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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갯벌로에서
4월호
중국공산당에서 ‘핵심’의 의미 _ 안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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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중국공산당 186중 전회에서 시진핑(習近平)을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이후 중국정치에 대한 세간의 논의는 시진핑 1인 체제시진핑 장기집권으로 집중되고 있다. 최근에는 홍콩신문을 인용하여 심지어 시진핑사상이 중국공산당의 당장(黨章)과 헌법에 포함될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등장하고 있다. 사상이 아무 이름에나 붙일 수 있는 접미어가 아닐진대 나가도 너무 나갔다. 시진핑사상이 등장하고, 그래서 시진핑이 덩샤오핑을 뛰어넘어 마오쩌둥의 반열에 오를 것이란다.

 

홍콩에서야 워낙에 다양한 주장들이 난무할 뿐만 아니라 최근 행정장관 선출과 관련하여 속된 말로 열 받을 만큼 받고 있으니 자기 위안을 위하여 중국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가십거리라면 몰라도 진지하게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문혁 종결과 개혁이후 지난 30여 년 간 중국에서 이루어진 정치 사회적 변화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시진핑 핵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렇게 보면 핵심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술방망이처럼 보인다.

 

도대체 중국공산당의 지도부에서 핵심이 무엇이기에 핵심이 그렇게 전지전능한 것처럼 여겨지게 할까? 역설적인 것은 시진핑의 지위를 덩샤오핑까지도 뛰어넘게 할 것이라는 핵심이란 말이 덩샤오핑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재 중국에서 사용되는 의미의 핵심은 덩샤오핑이 처음 사용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핵심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중국공산당에서 지도자에 대한 핵심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등장하였는지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실권자에 대한 지칭으로서 핵심

 

중국정치에서 특정한 지도자에 대한 핵심이라는 술어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계기에서 등장하며, 유사하지만 다른 의미를 갖는다. ‘핵심이라는 표현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8011월 중국공산당의 정치국회의에서 였다. 당시 정치국회의에서는 화궈펑(華國鋒)의 실각과 당 주석직의 후야오방(胡耀邦) 승계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의 덩샤오핑(鄧小平) 승계가 실질적으로 결정되었다. 당의 최고지도자 직위를 계승하는 것으로 결정된 후야오방은, 정치국회의의 연설에서 누가 (주석을) 맡든 원로 동지들이, 특히 샤오핑(小平) 동지가 우리 당의 영도 핵심 중의 핵심이다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자신이 당 주석직을 승계하였지만 실질적인 권력이 덩샤오핑과 당의 원로들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의 핵심은 원로들과 덩샤오핑의 당내에서의 실질적 지위에 대한 서술이었다.


후야오방(좌)와 덩샤오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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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시 중국공산당은 문혁의 주요한 원인을 통제되지 않는 개인 독재로 규정하고,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802월의 115중 전회에서 집단지도체제 등을 원칙으로 하는 당내 정치생활에 대한 약간의 준칙을 이미 통과시킨 이후였다. 또한, 1904년생인 덩샤오핑은 이미 70대 중반을 넘겼기 때문에 자신이 최고지도자가 되는 경우 종신제를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자신은 물론 70세 이상의 누구도 당주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덩샤오핑이나 1905년생인 천윈(陳雲) 등 당시에 건재했던 원로들보다 10년이 젊은 1915년생인 후야오방을 당주석으로 추천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공식적 지위와 상관없이 혁명 1세대들이 혁명과 국가 건설 과정에서 형성된 강력한 권위와 당과 군대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덩샤오핑과 원로들은 자신들의 명목적인 직위와는 상관없이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다. 그래서 후야오방이 그들을 핵심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후야오방은 덩샤오핑을 핵심중의 핵심이라고 했지만, 당시의 핵심은 덩샤오핑만을 지칭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 덩샤오핑 시기는 형식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1인 지배체제가 아니었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건 시기 중국의 실제 권력이 당과 국가의 공식적 지도자가 아니라 퇴직한 ‘8대 원로에게 있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들 중의 실제 핵심은 보다 소수였다. 그래서 내부 사정에 정통한 중국 사람들은 실제 핵심권력구조를 덩샤오핑과 천윈에다가 리셴녠(李先念)을 포함하는 ‘2.5인 체제라고도 한다. , 동등한 권위를 갖는 덩샤오핑과 천윈에다가 엇비슷한 리셴녠이 실질적인 최고 권력을 분점 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의 핵심은 실질적 권력이 덩샤오핑과 원로들에게 있다는 의미의 내부적 표현이었지 공식적이거나 공개적인 표현은 아니었다.

 

덩샤오핑에 의한 핵심의 제기

 

당의 특정한 지도자에 대하여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의 핵심이라는 표현 즉, “특정인을 핵심으로 하는 영도집체(또는 당중앙)”라는 표현은 1989년에 등장한다. 그러한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것은 덩샤오핑이었다. 덩샤오핑은 1989년 톈안먼사건 이후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면서, 모든 지도부에는 핵심이 있어야 하는데 1세대 지도부는 마오쩌둥을 핵심으로 하였고, 1978113중 전회에서 형성된 2세대 지도부는 자신(덩샤오핑)을 핵심으로 하였으며, (새롭게 구성될) 3세대 지도부에도 핵심이 있어야 하는데, 장쩌민이 핵심이라고 했다.

 

그런데 덩샤오핑이 이때 핵심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장쩌민이 마오쩌뚱이나 자신과 같은 권위적 지도자라거나 혹은 그러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집단지도체제에서 권위의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집단지도체제는 권력의 분할로 인하여 의사 결정의 지체나 지도력의 통일성 부재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를 보완하기 위한 구심점의 필요성을 핵심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핵심은 집단지도체제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지도체제였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 핵심은 굳이 표현하지만 동등한 자 중의 일인자(primus inter pares)”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장쩌민은 1인자였기 때문에 핵심이었던 것이 아니라 집단지도체제라는 조직 체계의 필요에 따라 핵심의 지위를 부여받은 것이었다. 장쩌민이 3세대 지도부의 핵심이라고 일컬어졌지만, 이때에는 여전히 원로들이 건재하고 있었다.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는 아무런 공식적인 직위도 없었던 평당원 덩샤오핑이 당의 정책 방향을 전환시킬 수 있는 강한 영향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핵심으로 지칭되었지만 장쩌민 초기에는 원로들이 여전히 실질적 핵심이었다. 그렇지만, 장쩌민은 자신의 전임자인 후야오방이나 자오쯔양(趙紫陽)보다는 한 가지 점에서 운이 좋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전임자들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결정적인 것이었다. 장쩌민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기에는 실권자 원로들이 이미 너무 늙었으며 그들이 자연적으로 사라져 갔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에 따라 장쩌민은 명실상부한 실질적 핵심이 될 수 있었으며, 다른 지도자 보다 우월한 지도자가 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집단지도체제 내부의 동등한 자 중의 일인자로서 우월한 지도자였지 집단지도체제를 대체하는 1인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집단지도체제와 임기 제한

 

장쩌민은 1989년 당총서기가 되어 2002년까지 13년간 총서기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런데 1989년부터 1992년까지는 톈안먼사건으로 실각한 자오쯔양의 임기를 채운 보궐기간이었으며, 중국공산당의 통상적 절차에 따라 당의 전국대표대회 이후 총서기로 선임된 기간은 1992년부터 2002년까지의 10년간이었다. 다시 말해서, 보궐 기간을 제외한다면 199214차 당 대회와 199715차 당 대회 이후 등 두 차례에 걸쳐 총서기로 선출되어 중임을 하였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1982년 헌법 개정을 통하여 국가주석과 국무원총리 등 이른 바 국가직 공무원에 대하여는 중임제로 임기를 분명하게 제한하고 있다. 당직에 대하여는 대체로 중견간부에서 장차관급까지 적용되는 규정이 있지만 정치국 위원에서 최고지도자까지의 소위 국가급 지도자에 대한 명시적인 규정은 없다. 그렇지만 그들에 대하여는 대체로 비공식적인 연령규정과 중임제 규정이 기본적으로 준용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쩌민은 중임 후 2002년에 물러났으며, 후진타오(胡錦濤)도 중임을 하고 2012년에 물러났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최고지도자의 중임제는 헌법의 규정일 뿐만 아니라 공산당에서도 관례화된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규범은 문혁이후 문혁에 대한 반성과 그 이후 최소 30년 이상 중국공산당의 실천 과정에서 형성된 최소한의 합의이다. 그러한 합의는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 인민들에게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규범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규범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명확한 이유가 없는 한 쉽게 변경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경험을 통하여 형성된 중국공산당의 양보할 수 없는 철칙은 조직의 권위를 뛰어넘는 개인의 등장을 막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집단지도체제와 중임제를 원칙으로 하는 지도자의 임기제한은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다.

 

집단지도체제에 대한 원칙은 186중전회의 공보에 잘 드러난다. 6전 전회공보에서 시진핑을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와 정당에서는 지도 핵심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어떠한 조직과 개인이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어떠한 이유로도 그러한 제도(집단지도와 업무 책임의 개인별 분권이 결합된 집단지도체제)를 위반할 수 없다고 지적함으로써 집단지도체제의 원칙이 불변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공산당 지도부에서 핵심은 집단지도체제에서의 권력 중심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집단지도체제는 여전히 불변의 원칙이라는 것을 말한다. ‘핵심이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에서의 특수한 지위에 대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집단지도체제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단지도체제의 산물이다. ‘핵심은 집단지도체제를 대체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 집단지도체제와 대립하여 등장한 것이 아니라 집단지도체제이기 때문에 제기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핵심은 집단지도체제의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시진핑의 개인적 권위와 권력의 강화는 분명한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집단지도체제와 중임제 제한 내에서의 강화이다. 물론 그러한 규범 내에서도 권위와 권력을 연장시킬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혁 이후 집단지도체제와 중임제 등 제도나 규범의 재구성 과정에서 당시의 상황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그렇게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제도와 공식적 비공식적 규범이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변화의 필요성이 있는 한계를 가진 규범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자격 요건과 연령 규정 및 퇴직한 원로들의 정치개입을 가능하게 한 퇴직 규정 등과 관련된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호에서 다시 소개하도록 하겠다.


【2017년 중국의 정치적 변화 2】 


안치영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 / 중국학술원 중국자료센터장


                                          



* 중국공산당 지도부에서 핵심의 의미와 개혁시기 정치 제도화 관례화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졸고, “중국공산당 지도부에서 핵심의 의미와 시진핑의 정치적 지위,” 중앙사론 44(201612) 참고.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bit.ly/2n8J8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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