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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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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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부터 【프랑스의 마오】라는 제목으로 최원 교수님의 글을 연재하고자 합니다. 최원 교수님은 프랑스 현대철학 연구자로, 시카고 로욜라 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단국대 등 몇몇 대학에 출강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라캉 또는 알튀세르』(난장, 2016) 등이 있으며, 역서로 에티엔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도서출판b, 2007), 워런 몬탁의 『알튀세르와 동시대인들』(난장, 근간)이 있습니다. 그는 최근 언어철학, 예술철학 등으로 관심 분야를 확장해 나가고 있으며, 벤야민, 블랑쇼, 데리다의 논의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마오쩌둥은 알튀세르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좌파 철학 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독해되고 수용되어 왔는데, 본 컬럼을 통해 마오에 대한 프랑스적 수용의 사례들을 소개하고 그 속에서 혁명의 문제, 계급독재의 문제, 국가의 문제, 폭력의 문제 등을 다룰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
최근 미국의 버소(Verso) 출판사는 온라인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가 어떤 중국 철학자와 가졌던 마오쩌둥에 대한 대담을 소개하면서 바디우 자신의 발언에서 따온 「마오는 거의 무한한 방식으로 사유한다(Mao Thinks in an Almost Infinite Way)」라는 구절을 제목으로 붙여줬다. 원래 이 대담은 얼마쯤 전 바디우가 중국으로 여행을 갔을 때 행해졌던 것인데, 나중에 그가 녹취록을 다시 찾아봤을 때에는 중국 철학자의 이름이 기록에서 누락되어 있었고 바디우 자신의 기억에서도 이미 지워져 있었다고 한다.
버소 출판사 측 편집자(아마도 중국계 미국인쯤으로 추정되는)는 바디우가 최근 뉴욕에서 중국 철학자의 역할을 중국인 배우에게 맡기고 대담을 다시 진행했다고 전하면서도, 우리는 이 대담을 통해 서양 철학자의 “오리엔탈리즘”을 엿볼 수 있다는 다소 시니컬한 논평을 덧붙였다. 마오의 문화 대혁명이 역사적으로 실패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그 취지를 여전히 일정하게 옹호하는 바디우의 입장이 동양에 대한 모종의 신비화에 기초한 것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적은 얼마간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우선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말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 자체가 서양인의 동양에 대한 환상을 지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 동양인 자신이 서양인의 눈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현상을 지시하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마오의 문화혁명을 단순히 치명적인 실패로서만 바라보는 시야가 서양에서는 오히려 일반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렇게 바디우의 견해를 “오리엔탈리즘”이라고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서양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프랑스 좌파 철학자들의 마오에 대한 상이한 관점들 간의 차이를 지워버리는 것일 수 있다. 이 관점들은 때로 갈등적이며 심지어 경우에 따라 양립 불가능하기도 하다.
얼마간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60년대와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좌파 철학자들은 마오의 사상에 상당히 경도되었었다. 특히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라는 맑스주의 철학자와 그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활동하던 다수의 청년 좌파 철학자들이 그러했는데, 여기에는 바디우 자신뿐만 아니라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등이 포함된다. 이 가운데 특히 바디우가 특이한 점은 60년대에 그가 보여줬던 마오에 대한 열광적 동의를 (내용상 어떤 변화도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여전히 공공연하게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예컨대 발리바르와 같은 경우 마오에 대한 평가가 다소 복잡하다. 중국의 인민해방전쟁기의 마오는 다소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유보 없는 긍정은 아니다), 문화혁명 시기의 마오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마오가 발리바르 안에서도 여전히 흔적으로 남아있다고 우리는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랑시에르 또한 오늘날 문화혁명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진 않을지 모르겠으나 그가 지식인과 무지대중 간의 지적 차이를 완전히 거부하고 모든 사람은 지적으로 평등하다는 주장을 펼칠 때 나름대로 그는 어떤 마오주의를 계속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들 청년 좌파 철학자들(피에르 마슈레, 레지스 드브레, 자크-알랭 밀레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은 1964년 말에 창설되었다가 68년 5월 이후 해산된 『맑스-레닌주의 저널(Cahiers marxistes-léninistes)』의 가장 젊은 필진을 이루었는데, 이들은 모두 알튀세르의 제자들로 스승의 권유를 받아들여 그 저널의 점점 더 뚜렷해지는 친-중국화의 경향성을 만들어냈다.
알튀세르 자신은 무엇보다 마오의 ‘모순론’에서 많은 이론적 영감을 이끌어 냈으며, 변증법을 헤겔의 종말목적론적이고 관념론적인 논리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위해 그것을 이용했다(그의 첫 번째 저서인 『맑스를 위하여』에 그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비록 알튀세르는 마오의 문화혁명에 대해서는 공공연한 발언은 자제했지만, 그는 『맑스-레닌주의 저널』 14호에 익명으로 「문화혁명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했으며 거기에서 문화혁명을 맑스와 레닌이 구상했던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을 최초로 실행에 옮겼던 “유례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즉 문화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단지 권력 장악이나 소유관계 및 생산관계의 변혁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이데올로기의 혁명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며, 이에 미달할 경우 자본주의로 후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러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행해진 전대미문의 시도였다는 것이다.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라고 이해될 수 있지만, 사실 알튀세르는 이 글을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지 않았으며, 이후 문화혁명에 대해서도 다시 논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런 상이한 입장의 결들이 보여주는 차이점들은 그만큼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방식들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런 쟁점들을 그 자체로 살펴보는 일이 분명 필요할 것이다. 프랑스의 마오가 중국의 마오와 같은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질문도 얼마간 유의미하겠지만, 프랑스의 마오에 대해 사유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봐야하는 것은 프랑스의 마오가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과연 중국의 마오는 하나일까).
바디우가 자신의 대담에서 “공산주의적 정치를 추구하기 위한 근본적 경험은 문화혁명이지, 소비에트 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마오는 사회주의 국가 내에서 대중 행동이라는 수단을 통해 상황을 혁명적인 방식으로 공산주의를 향하게 만들려 시도했던 자”였으며, “국가가 공산주의적 해결책이 아니라 단지 그 혁명을 위한 새로운 콘텍스트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유했던 사람이었다고 말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였을까? 왜 그는 자신의 대담에서 갑자기 문화혁명을 파리 코뮌(1871년)의 경험과 연결했던 것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지 않고 그의 논의를 단순히 “오리엔탈리즘”이라고 기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앞으로 이 연재를 통해서 우리는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 특히 바디우만이 아니라 발리바르의 마오에 대한 이런저런 논의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의 의도는 마오 또는 마오의 사상을 부활 또는 환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흔적으로서의 마오의 유령을 불러내고 그에게 말을 걸고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우리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생각할 때 그의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로부터 도움을 받기 위함이다. 유령은 그것을 우리 곁에서 쫓아내려고 할 때에 더욱 더 끈질기게, 더욱 더 부정적인 방식으로(왜냐하면 더욱 더 무의식적이기에), 더욱 더 폭력적으로 복귀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유령을 애도한다는 것, 유령과 함께 산다는 것은 유령을 비판적으로 계승한다는 것이며, 그가 하나의 실체나 동일성으로 남아 있지 않고 수 없는 흔적들로 산종(disseminate)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프랑스의 마오 1】
최원 _ 단국대 철학과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소장 자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