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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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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호
평양중국인민고급중학교 휴교사건 _ 송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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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중국 국내에서 전개된 문화대혁명의 여파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북한화교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 중국으로 친척 방문을 했던 화교학생이 『毛澤東選集』이나 『毛主席語錄』을 가지고 돌아왔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일부 학생은 중국주조선대사관에서 혁명적인 내용의 책을 입수하여 학생들 사이에서 돌려봄으로써 혁명에 대한 열의가 높아졌다. 당시, 북한에 중국인중학교가 있던 곳은 평양, 신의주, 청진, 강계였는데, 이 가운데 1947년 9월 개교한 평양중국인민고급중학교가 북한화교 학교의 중심이었다.
 
1966년 5월 15일 평양중국인민고급중학교 학생은 용악산 야영팀을 조직하여 출발했다. 목적지로 가던 도중 한 고등 3학년 학생이 오색홍기를 휘날리자, 학생들이 이에 맞춰 ‘歌唱祖國’(노래하자 조국)을 부르기 시작했다. 일부 학생들은 ‘공산당 만세!’를 외쳤다. 용학산에 도착한 학생들은 깃발을 산꼭대기에 꽂고, 돌아갈 때에는 ‘大海航行靠舵手’(망망대해를 지도자에 의지하여 항해하자)의 노래를 불렀다. 학생들의 이러한 행동은 어떤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기보다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학교 측은 이를 큰 문제로 삼아 과장된 보고서를 상부에 제출했으며 오색홍기를 몰수하려 했다. 이 사건은 화교 학생과 학교 측 사이에 정면충돌하는 도화선이 되었으며, 학생들의 단결심을 고취시켰다.


6월초 이 학교 중학 3학년 교실에는 『毛主席語錄』을 인용한 벽보가 나붙었다. 점차 다른 교실에서도 같은 내용의 벽보가 붙었다. 그리고 7월 학교 교내에 처음으로 대자보(大字報)가 등장하였는데 학교 측은 이를 찢어버렸다. 격분한 학생들은 찢은 이유를 따지고 들었으며, 학교 측은 곧바로 경찰에 연락하여 문제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계속하여 마오주석 저작학습소그룹을 조직하였고, 이러한 학습운동은 고학년에서 저학년으로 전파되었다.


이러한 학습활동이 전교로 확대되자 학교질서는 무너지고 정상수업의 진행이 곤란해졌다. 학교 측은 7월 중순 조기에 여름방학을 선언했다. 그러나 방학기간에도 일부 학생들은 학교식당에 모여 학습활동을 계속했다. 8월 18일 마오쩌둥이 천안문광장에서 홍위병들을 접견하였다는 보도를 라디오로 듣자, 모두 크게 격동했다. 8월 하순 방학을 마친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왔지만 학교는 정상수업을 재개할 형편이 아니었다.


8월 22일 오전, 학교 측은 교직원 및 전교 학생 그리고 일부 학부모를 포함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이 학교의 교장 이엄순(조선인)의 사회로 시작된 회의에서 평양시 인민위원회 제1부위원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발언을 했다.


북한에 거주하는 중국 공민의 교육사업은 중국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북한정부가 운영하고 있다. 초기 북한정부는 중국 국내 학교의 교육제도를 그대로 적용하였으며, 교과서도 중국 교과서를 채용했다. 그 후 북한 교과서로 바뀌면서 학교에서는 노동당정책이 보급되었다. 교장, 교무주임, 교원들도 조선인이 담당하게 되었다. 교육제도가 바뀐 것은 중국주조선대사관과 화교연합회의 요구에 응한 결과이다. …···노동당의 외국인 자녀교육에 관한 일관된 정책은 그들이 자기 조국 영도자의 저작이나 조국의 당 정책, 모국어 학습을 지지한다. 따라서 평양시 인민위원회는 화교학생들이 마오쩌둥사상과 중국어 교과서를 배우며 중국의 ‘10·1국경절’을 경축하고 싶다는 요구에 대하여 마땅하다고 인정한다. 다만 그렇게 되면 학교 운영은 북한정부가 아닌 화교연합회에서 담당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다음 날인 23일, 학교 측은 정상수업의 재개를 선언했다. 그런데 화교학생들이 학교 1층 총무실에 집결하여 학교 노동당위원회위원장을 몰아내는 사건이 발생했다. 9월 15일 북한정부는 평양중국인민고급중학교에 대하여 조선인 교직원의 전원 철수와 재정 자금 지출의 정지를 실시했다. 학생들의 학습과 일상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학교에서는 고학년 여학생들이 교대로 학교식당의 일을 하고, 남학생들은 학교 부업농장에 나가 농사일을 맡아 하면서 식량과 야채를 학교 식당에 제공했다.


화교학교의 운영을 맡은 화교연합회는 우선 한국전쟁시기 화교들이 헌납했던 수십만 원의 자금으로 각종 지출을 충당하려 했지만, 그 이상의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9월 21일 화교연합회는 1달간의 임시휴교를 결정했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10월 12일 화교연합회는 화교중학교의 임시휴교를 무기한 연장한다고 선언했다. 결국 10월 25일 평양중국인민고급중학교는 정식으로 해산되었다.


한편, 1966년 12월 북한정부가 다시 평양, 신의주 등 화교학교에 대한 관리를 시작하면서 모든 조선인 교직원들도 복직되었다. 하지만 경찰이 수시로 학교 교내를 순찰하였으며, 학생 조직의 핵심 인원에 대한 집중감시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일부 학생들이 체포되어 유죄판결까지 받았다. 하지만 중국주북한대사관이 나서서 이들을 석방시켰고, 이들을 즉시 중국 국내로 귀국시켰다. 이러한 상황으로 중국으로 귀국하는 화교가 적지 않았다.



사진 1  평양중국인민고급중학교의 뺏지와 졸업증



   사진 2  평양중국인민고급중학교 중등 제10기 졸업기념사진(1966년 3월 15일)
     


【북한화교와 한반도 14】

 

송우창(宋伍强) _ 중국 광동외어외무대학(廣東外語外貿大學)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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