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ISSN 2508-2884 (Online)

시사&테마
5월호
중국의 불매운동과 백년의 간극 _ 이원준
프린트 복사 페이스북

2017년 중국의 불매운동

 

지난 정부에서 사드(THAAD)의 한국 배치가 결정된 이후로 이 문제는 한국 사회의 핵심 이슈가 되었으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통령 선거 관련 토론회에서도 중요한 논제가 되고 있다. 사드의 군사적 효용성, 한국 배치 결정 과정의 적절성 등에 대한 문제 제기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특히 사드 배치 결정 이후에 본격화된 중국의 경제 보복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매우 높은 상황이다.


주지하다시피, 롯데가 사드 부지 제공을 결정한 이후, 중국 전역의 롯데 매장 99개 중 약 90%에 해당하는 87개의 매장이 영업을 중단했다. 67곳은 소방시설 점검 등을 이유로 영업 정지 처분을 받았고, 20곳은 중국인의 불매운동으로 인하여 자체 휴업 중이라고 한다. 많은 중국인들이 한국의 사드 배치 수용에 항의하며 롯데를 포함한 한국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중국의 관영 매체들은 이를 부추기고 있다. 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허베이성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사와 학생 400여 명이 모여 사드 반대 집회를 열었고, 심지어 당시 12세 이하 초등학생들도 한국 상품 불매는 나로부터 시작한다!(抵制韩货, 从我做起)”라는 표어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며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시사IN> 201743일자 기사).


timg75J7LVHQ.jpg


중국의 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한국의 사드 배치에 분노하는 중국인들을 중심으로 3월 초부터 한국 상품 불매운동이 확산되었고, 이로 인하여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현대자동차의 3월 중국 판매량은 전년 대비 무려 40% 감소하였고, 롯데의 경우에는 올해 3~64개월만 따져도 누적 매출 손실 규모가 1조원을 웃돌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글로벌이코노믹> 2017416일자 기사). 이러한 상황이 계속 지속된다면, 향후 1~2년간 중국으로의 수출이 7% 감소하고 중국인 관광객의 한국 방문이 60% 감소하여, 우리나라 경제 피해액이 최대 16조원에 이를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영남일보> 2017422일자 기사)


이처럼 국가 간의 비경제적 문제에 대해서 불매운동이라는 경제적 수단으로 대응하는 것은 중국에서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독일의 아우디에서 사용한 중국 지도에 타이완과 티베트의 일부가 빠진 것에 항의하기 위하여 3월 말에 아우디 차량 불매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미국 유나이티드항공의 승객 강제 하차 사건에서도 처음에 중국에서 승객이 중국인이라고 잘못 알려지면서 유나이티드항공 불매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물론 이 경우에는 특정 기업의 행위에 대해서 해당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을 전개한 사례로서, 한국의 사드 배치 결정에 항의하기 위한 한국 상품 불매운동과는 성격이 다른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이익과 존엄을 침해한 타국 또는 그 기업의 행위에 대해서 경제적 수단인 불매운동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데 있어서 중국인들이 우리보다 훨씬 적극적인 것은 사실인 듯하다.

      


1905년의 불매운동

 

중국에서 특정 국가의 상품을 판매하거나 구매하는 것에 반대하는 불매운동이 전국적인 범위에서 처음 전개된 것은 19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0년대에도 일부 지역에서 불매운동이 벌어진 적은 있었지만, 주요 대도시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된 것은 1905년의 미국 상품 불매운동이 최초라 할 수 있다.


1905년의 미국 상품 불매운동은 미국의 중국인 이민제한법(Chinese Exclusion Law)’과 민족 차별에 항의하기 위하여 시작되었다. 아편전쟁 이후에 홍콩이나 마카오를 경유하여 해외로 이주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증가하였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간 중국인 노동자들은 금광 채굴, 대륙횡단철도 건설 등에 대거 투입되었다. 특히 1868년에 벌링게임(Burlingame) 조약이 체결되면서 중국과 미국 국민의 자유로운 왕래가 허용되었고, 이를 계기로 1870년대에 중국인의 미국 이민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중국인 이민이 늘어나면서 비숙련 노동시장에서 그들과 경쟁하게 된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중국인 노동자 배척운동이 확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중국인들에 대한 인종 차별도 심화되었다. 결국 1882년에 미국 연방의회에서 향후 10년간 중국인 노동자의 이민을 금지하는 법안이 가결되었고, 1894년과 1904년에 재차 10년씩 연장되었다. 중국인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학생과 상인들도 미국 입국이 어려워졌고, 입국하는 과정에서 각종 굴욕을 당하는 일이 많아졌다. 미국에서의 중국인 차별에 대한 정보가 중국에 전해지고 그 내용이 각종 매체를 통해 확산되면서, 미국 상품 불매를 주장하는 대규모 반미운동이 발생했던 것이다.


timg.jpg


19055월에 상하이에서는 여러 동향동업 단체들의 대표가 모여 두 달의 유예기간을 설정한 미국 상품 불매운동의 방침을 결정하고, 각지에 타전하여 운동에의 동참을 호소하였다. 미국의 중국인 이민 제한으로 인하여 실질적인 타격을 입은 광저우에서는 광제의원(廣濟醫院) 등 선당(善堂)이 중심이 되어 신상(紳商)들이 미국의 인종 차별에 항의하며 불매운동을 전개하였다. 미국에서 차별을 받고 있는 이민자들의 참상을 선전하며 광동인(廣東人)’으로서의 동향 정체성에 호소하면서도, ‘중국의 단결이라는 구호 아래 민족적 응집이 이루어졌다.


톈진에서는 상인들보다 학계와 언론계가 중심이 되었다. 특히 청 말의 대표적인 일간지인 <대공보(大公報)>는 기사 앞에 본지는 미국 상인의 광고를 싣지 않습니다.”라는 표어를 추가하고, 각지의 불매운동 상황을 보도하는 등 매우 적극적으로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또한 학생 사회에서도 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학생들을 중심으로 미국의 중국인 차별에 항의하며 미국 상품의 사용 및 구입에 반대하는 보이코트가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전국의 13개 성()()로 확산된 이 불매운동에는 다양한 사회단체와 계층들이 참여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지역별 상회(商會)가 매개가 되어 상인들이 운동을 이끌어갔지만, 점차 학생과 노동자 등 광범위한 계층의 민중이 참여하면서 운동의 주도권도 이들에게로 넘어갔다. 상인들은 경제적 손실을 피하기 위하여 점차 운동에 소극적이 되어간 반면, 학생과 노동자, 농민, 수공업자, 여성 등 다양한 사회 계층들이 각지에서 거약회(拒約會)를 조직하여 불매운동을 이어갔다. 여성들은 중국부녀회(中國婦女會)’를 조직하여 불매운동을 전개하였고, 아동들도 중국동자저제미약회(中國童子抵制美約會)’를 조직하여 동참하였다. 뿐만 아니라, 집집마다 대문에 미국 물건은 사지 않습니다(不買美貨)”라는 종이를 붙여 불매운동에 참여하였다. 전보의 발달로 각지의 소식이 신속하게 전파될 수 있었고, 이렇게 전파된 소식은 신문과 정기 간행물 등의 언론매체를 통해서 공유되었다. 정보 전달 매체의 발전은 여론의 결집과 확산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광범위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불매운동을 위해서 공동의 보조를 취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반 년 동안 각지에서 200여 차례의 군중집회가 개최되었다. 19058월 하순부터 열강의 압박을 받은 청조의 불매운동 탄압이 강화되었고, 비슷한 시점에 미국에서도 이민제한법 연장을 취소하면서, 불매운동은 10월 이후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100년의 시간과 불매운동의 변질

 

1905년의 미국 상품 불매운동은 중국에서 전국 단위 불매운동의 효시가 되었고, 이후에도 중국에서는 열강의 침탈 행위에 저항하기 위한 불매운동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당시 불매운동의 배경과 진행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불매운동의 근저에는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의 동력이 깔려 있었다. 외세에 의한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는 해외의 동포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과정에서 중국인으로서의 공감대가 널리 확산되었고, 불매운동을 통해서 중국의 민족적 정체성은 한층 더 강화될 수 있었다. 1905년의 미국 상품 불매운동이 근대 중국 내셔널리즘의 형성 과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이유이다.


100년이 지난 현재의 불매운동에서도 일정 부분 유사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사드와 X밴드 레이더의 한국 배치가 중국의 안보에 일정한 위협 요인이 되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오바마 정부의 동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 전략, 미 및 미일 동맹체계의 강화 등, 동아시아에서의 주도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사드를 한국에 배치하는 것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분명한 위협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외세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사회적 차원에서 불매운동을 전개하는 모습은 일견 100년 전의 불매운동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1905년의 불매운동과 2017년의 불매운동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20세기 초의 불매운동이 약자로서의 저항을 위하여 아래로부터의 조직화를 통해 이룬 것이었던 반면, 현재 중국의 불매운동은 강자로서의 압박을 위하여 위로부터의 조직화를 통해 실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1905년에는 제국주의의 침략 아래 국토가 갈래갈래 찢겨나갈(‘과분瓜分’) 위기에 처해 있던 상황에서, 통치력을 상실한 청조라는 국가권력을 대신하여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조직화하여 불매운동이라는 형태로 저항하였다. 하지만 2017년 현재의 불매운동은 일단 그 대상부터가 정작 위협을 가하고 있는 당사자가 아니다. 사드의 한국 배치를 미국의 중국 압박으로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저항의 칼끝은 미국이 아닌 한국에 겨누고 있는 것이다.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이 상대적으로 약자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을 상대로 불매운동이라는 경제적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현재 중국의 불매운동이 물론 SNS와 인터넷 등을 통하여 중국 국민들의 자발적 행동으로 표출되고 있는 측면도 있기는 하지만, 관영 매체의 자극으로 촉발된 측면 또한 강하다. 100년 전과 달리 지금은 중국공산당이라는 강력한 통치세력이 사회를 장악하고 있으면서,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내셔널리즘을 활용하고 있다. 불매운동이라는 외면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1905년의 불매운동과 현재의 불매운동 사이에는 100년이라는 시간의 역사적 변화에서 파생된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중국은 더 이상 제국주의의 침략과 국가권력의 붕괴라는 이중고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국가가 아닌 것이다.


이원준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www.aixtsq.com/thread-61360-1-1.html

http://bit.ly/2qgJIEy

프린트 복사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