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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1월호
생존의 조건 - 동남아 화상이 근대를 살아남는 법(下) _ 김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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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섬 동쪽에는 인도네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수라바야(Surabaya)가 있다. 수라바야는 그 특유의 위치 때문에 꽤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특히 정향과 육두구로 유명한 향신료 제도(Spice Islands)와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를 중개하는 해상 실크로드의 핵심도시라는 지리적 이점을 토대로 성장해 왔다. 수라바야 지역에는 한()씨 성을 가진 화예(華裔)들이 살고 있다.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라바야 지역 한씨 가문 최초의 이민자는 한 시옹콩(Han Siong Kong 韓松公)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673년 푸젠 장저우(漳州)현 텐바오(天寶)지역 출신으로 1700년 즈음해서 라셈(Lasem, 현재의 Rembang지역. 자바섬 세마랑과 수라바야 사이에 위치한 작은 항구도시)으로 이주하였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 지역 중국인 이주민의 딸과 결혼하여 1743년에 사망할 때까지 5명의 아들과 2명 혹은 4명의 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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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인도네시아 자바섬 수라바야 지역의 위치

 

흥미롭게도 5명의 아들들 가운데 장남으로 여겨지는 치엔콩(Tjien Kong 震公, 1720-1776)의 경우 당시 자바섬의 주요 종교였던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심지어 현지의 자바 여인과 결혼도 하였다. 반면 나머지 4명의 아들들은 푸젠 전통의 관습과 종교를 그대로 유지하였고, 결혼 역시 현지의 페라나칸(자바섬 현지에서 태어난 화인)여성과 하였다. 그에 따라 족보에는 첫째의 이름이 치엔콩으로 나오지만, 당시에는 소에로 페르놀로(Soero Pernollo)라고 불렸다고 한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자바섬에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끼치기 전에 건너 온 아버지와는 달리 2세대 한씨 오형제들은 18세기 초중반부터 자바섬을 점령하기 시작한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본격적으로 협력함으로써 가문의 영향력을 넓히게 된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수라바야를 포함한 동자바 지역의 경우 한씨 형제들인 치엔콩, 브위콩(Bwee Kong 尾公)등과 깊이 협력하여 그 식민지배를 공고히 하였다. 한씨 가문은 그 영향력을 수라바야를 중심으로 한 동자바 연해지역 전체로 넓혀가며 네덜란드 식민체제 아래에서 각종 고위직을 독점하였다. 2세대가 주로 각 대농장에서의 세금징수(Tax Farmer) 및 현지인과 식민지 지배세력 사이의 중개 등의 역할을 하였다면, 3세대, 4세대에 이르면 실질적으로 땅을 팔기 시작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방침아래 19세기, 20세기에 걸쳐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고, 각종 상품작물들을 재배하는 대지주 가문으로 성장한다. 특히 사탕수수의 왕으로 불렸고, 토지를 기반으로 금융, 부동산 산업 등에도 진출하였다고 한다.


바섬의 한씨 가문은 해당지역에서의 적응 및 생존을 위해 거리낌 없이 장남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현지 이슬람 가문의 여성과 결혼시켰으며, 그 이름과 후예들 역시 이슬람의 관행을 그대로 따르도록 했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이슬람 세력과의 네트워크를 충분히 활용하여 동자바 지역의 거대 가문으로 4세대, 5세대에 걸친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한씨 가문의 성장과 영화에는 일본상인과 인도상인과 같은 본국과의 정치적관계와 관련한 스토리는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이 가문의 구성원들이 당시 많은 화상들이 하고 있던 (본국의 차나 비단, 도자기 등을 수입해서 현지물품을 거래하는) 중개무역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현지의 정치세력과 연계를 맺고, 침략해 온 네덜란드 인들에게 협력하면서 자신들만의 구역을 형성하였을 뿐이다. 물론 중화인이라는 문화적프리미엄이 그들의 적응에 도움이 되었을 수는 있다. 17, 18세기 중국은 자바섬의 현지인들에게 첨단문명의 상징으로 여겨졌었다는 기록(실제 자바인들은 중국인들처럼 보이기 위해 그들의 음식과 의복을 따라했다는 기록이 있다)도 있으니 그러한 이득을 받았을 수는 있었겠지만, 지난 연재에서 밝힌 것처럼 본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보호나 관심을 받은 바는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푸젠출신 화상들의 특징에 관해 저명한 화교사학자인 왕궁우(Wang Gung-Wu)제국없는 상인(Merchants without Empire)’이라고 명명하였다. 사실 지난 5월 연재에서도 밝혔듯이, 중화제국이 해외에 거주하는 본국인들의 정치적 보호 및 신분에 대해 인식하게 되는 것은 19세기 중후반 이후다. ‘화교라는 단어가 생겨난 것 역시 이 시기라고 추정되고 있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북양정부가 화교들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었던 것과는 달리 쑨원의 경우 1924년 광저우에 화교사무국을 설치하고, 그들의 지위에 대해 근대적 국가의 관점에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그를 이어받은 장제스의 남경국민정부 역시 화교화인들에 대해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그들의 축적된 부를 본국의 근대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뒤바뀐 본국 정권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제국없는 상인들은 이미 본국과의 정치적 연계 및 지원없이 해외에서 각자도생하는 생존전략을 그들의 상인 DNA에 깊이 새겨놓고 있었기 때문인지, 이러한 호의적인 본국의 태도를 그리 감사히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중국은 영국제국이나 일본제국과 같은 강대국이 아닌, 침략을 당하는 아시아의 지는 해였기 때문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심지어 본국은 화상들에게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무조건적인 원조를 요구해왔다. 그러한 측면에서 오히려 이러한 변화된 상황 역시 그들이 활용해야 할 상업적 수단정도로 여긴 듯하다. 예를 들어보자.

 

1930년대에 이르면 만주사변으로 인해 반일 감정이 전 중화권을 휩쓸게 되는데, 여기에는 해외의 중국계 기업가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홍콩과 싱가포르의 화상들은 연일 국화(國貨)운동을 벌이며 캠페인, 광고 등을 통해 일본 상품을 배척하고 국화를 애용하자고 난리법석을 피웠는데, 그것이 과연 고국의 위기를 보고 분개한 기업인들의 갸륵한 애국심의 발로였을까? 쿼 훼이잉(Kuo Huey-Ying) 박사의 경우 그들이 이전에 했던 선택을 상기시킨다. 19191차대전 종전직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일본이 주장한 산동지방에 대한 조차권 등 21개조 요구에 반응해 북경을 중심으로 거세게 일어난 5.4 운동의 여파로 전국적인 반일감정이 격해졌고, 많은 이들이 국내의 기업가들뿐 아니라 해외의 화상들에게도 일본 제품 보이콧 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홍콩중화총상회(CGCCHK, Chinese General Chamber of Commerce Hong Kong)와 싱가포르 중화총상회(SCCC, Singapore Chinese Chamber of Commerce)를 비롯한 상해, 광주 등지의 개항장 도시의 상인들까지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930년대와 1919년의 이러한 차이는 무엇인가? 1930년대 들어 그들의 애국심이 폭발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쿼 박사의 연구는 이러한 홍콩 및 싱가포르 화상들의 정치적 선택 이면에 숨겨진 경제적 요인을 밝힌다. 싱가포르 화상들의 반일운동 참여는 일본과의 동남아시아 무역시장에서의 경쟁력 약화에 그 원인이 있었다. 특히 값싼 고무창 구두를 앞세워 기존 화상들과의 신발시장 경쟁에서 일본상인들이 우위에 섰던 것이다. 일본제품은 1934년이 되면 신발시장에서 거의 80%에 달하는 독점적 지위를 누리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화상들의 주요 거래품목이었던 차() 시장에서의 경쟁에서도 역시 일본에 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래 차로 유명한 지역이 푸젠이다. 유명한 반() 발효차들, 철관음, 대홍포, 무이암차 등등이 모두 이 지역이 원산지이고, 이러한 차 시장을 잡고 있는 푸젠출신의 상인들이 싱가포르 화상그룹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인 대만으로부터 대량으로 재배되어 밀려오는 우롱차와의 가격경쟁에서 밀리게 됨으로써 수많은 차 상인들이 시장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외에 여러 품목에서 일본상인들과 동남아시아시장을 둘러싸고 경쟁을 벌이다 일패도지하게 된 화상들이 반일 보이콧 운동에 열렬히 참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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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현재의 싱가포르 중화총상회 건물 전경

 

홍콩 상인들의 경우 일본과의 경쟁보다는 광저우와의 경쟁에 그 원인이 있다. 광저우 해관(海關)수입을 둘러싸고 기존 영국에 의해 운영되던 해관이 장개석 통일정부의 수립이후 그 운영권이 중앙정부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에 광저우 경제계와 홍콩의 화상 기업가들 사이에 긴장관계가 형성되었다. 영국에 의해 해관이 운영될 당시에는 홍콩의 화상들이 영국적임을 내세워 5%의 관세 할인을 누렸고, 가격경쟁에서 앞선 홍콩의 화상들이 광저우 상인들에 비해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29년 남경국민정부가 해관 운영권을 되찾음에 따라 영국적으로서 우위를 누리던 검은머리 외국상인들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일어난다. 그동안 아니꼬운 꼴을 보아 온 광저우의 상인들은 당연히 당한 것이 있으니 외국인으로 대우하여 관세를 높게 책정하자고 하였고, 홍콩의 화상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우리가 생산하는 제품은 국화다라는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생겼던 것이다. 홍콩상인들의 반일 보이콧과 국화운동의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인종, 문화, 종교, 공동체에의 소속감 등은 흔히 인류문명의 형성에 중요한 요소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화상들에게 이러한 가치들은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요소들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한 지역에서 수 세대에 걸쳐 공동체를 형성한 화상들의 경우에는 본국의 지원없이, 심지어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낯선 타국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절박함의 발로이고, 여러 지역에 초국적으로 무역네트워크를 형성한 근대 화상들의 경우 여러 정치체에 협력해야 한다는 생존조건으로 인해 형성된 화상들만의 특징이다. 많은 화상들이 상업적 이익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 그들 자신의 종교, 소속감, 문화, 심지어는 인종까지도 결정하였고, 그러한 특징이야말로 그들이 이토록 다양한 정치/사회/문화/경제적 환경을 지닌 동남아시아 각 국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해 준 밑거름이었다.

 

다시 한번 상기하자면 아시아의 근대는 아수라장이었다. 특히 근대 식민시기가 마무리되고, 냉전으로 넘어가는 시기인 1,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아시아의 수많은 공동체들은 국가/인종/종교/문화/가치의 경계가 무너지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겪었고, 번성했던 인도와 일본 출신의 상인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몇몇 소수의 예외적 상황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인도와 일본 상인들은 그들이 기대고 있던 제국의 패배 및 철수와 함께 동남아시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 세기동안 이방인으로써 본국에 종속되지 않고, 상업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DNA를 가지고 변화무쌍하게 적응해온 화상들의 경우 전쟁기를 거치면서도 생존하였다.

 

심지어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회의에서 중국이 선포한 해외거주 중국인의 이중국적 금지정책을 맞이하여 수많은 화상들이 그 상업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과감하게 중국인으로서의 국적을 포기하였다. 그렇게 본국과의 관계가 끊어지나 싶더니 중국의 개혁개방과 더불어 중국정부의 요청으로 동남아의 화상들은 각종 혜택을 받으면서 다시 본국으로 진출하였다. 18세기 한씨 가문의 수라바야 진출부터 20세기 국화운동을 거쳐, 현재 중화계 외국기업으로써 조상들이 건너 온 땅에 진출하기까지, 동남아 화상들이 보여주는 생존력은 이민자 그룹으로써 수세기동안 끊임없이 타협하고 적응한 노하우가 축적되어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인도 및 일본 상인과는 달리 때로는 다중국적, 때로는 무국적의 성격을 띠는 화상들의 이러한 특징이야말로 현대 다국적 기업의 원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10】


김종호 _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s://www.google.com/maps/@-5.6868931,112.8135071,7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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