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중국 가족제도의 근간은 종조계승(宗祧繼承)이었다. 즉 대를 잇는 것이었다. 중국 가족의 역사는 종조계승과 함께 시작되고 끝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를 잇는 것”은 전통시기 중국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이자 역할이었다. 고대 중국인들은 사후에도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 동물의 피를 조상에게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혈식(血食)이라고 한다. 이 혈식은 죽은 자와 혈통관계에 있는 남자자손이 제공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조상이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했다.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여러 방법이 동원되었다. 그중 하나가 초췌(招贅) 혹은 초부(招夫)라는 관습이었다.
“췌(贅)”라는 것은 원래 인질을 의미했다. 집안이 가난하여 처가에 혼인비용(聘禮)을 제공할 수 없는 남자가 처가에 몇 년 간 봉사를 한 후에야 처를 데리고 갈 수 있었던 일종의 복무혼이었다. 즉 초췌는 데릴사위제를 말한다. 우리나라에도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나. 이는 처가살이의 고통과 서러움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말일 것이다. 전통 중국은 남성중심사회였지만 데릴사위의 사회적 지위는 상당히 낮았다. 일반가정의 첩과 같거나, 심지어는 그보다도 못한 노예와 같은 처지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초췌에 대한 기록은 이미 『한서(漢書)』에 나올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전통시기 법률에서도 데릴사위를 금지하지 않았다. 다만 데릴사위가 처가의 양로와 부양을 도맡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더라도 처가의 대를 이을 수는 없었다. 때문에 별도로 항렬에 맞는 자를 후계자(嗣子)로 세워 대를 잇게 했다. 이때 재산은 데릴사위와 후계자가 반씩 나누어 상속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당시 국가법이나 종족법은 성씨(姓氏)가 다른 사람이 대를 잇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데릴사위가 처가의 대를 잇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법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후계자를 세우고 재상 상속을 하는 문제는 각 가정 내부의 일이었기 때문에 전통시기라 하더라도 국가가 과도하게 간섭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친족들이었다. 데릴사위의 계승을 눈감아 주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방법도 없지는 않았다. 성씨가 다른 자를 후계자로 삼을 수 없다는 명분을 들이대는 친족들에게 재산의 일부를 분급하거나 종족의 사당에 기부금을 제공함으로써 이를 무마시키는 것이었다.
더욱이 데릴사위의 성씨를 바꾸어서 대를 잇게 하거나, 데릴사위가 아니라 딸이 낳은 아들(外孫)로 계승한다면 혈통관계는 유지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1920년 전후에 실시된 민사습관조사에 의하면 안휘성 당도현(當涂縣), 귀지현(貴池縣) 등에서는 “딸의 아들로 계승하면 족중에서 더 이상 다른 계승자를 주장하지 않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말은 주변사람들이 이에 동의하고 수긍했다는 의미이다. 그 이유는 딸의 아들은 친 여자형제가 낳은 것이니 혈통이 친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딸이 낳은 아들이 “혈통주의”를 이유로 합리화되고 정당화되었던 것은 그런대로 일리가 있다. 그러나 더 기이한 것은 초부(招夫)의 관습이었다. 원래 초췌는 딸만 있고 아들이 없는 경우에 통용되는 방법인데, 초부는 아들이 있어도 결혼 후에 죽은 경우 시부모가 과부며느리(寡媳)를 통해 데릴사위를 불러들이는 방법이다.
초부는 그 목적에 따라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남편이 죽고 남겨진 어린 자식을 과부 혼자 힘으로 부양하기 어려울 때 초부하여 자녀를 부양하게 하는 방법이다. 또 하나는 아들이 죽고 며느리마저 재가를 하고 나면 자신의 양로를 맡아줄 다른 가족이 없을 경우 시부모가 며느리를 통해 초부를 하여 양로를 맡기는 것이다. 강소성 구용현(句容縣)의 보고에 의하면, 시부모에게 다른 아들이 없어 아무도 부양할 수 없게 되자 며느리의 재가를 허락할 수가 없어 부득이하게 그렇게 했는데, “나중 사람들이 그 편리함을 알고 따라하여 구용현의 습관이 되었다”라고 그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부득이”하게 했던 것이 “나중 사람들이 그 편리함을 알고 따라했다”는 것은 민간 사회에서는 그러한 곤란이 늘 존재했다는 의미이다. 부득이한 경우에 선택할 수 있는 차선책으로서 사람들이 “편리하다”고 인정했다는 것은 그것이 “윤리나 도덕에 크게 위배되지 않는다”고 보았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초부는 남편이 죽은 경우에 선택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그러나 심지어는 남편이 생존해 있는데도 남편이 질병이 있거나 자생능력이 없을 때 남편의 동의를 받아 초부하여 남편을 부양하는 형태도 존재했다. 이러한 초부의 관습은 전통시대에는 상당히 성했지만 근대에 와서 감소했고, 주로 하류 사회에서 성행했던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이는 민간의 종조계승이 조상에 대한 제사보다는 양로나 자녀부양 등 현실적인 의미를 띠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철저한 남성중심적인 사고이고 과부며느리에게는 인권조차 없는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전통사회의 사고와 논리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딸은 혈통관계에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며느리는 혈통관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데릴사위를 들여 딸의 아들로 대를 잇게 하는 것은, 아들이 없어 대를 이을 수 없을 때 부득이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과부며느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죽은 후 남겨진 어린 자녀의 양육이라든가 노부모의 양로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는 생존의 문제와도 직결되었다. 그러므로 딸로 초췌하는 것이나 과부며느리로 초부하는 것은 동일한 행위로 간주되었고, 모두 사회적으로 동의를 얻는 일이었다. 아들이 없거나 아들이 죽어 더 이상 대를 이을 수 없어 종족이 사라지는 것은 더욱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국가법을 따르는 것보다 더 가깝고 절실한 것은 종족의 생존과 유지였다. 딸에 의한 초췌보다 과부며느리에 의한 초부가 더 광범위하고 보편적으로 행해졌다는 것도 바로 그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이러한 관습은 명문가, 혈통을 중시하는 지역이나 가정 혹은 부유한 가정에서는 발생 가능성이 적은 일이었다. 그러나 중하류의 민간에서 주로 보고되었고 전국적으로 행해졌던 관습이었다. 민간 생활의 절박한 필요가 종종 혈통관념과 조상제사라는 종조계승의 본 의미를 변용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초부하여 대를 이었다고 해서 민간의 종조관념이 결코 약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민간에서 추구하는 종조계승은 국가법이나 종족법에 나타나는 것 같은 “동일 종족이 아니면 제사를 받지 않기 때문”이라거나 “조상의 혈식은 중단할 수 없는 것” 같은 이유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의미에서 실천되었다는 것이다.
데릴사위의 입장에서도 초부에 응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상의 문제였다. 빈곤한 가정에서는 자신의 아들을 초췌, 초부 등으로 보냄으로써 경제적인 이익을 구하고자 했다. 이러한 형태의 혼인제도는 결혼비용이 없는 가난한 가정의 남자가 결혼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다. 전 남편에게 아들이 없는 경우, 일반적으로 초부 후 낳은 첫아들은 전 남편의 대를 잇게 하고, 둘째 아들은 초부의 대를 잇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되지 않았던 전통시대에는 각 가정의 성원들이 각각 양로나 자녀 부양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구조였다. 이러한 사회적 필요가 기이한 혼인 관습을 낳게 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새삼 국가와 사회의 역할을 생각해보고 우리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관습과 중국문화 13】
손승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출처: 손승희, 「근대중국의 異姓嗣子 繼承관행」, 『중국근현대사연구』 57집(2013.3)의 일부 내용을 발췌하여 재구성한 것임.
*참고문헌
前南京國民政府司法行政部 編, 『民事習慣調査報告錄』, 中國政法大學出版社, 2005.
滋賀秀三, 『中國家族法の原理』, 創文社, 1967.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