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루소는 한국인에게 맹자만큼 유명한 사상가가 되었다. 그는 다섯 명의 자식을 차례로 고아원에 버렸지만, 교육학의 터전을 닦았다는 『에밀』을 썼다. 또 다른 대표작인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대혁명의 불씨를 지피며 군주제가 공화제로 이행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혁명의 주역 로베스피에르에게 그는 “고상한 영혼과 숭고한 품격”을 겸비한 “인류의 스승”이었다. 역사의 전환기에 정신적 지주 노릇을 했던 이 혁명적 사상가는 또한 새로운 문학의 탄생을 알리는 대문호이기도 했다. 『누벨 엘로이즈』, 『고백록』,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과 같은 작품은 그때까지 볼 수 없던 주제와 감성을 대량으로 쏟아내며 당대의 독자들을 행복한 충격에 빠뜨렸다. 이렇게 물꼬가 트인 낭만주의는 거대한 강물이 되어 수십 년 동안 프랑스 문학을 관류하게 된다. 사상적으로나 문학적으로 루소가 당대에 행사한 영향력은 거의 독보적이다. 괴팍한 성격과 비상식적 행동, 편집증적 징후와 특히 말년에 나타나는 피해망상증 요컨대 결점들이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그의 업적과 매력은 지금까지도 별로 손상되지 않은 듯하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루소 하면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니는 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루소 왕국의 로고 같은 이 문장은 그의 말이 아니다. 그가 쓴 어느 책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의 사상을 너무 단순화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문장이지만, 속담이나 격언처럼 진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 탁월한 압축성과 전달력을 지닌 것만큼은 분명하다. 실제로 원시적 자연은 그에게 사색의 원천이자 이상적 삶의 모델이었다. 위로와 회복의 은신처이고 신의 숨결이 깃든 신비적 공간이었다. 마치 에덴동산처럼 선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곳, 루소의 자연은 그런 곳이다.
『에밀』의 첫 단락은 이렇게 시작된다. “모든 것이 조물주의 손에서 나올 때는 선한데, 인간의 손을 타면서 모두 타락한다.” 『사회계약론』 첫 장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런데 인간은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연 상태의 인간, 그러니까 최초의 인간은 선하고 자유로웠다. 그러나 사회가 형성되고 문명화가 진행되면서 인간은 타고난 본성을 잃어버린다. 서구인의 자랑인 문명화된 사회는 소유욕과 이기심, 사치와 경쟁심, 불평등과 억압을 낳았을 뿐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본래의 성품을 망각한 채 악에 물들고 불행에 찌들어 있다. 심지어 학문과 예술까지도 인간의 타락에 기여했다고 루소는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는 것, 다시 말해 문명을 반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남은 일은 은폐된 혹은 훼손된 인간의 본성을 되찾거나 복구하는 노력이다. 인간 본연의 상태를 이정표 삼아 (사실 최초의 인간은 루소의 상상력이 창조한 인간이다) 타락한 이 세계를 조금이라도 개선하는 일이다. 루소의 저서들은 체계적인 철학을 구축하지 않았지만, 모두 이런 대원칙을 따르며 일관성 있게 집필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궁극적 본성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책들을 아무리 뒤져 봤자, 위대한 철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봤자 부질없는 짓이라고 루소는 말한다. 답은 오직 우리 마음속에 있다. “마음 깊숙한 곳에는 자연이 지울 수 없는 활자로” 새겨놓은 무언가가 있다. “모든 영혼의 밑바닥에는 타고난 정의의 원칙”이 있다. 요컨대 자연은 모든 인간에게 양심이라는 시공을 초월한 원칙과 진리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루소의 확고부동한 신념이다. (여기서 양심의 근원을 신이 아니라 자연과 결부시킨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루소는 디드로처럼 무신론자가 아니었다. 그의 신은 자연에 내재한다. 그러니까 자연은 신이 물질적으로 구현된 것과 비슷하다. 정통 기독교 교리를 따르지 않는 이런 입장 때문에, 『에밀』은 금서가 되고 그는 졸지에 유럽을 전전하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이 양심에 이르는 통로는 루소에 따르면 이성이 아니다. 다른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인간성의 정점에 올려놓은 이성의 빛은 양심의 영역을 밝히지 못한다. 양심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안내자는 감정이다. 이를테면 양심의 목소리인 이 특별한 감정을 그는 “내적 감정” 또는 “내면의 빛”이라 불렀다. 이성이 문명과 한 패라면, 자연과 한 패인 것은 감정이다. 자연에 속하는 감정은 믿을 만하고 그 자체로 선하다. 루소는 말한다. “내가 선하다고 느끼는 모든 것은 선하고, 악하다고 느끼는 모든 것은 악하다.” 이런 말도 했다. “양심의 행위는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감정이다.” 그는 양심을 감정(또는 자연)과 동일시하며 도덕의 기초로 삼았다.
루소의 이런 주장들은 여러모로 맹자의 성선설을 떠올리게 한다. 맹자는 물에 빠진 어린 아이를 아무 조건 없이 구하는 사례를 들며, 인간의 마음에는 천부적인 측은지심이 있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선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수오지심), 사양하는 마음(사양지심), 도리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시비지심)도 타고난 것이라고 했다. 이로부터 그 유명한 사단설(四端設), 즉 맹자 인성론의 핵심인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나온다. 맹자는 이미 기원전 4세기에 선(善)의 씨앗들이 이처럼 인간의 마음속에 심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의예지를 “두 개의 손과 두 개의 다리”에 비유했는데, 손과 다리가 천부적인 만큼 이 네 개의 본성 또한 천부적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이런 자질은 단서(실마리)로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므로, 이를 현실화하고 완성하는 것은 각자가 해야 할 차후의 몫이다. 그러나 씨앗 속에 한 생명체의 방향과 목적이 새겨져 있듯, 인간의 진정한 본성인 사단(四端) 속에는 자연의 뜻이 - 이것이 바로 천명인데 - 분명히 각인되어 있다. 맹자가 도덕의 기초를 세울 수 있는 근거는 물에 빠진 아이의 사례와 같이 경험적 사실이다. 이로부터 삶의 목표와 의무, 즉 도덕적 인간의 이상형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인간의 길(道)은 선한 천성을 자연이 원하는 (아니 명(命)하는) 대로 갈고 닦아 자연스럽고 온전하게 구현하는 것이다. 군자는 바로 이런 경지에 이른 자를 일컫는다.
자연을 사유의 중심에 놓았다는 것도 그렇지만, 특히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맹자와 루소는 일치한다. 그러나 인간이 늘 선하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두 사람의 설명이 사뭇 다르다. 맹자는 선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 다시 말해 해야 할 것(天命)을 몸소 실천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보았다. 요컨대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유가에서 개인적 수양이 중시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반면에 루소는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 사회와 문명이 인간을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처방은 사회와 문명이 초래한 해악을 분명히 인식하고 개선하거나 해소할 방법을 찾는 것이 관건이다.
기독교 전통이 지배하는 문화권에서 맹자의 성선설과 유사한 주장을 하는 것은 거의 이단적 행위에 가깝다. 인간은 태초에 씻지 못할 죄를 지었다. 아담의 피는 후손의 몸속에 대를 이어 흐르고 있다. 오직 신만이 이 원죄의 사슬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다. 죄와 구원의 도식은 기독교 교리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루소의 파격적 주장은 기독교가 계몽주의의 공격을 받으며 심각한 내상을 입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도덕의 기초를 종교와 형이상학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찾으려는 그의 행위는 이를테면 신성모독이었던 셈이다. 이런 점에서 루소는 도덕의 프로메테우스였다. 그러나 종교적 계율이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던 동양은 사정이 달랐다. 강력한 선입견이나 장애물이 없었으므로,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의 본성을 비교적 수월하게 탐색할 수 있었다. 맹자가 대표적인 본보기가 아닐까 싶다.
더욱 중요한 맹자와 루소의 유사성은 인성을 파악하는 방식일 것이다. 둘 모두 인간 본성의 참모습을 인식하는 것은 이성의 소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맹자의 경우를 보자. 물에 빠진 아이 앞에서 보이는 인간의 반응은 - 자연스런 감정의 반응이건 즉각적인 행동의 반응이건 - 모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반사적 감정과 행동에는 무슨 계산이나 반성적 사고가 개입할 여지가 없고 겨를도 없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자연적으로 또는 본능적으로 진행된다. 이 순간에 이성은 부재하거나 무기력하다. 측은지심 즉 마음은 이성보다 훨씬 깊숙한 내면 어딘가에 뿌리 내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맹자가 보기에 선한 본성은 사변이나 추론에 따른 논리적 결과나 당위성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이 (루소는 이를 양심 또는 감정이라고 부른다) 즉각적으로 보여주는 인간의 근원적 진실이다.
루소의 경우도 앞에서 보았듯 인간의 본성은 이성을 경유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자연이 마음 깊숙한 곳에 새겨놓은 “정의의 원칙”, 요컨대 그가 양심이라 부르는 것이 표출되고 지각되는 방식은 감정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감정은 이성보다 훨씬 근원적이고 신뢰할 만한 인간성의 증표이다. 동일한 개념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많은 세부적 차이가 있지만, 인성에 대한 루소의 기본적 입장이 놀라우리만큼 맹자의 입장에 수렴하고 있다. 2,000년의 시차를 넘어 이질적인 두 문화권에서 나온 그들의 철학이 이 정도까지 접근할 수 있다니! 한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인간의 보편성을 새삼스레 일깨워주는 근사한 사례 같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맹자와 루소를 반박하는 주장들은 당대부터 꾸준하게 제기되었다. 사실 인간의 선함을 부인하는 삶과 역사의 경험들은 너무나 많다.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고 도덕의 확고한 기초를 확립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윤리학의 난제로 남아 있다. 인간의 문제를 선악의 관점으로 접근한 것부터 잘못된 것인가? 그런데 선악의 개념 없이 도덕이 가능한가? 도덕적 문제를 배제하고 인간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가? 옛사람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이 오늘날 펼쳐졌지만, 근본적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해답을 기다리고 있다.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런 종류의 문제와 관련해선 첨단문명을 자랑하는 현대인의 사정이 옛날보다 딱히 나은 것도 없는 듯하다.
김용민 _ 인천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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