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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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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호
1960년 전후 북한화교의 국적문제 _ 송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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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8월 창건 당시 북조선 노동당 당 규약에는 노동당 당원의 자격으로 '조선 공민'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1946년 11월경 창립된 북한 화교연합회(華僑聯合會) 간부들은 중국 국적을 보유하는 동시에 북조선 노동당에 입당이 가능하였다. 실제 1956년에는 연합회 간부를 중심으로 47명의 화교가 조선노동당에 가입하였다. 1956년 4월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북한 당중앙위원회는 당 규약에 대한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새로운 당 규약 제2장 제2조에는 “조선 노동당원은 조선 공민으로서 당의 강령과 규약을 따르고…규정된 당비를 바치는 모든 근로자면 될 수 있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규약의 개정은 조선노동당원에 가입한 화교들의 귀화가 문제로 되었다. 북한 정부는 이미 노동당원이 된 화교의 국적문제에 대한 해결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1956년부터 새로 입당을 청원하는 화교에 대해서는 북한 국적의 취득을 필수조건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북한 화교연합회의 1957년 보고서에 따르면, 당 규약 개정 후 40여명의 화교가 국적변경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노동당 입당을 청원하는 적극분자이거나 북한 여성과 결혼한 화교가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중국 정부는 북한 화교의 국적이탈에 어떠한 입장을 취했을까. 1956년 8월 중국 주재 북한대사관은 해방 후 중화인민공화국이 국적법을 채택하지 않은 상황에서 ‘임시정책’에 의거하여 화교의 국적에 관한 업무를 처리했다.


 ‘임시정책’은 “국적의 취득과 이탈은 본인의 의사를 원칙으로 하며, 엄격하고 신중히 처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라고 규정되어 있고, 이와 동시에 중국인의 본국 국적 이탈 신청은 중국대사관이 허가여부를 결정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북한 화교가 국적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중국 정부의 동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위의 보고서에서 화교연합회는 북한 거주 화교의 대부분이 북한 국적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귀화는 ‘시기상조’라고 언급했다. 중국정부 역시 북한화교의 귀화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북중관계가 회복되는 1958년에 들어 중국정부는 북한화교의 현지화 정책을 취했다. 
 

1958년 4월 중국정부는 조선노동당에 가입된 화교의 국적문제에 대해 화교의 북한 국적 취득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다만 그 전제 조건으로 화교의 중국 국적 이탈 및 북한 국적의 취득은 그들 자신의 의향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고 부언했다. 또한 노동당원이면서 귀화를 원치 않는 화교에 대해서는 북한 노동당 측에서 그의 탈당을 포함한 해결 방안을 검토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 시기 화교연합회는 북한 노동당의 직속 하부기관이라고 재인식되어 평양의 중국대사관도 화교연합회와의 업무를 간소화했다. 북한화교는 화교연합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귀화 선풍이 일어났다. 각 지방 화교연합회 조직은 간부가 화교의 주택을 방문하면서 직접 귀화를 권유하기도 했다. 화교연합회 간부는 “중조 양국은 모두 공산당이 영도하는 사회주의국가이며, 조선의 건설에 참가하는 것은 즉 중국의 건설에 참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선국적을 취득하면 조선인과 평등하게 됨으로서, 장래에도 도움이 된다” 라고 설득했다.


1959년 이후 귀화 신청자가 많아져 중국대사관에 국적이탈 신청 자료가 쌓이면서 대사관 일상 업무에도 큰 지장을 줄 정도였다. 이에 대처하여 북중 양국은 귀화 수속을 간소화하자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 결과 화교의 북한 국적 취득은 신속히 확대 되었다.
 

1961년 6월 화교연합회 위원장 마옥성(馬玉声)을 필두로 연합회 중앙위원은 중국대사관에 중국 국적의 이탈을 신청했다. 중국정부는 그들의 신청을 받아들여 중국정부와 화교연합회 간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런데 당시 화교연합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왕서금(王瑞琴)은 1961년 당시 귀화를 주저하여 주위로부터 압력을 받았으며, 이 때문에 1962년 귀국의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화교연합회는 아직 귀화하지 않은 나머지 화교에 대한 귀화를 철저히 시행하기 위해 연합회 각 중앙위원이 각 도를 담당하여 각 지역에 대한 책임 구분을 명확히 했다. 북한화교의 귀화 비율을 보면 1960년은 북한화교 총인구 1만 4,351명(1958년)의 12%에 불과했지만, 1961년 8월은 50%로 급증했다. 1962년에는 80%에 달해 화교연합회 주도의 북한화교 귀화 사업은 기본적으로 거의 완료되었다. 
 

북한정부는 1963년 10월 9일 ‘국적법’을 제정했다. 동법 제6조에 “외국인은 민족, 인종에 관계없이 본인의 의향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라고 귀정되어 있다. 그러나 북한 거주 외국인의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화교의 국적문제는 북한 ‘국적법’이 발표되기 전에 이미 결정되었던 것이다. 
 

1965년 북중 관계의 악화로 화교는 북한정부로부터 여러 방면에서 많은 제한을 받았다. 이로 인해 화교는 다시 중국국적의 회복을 신청하였고, 1970년까지 대다수는 ‘화인’으로부터 ‘화교’의 신분을 되찾게 된다.



사진 1  평양중국인학교 소년단원(1955.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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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화교 교원 2명이 참석한 전국조선인학교 모범교원 위로회 모임(196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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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화교와 한반도 6】

 

송우창(宋伍强) _ 중국 광동외어외무대학(廣東外語外貿大學)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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