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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12월호
변경과 전쟁- 광주의 호문포대에서 _ 유장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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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물론 국가 내부에서 서로 다른 이념과 이익을 가진 집단끼리 일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국가의 이해관계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고대에도 그랬지만, 근대 에 와서 그 경향은 더 심해졌고 이해의 정도가 더 커질수록 전쟁의 규모도 그에 비례해서 증가하였다. 특히 근대기에 들어서면 전쟁의 양상은 인근 국가들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국가 사이에서도 전개되었기 때문에 지리적 거리감이 문제되지는 않았다.


인근 국가 사이든 원거리 국가 사이든 간에 국가의 경계선에 놓여 있는 지역은, 말하자면 관행적으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 부분 연구자들의 말마따나 변경은 국경선이라는 날카로운 칼날 위에 서 있는 꼴이고 근대의 경우 이 날카로움은 변경의 땅과 인민을 가차 없이 베어내기에 충분하다. 


중국 남부의 양광지방, 곧 광동이나 광서 땅도 중화제국의 남부 변경에 위치함으로써 갖은 고난을 겪었다. 멀리는 진나라 때부터, 가까이로는 명대와 청대에 걸쳐 잇따라 베트남 침공의 전초기지로 활용되었고, 그 때마다 주민들의 피해는 극심한 것이었다. 아무리 남부의 불안이 화북지방의 그것에 비해 강도가 약했다고는 하지만, 평화시기라고 하더라도 전쟁에 대한 대비를 하여야 했으므로 편안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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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동관시 호문포대 인근에 있는 소연지. 임칙서가 서양상인의 아편을 몰수하여 바닷물에 녹인 곳이다.


그러나 대부분 전쟁을 주도했던 중화제국도 시대가 바뀌자 침략을 받는 대상으로 바뀌었다. 아편전쟁은 그 전환점이자 중요한 상징일 것이다. 구미열강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를 공격하기 시작한 신호탄이었다. 전쟁의 주도자가 바뀌었다고 해서 변경민이 전쟁으로 인해 받아왔던 고통이 줄어든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지속된 흐름을 광동 주강 하구에 있는 호문포대(虎門砲臺)에서 볼 수 있었다. 역사 교과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포대의 행정상 위치는 동관시(東莞市)이며, 인근에는 아편전쟁 직전에 아편을 바닷물에 녹였던 연못, 곧 소연지(銷烟池)와 전쟁박물관이 있다. 이 포대 유적은 1982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우리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국가급의 사적지이니, 그만큼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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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호문포대의 위용. 주강 하구의 광동성 입구에 성벽과 포대를 쌓고 외국과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2012년 2월에 이곳을 답사하였다. 그곳에 쓰여 있는 ​안내문에 따르면 이 호문포대에는 300여문의 포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포 하나의 사이가 대략 10여 미터 정도라고 치면, 거의 3킬로에 해당할 만큼 긴 거리이다. 당시 우리 일행은 이 포 진지를 모두 구경하였으면 하는 마음이 컸지만, 걸어야할 거리가 긴 탓에 그러지 못하였다. 물론 거의 같은 유형의 포와 그것을 받치는 구조물인 포가(砲架)가 계속 이어진 탓도 있었다. 아마 절반 정도는 보았던 것 같다. 우리가 본 것은 11개의 포대 중에서 사각(沙角) 포대와 위원(威遠) 포대였다. 3중으로 구성된 방어 포대 중에서 최전선에 설치한 사각 포대와 제2선에 설치한 위원 포대를 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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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아편전쟁 때 사용했던 청나라의 대포. 거의 대부분 19세기 초에 광동 인근의 불산에서 제작된 것이다. 포탄으로는 돌이나 쇳덩이를 사용하였다.


포대는 주강을 관찰하는 쪽으로 포좌(砲座)를 두고, 포문(砲門)은 방어벽에 난 구멍을 통해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적들을 공격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포좌 뒤로는 5-6미터 정도의 통로가 있었고, 그 통로 뒤에는 탄약고와 지휘소, 병영 등이 포좌와 같은 방향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흥미 있게도 대포는 당시의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영국군의 포탄으로 무너진 탄약고와 병사들의 숙소는 무너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 포대는 청정부로부터 아편을 몰수하라는 특명을 받은 임칙서(林則書)가 서양상인들로부터 아편을 몰수할 무렵,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것이다. 이를 주도한 이는 관천배(關天培, 1781-1841)로서 강소성 회안(淮安) 출신이다. 광동 수군의 최고 책임자 자리인 수사제독에 있던 그는 임칙서와 함께 아편의 단속에도 참여하였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보통 제1차 전투라고 칭하는데, 그것은 1840년 6월에 시작된 상하이 인근의 주산열도에 대한 영국군의 공격에서 1841년 1월의 호문포대 공격 시기까지를 가리킨다. 영군은 상하이 인근의 주산 열도를 점령하였는데, 이로 인해 임칙서는 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파면된 뒤, 서북 변경의 신장으로 유배당하였다. 



사진 4  포대 안쪽의 구조. 오른쪽은 포가 자리한 포좌이고, 왼쪽은 병사들의 숙소, 탄약고 등이 있던 곳이다. 영국군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포대를 전쟁 유적으로 보존하고 있다.


​영국의 책임자인 엘리어트와 도광 황제의 명령을 받고 광주에 새로이 파견된 만주인 기선(琦善)은 협상에 임하였으나, 그 내용에 대해 서로 간에 여의치 않았다. 이에 영국군은 그 이듬해 1월 7일에 호문포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26일에 이곳을 점령하였다. 당시 동원된 무력은 영국측에서 48척의 군함, 540여문의 대포, 병력 5천여 명이었고, 청군의 경우 400여개의 포와 군민 5천여 명이었다. 영국군은 배후로 이 포대에 상륙하여 청군과 육박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 전투에서 청군은 400여명이 전사하였다. 이 포대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관천배도 육박전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사망하였다.


​이 포대를 걷다보면 청 정부가 전쟁에 충분히 대비하였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호문포대 자체나 그에 정착한 대포로서는 영국의 함선과 대포에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중국인 관람객들은 애상에 젖기보다 당시에 용전하다 사망한 용사와 주민들을 기리면서 애국주의를 체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이 포대를 국가단위 문물로 지정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이 전쟁을 도덕적 입장에서 평가하곤 하지만, 당시의 청제국 역시 위계적 조공무역을 통하여 적지 않게 재미를 봤기 때문에 '선한 제국'이라고 보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렇다고 해서 영제국주의의 탐욕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국가간의 전쟁에서 정의와 도덕은 사후에 만들어내는 명분일 뿐이며, 그 점에서 전쟁이란 승패만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보다 나는 이 전쟁 유적에서 중국식의 애국주의를 찾기보다, 변경민의 험난한 삶을 먼저 떠올렸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포대 설치 자체가 지역 주민들이 피땀을 흘린 결과물이었고, 전쟁이 나자 또 그곳에서 관병을 보조한다는 명분으로 전투에 참여하면서 많은 희생자를 내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포는 이미 녹이 슬어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으나, 독일포는 포신과 포신내의 강선, 포가 등이 생생하여 지금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동서 대포의 수준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적지 않은 주민들이 영국군에게 협조할지 모른다는 청조 당국의 인식으로 인해 군대에 묶여 가거나 고기잡이 혹은 해상에서의 무역을 제한 당했다. 그 중 배위에서 생활하는 이른바 단민(蜑民)은 해상 생활에 익숙하다는 이유로 영국군의 배 밑으로 들어가 그것을 폭파시키라는 명령도 받았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주민들이 실업자가 되었고, 이들 중 일부는 지역 사회에서 소요를 일으키는 폭도로 변하기도 하였다.



사진 5  광동성 광주박물관에 전시된 19세기의 청포와 독일포.


국가의 중심지인 북경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연달아 진행되면서 변경 사회를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였다. 잘 알다시피, 청정부는 홍콩섬이라는 땅과 그곳의 주민을 전쟁 패배의 보상으로 영국에 떼어 주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국적이 바뀐 것이다. 이렇게 보면 변방에서 일어난 전쟁이란 오징어로 비유하자면 해당 지역에는 몸통을 크게 다치는 중대한 재앙이지만, 중앙정부에게는 없어도 그만인 다리 끝부분을 조금 잘라내는 정도의 손실일 터이다. 문제는 그 재앙이 지금까지도 대지진의 여진처럼 지역사회를 계속해서 불안 속에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현장에서 마주친 관행 8】


유장근 _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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