들의 삶을 군사화시키는 가장 핵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 군수산업의 투자가 지역경제의 발전과 결합했던 선벨트(Sun Belt) 지역에서 군비축소는 군수산업의 축소이고 그것은 또한 일자리의 축소를 가져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군산복합체의 논리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한 언론인은 미국 경제의 군사화가 가져온 비극을 카타리나 허리케인이 루이지애나를 습격했을 때, 배수 펌프장의 설비가 100년이 넘은 낡은 것이어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는 참혹한 현실에 반영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더구나 냉전은 확인할 수 없는 위기를 조작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국방예산을 확대하기 쉬운 환경을 조성했으므로 군산복합체의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었고 군사화 경향은 저지되지 못했다.
그림1. 세계 무기수출국 순위. 출전 : SIPRI
아직까지 냉전의 잔재에 갇혀있는 동아시아의 국제환경은 동아시아 3개국의 시민사회가 군사화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스톡홀름 세계평화연구소의 자료에 의하면 현재 무기 수입국 상위 40개국 가운데서 중국 6위, 한국 9위, 일본 21위로 나타나있다. 무기 수출국 순위에서는 중국 5위, 한국 11위였다. 총력전의 개념을 고려한다면 국방비만으로 국가재정의 군사화 경향을 분석하기는 어렵지만 동아시아 국가들의 국방비 역시 여전히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꿈꾸는 일본은 국방비 지출에서는 한국을 제치고 중국 다음의 지위에 올라있다.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북한을 포함하여 동아시아의 군사화 경향은 여러 방면에서 심화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더구나 세계적으로 경제위기가 지속되고 탈출구가 불확실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전쟁의 위험을 걱정하고 있다. 힘의 논리를 통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환상’은 대중들을 동원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므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부추기는 자들은 그림자 속에 숨어서(심지어는 들어내 놓고) 증오와 대립을 부추긴다. 군사화된 사회가 만들어내는 증오와 대립은 거의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일상화되고 있다. 최근 한 일본 공무원의 “증오발언”은 편을 가르고 상대방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파렴치함이 어느 수준에서 일상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널리 유행하고 있는 일인방송에서 제공되는 정보들도 그것이 유통되는 사이버 공간이 하나의 전쟁터임을 보여주고, 거기에서도 승리를 위한 대립과 공포 혹은 편가르기 논리는 시청자의 확보를 위한 가장 기본적 전략으로 작동한다.
총력전 체제가 확고하게 제도화된 이래, 침략자들은 침략에 국민을 동원하기 위해, 침략을 받은 나라들은 침략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쟁 논리를 지속적으로 전파해 왔다. 그래서 군사화된 정치체제의 가장 심각한 형태로서의 파시즘은 생명력을 지속시켜올 수 있었다. 미국이나 일본/한국/중국에서 소위 신념을 말하는 상당수 사람들이 사실은 파시즘적 세계관을 가진 것은 아닌가 우려될 정도로 파시즘은 때로는 전투적 민족주의의 얼굴을 하고, 때로는 ‘지배이념’의 형태로 동아시아 사회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들이 말하는 이념은 실제로는 진영을 나누는 도구일 뿐 그 언어 자체가 가진 의미와 전혀 다른 편견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 놀랍게도 <국경없는 기자회>가 밝힌 일본의 언론자유는 180개국 중 67위이고 중국은 176위였다.(한국은 문재인 정권이후 상승하여 43위) 특정의 관점을 강제하기 위해서는 진실의 경쟁이 아니라 당파적 주장을 정당시 하는 추종자의 논리만이 의미가 있었으므로, 독재국가에서는 당의 힘으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금권의 논리가 언론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화된 문화의 확산 그리고 그 주도권 장악을 위한 전략으로서의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동아시아를 위기에 빠뜨리게 되면, 그것이 초래할 결과가 얼마나 끔찍할 것인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자기중심적 신성한 민족주의’의 인식이 아니라 공존과 소통을 위한 성찰적 역사인식을 성장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군사화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김태승의 六十五非 10】
김태승 _ 아주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1) 박인규, 「나치 도와 떼돈 번 미국 기업 눈감은 백악관과 추악한 2차 대전」, 프레시안, 2015.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 중 첫번째 것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그 외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https://pxhere.com/ko/photo/1058355
*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